“남한 소식, 주체사상 뚫고 내면의식에 자리 잡아”
“남한 소식, 주체사상 뚫고 내면의식에 자리 잡아”
  • 미래한국
  • 승인 2010.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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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北 김일성? 학생이 접한 남한 삐라


[인터뷰] 장동국  가명·43세·김일성종합대학 졸업, 2007년 입국


간부계층 아닌 일반주민들에게 영향력 몇 배나 클 것
북 주민 10분의 1 가량이 DVD·USB 통해 남한 드라마 접해



- 북한에서 처음 남한의 삐라를 접한 것은 언제이고, 거기엔 어떤 내용이 있었나요.

1991년 가을 농촌지원을 나가 산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삐라를 처음 봤어요. 곁눈질로 얼핏 봤는데 탈북민들이 한국의 북한산에서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정말 한국에 가면 이렇게 잘사나, 차도 많고, 상상이 안 되는 것이었죠.

또 한번은 같은 해 내가 다니던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새벽에 비상집합을 했는데 대학 앞마당에 삐라가 널려 있었어요. 새벽에 아직 아무도 없을 때 삐라를 거둬들이라고 지시를 받았어요. 내용을 보지 말라고 했지만 호기심에 곁눈질로 몇 개 봤어요. 삐라 앞면에는 찢지 못하도록 김일성 초상이 있고 뒤에는 남한에 대해 썼는데, 김일성도 해방 직후에는 태극기를 사용했다는 내용과 한국의 농촌 풍경의 사진도 있었어요.

- 남한 방송도 들었나요.

방송을 처음 듣게 된 것은 2003년 아버지의 실수로 혁명화구역에 내려갔었을 때였어요. 탄광에서 아는 사람이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죠. 북한에서는 공안 당국이 중앙방송만 들을 수 있도록 라디오 주파수 조정선을 봉입한 후 그 위에 도장을 찍어요. 그렇지만 북한 사람들은 그것을 떼서 밤에 다른 방송도 몰래 들어요.

제가 처음 들은 내용은 유엔이 북한에 50만 톤 식량을 보내주고 한국에서도 쌀을 보내줬다는 내용이었어요. 북한 주민들은 이런 것들을 몰라요. 쌀을 보냈는지 몰라요. 남한에서 신라면도 보냈다고 들었는데 어떤 간부는 자기 집의 방들을 다 신라면으로 채워놓고 그것을 인민들에게 팔더라고요.

한번은 사람들끼리 술을 마시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어요. 북한에서 딱 한 사람이 죽어야 나라가 잘 살 수 있다, 그리고 남한은 잘살기 때문에 평화를 원하고 전쟁을 안 하려고 하고 있는데 못살아서 파괴당해도 손해 볼 것이 없는 북한이 전쟁을 하려고 한다는 등이죠. 주민들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 당시 삐라나 방송을 접하고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요.

당시 저는 주체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냥 ‘남한이 저렇구나’ 하며 큰 환상은 없었어요. 해방 직후 김일성도 태극기를 사용했다는데 왜 우리는 그 깃발을 사용하지 않고 조선인민공화국 깃발을 사용하느냐는 얘기를 몇몇 친구들이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때 저는 김일성 주석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웠으니까 깃발도 만들었겠지 하면서 의문을 넘겼어요.

한번은 전방에서 근무하던 대학 동창이 있었는데 ‘남한에서는 군인들이 아주 멋있게 생활을 한다’는 얘기를 했어요. 처음에는 믿지 않았죠. 남한은 북한보다 못하다, 남한 사람들의 자본주의적 생각이 나쁘다고 생각했죠. 내가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 이런 인식을 가진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고 들었어요. 평양사람들, 특히 저 같은 김일성대 졸업 학생들은 아직도 이 주체사상으로 완전 무장되어 있어서 남한이 잘사는 것에 관계없이 오직 김일성과 김정일 밖에 없다고 믿고 살아요. 그러나 삐라나 방송을 통해 생겨난 의문이 무의식 중에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고, 이후 남북의 진실을 접하면서 완전히 변화되는 계기가 됐어요.


- 특수계층인 평양주민들이 아닌 타지방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주체사상에 대한 무장이 약할텐데 그들에게 삐라의 영향이 더 크지 않을까요.

간부 계층과 달리 일반 주민들은 모르던 내용을 알게 되면 영향이 더욱 클 거예요. 고난의 행군 때 북한 주민들은 굶어 죽고 있었는데 김정일은 그 때도 풍요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북한 주민들은 몰라요. 삐라를 본 북한 주민들은 정말 김정일이 이런 사람이냐 하면서 의아해 한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북한에서 김정일의 사생활 정보는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거든요.

휴전선에 있는 군인들이 대북방송을 듣고 세계 흐름이나 남한에 대해 듣고 이를 전파하면 북한 주민들에게 영향이 클 것이예요. 김정일 한 사람을 위해 북한 주민들을 굶기며 혹사시키는 것을 알게 되죠.


- 남한의 드라마나 문화가 북한 주민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 영향력이 대단히 크죠. 드라마에서 발전되고 잘사는 한국 사회를 보면서 자본주의가 이래서 좋은 것이구나 하는 것을 북한 주민들이 알게 되죠. 김정일이 정치를 못한다는 것을 깨닫죠. 드라마의 영향력이 큽니다.


- DVD도 많고 요즘에는 또 USB로 남한에 대한 정보를 나눈다던데,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남한의 드라마나 문화를 접하고 있나요.

예전에는 DVD로 봤는데 지금은 컴퓨터로 본다고 해요. 그런데 컴퓨터가 집집마다 있는 것은 아니고 돈이 있는 집에만 있어요. 10명 중 1명의 비율로 남한 드라마를 봤다고 생각해요. 북한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남한 드라마를 보지만 그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아요. 뿐만 아니라 본 사람들이 다른 친구들이나 이웃들에게 남한의 발전된 모습을 전해 그 영향력이 크죠.


- 삐라나 방송, 드라마 등으로 북한 체제가 변화되는 것이 가능할까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이전에는 북한 주민들이 진실을 몰랐는데 삐라나 대북방송을 통해 외부 사회, 김정일 사생활과 인권에 대해서 알게 되니까 김정일 하나를 지키는 것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점점 하게 됩니다. 아무리 지배계층이 권력으로 탄압해도 주민들이 저항하면 체제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개인적으로, 북한에서의 성장 환경과 생활은 어땠습니까?

유치원 때부터 밥 먹기 전에 ‘위대한 수령 아버지 김일성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하는 것을 배우며 자랐어요. 아버지가 중앙기관에서 근무해 우리 가족은 공급도 잘 받았어요. 1960년대 평양 시민들의 생활은 나름 괜찮은 편이었죠. 자라면서 세뇌교육을 받아 김일성에게 충성하면 나도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민학교에 다니는 7살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이나 밤에 김일성 동상을 청소하러 다녔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6년의 군복무를 마친 후 1988년 김일성대에 입학했죠.

대학을 다니던 1989년 7월 1일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북한에 있었는데 통일의 꽃이라는 남한의 임수경 학생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통해 북한에 왔어요. 그 때 처음으로 남한 사람을 봤는데 행동이 자연스럽고 말이나 옷차림도 자유분방한 것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어요. 하지만 호기심을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에만 간직하고 있었죠.


-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제가 대학 졸업 후 정부기관에서 일할 때 아버지의 실수로 온 집이 혁명화 구역으로 내려가게 됐어요. 북한 전체가 식량난으로 우리 집도 굶게 됐어요. 3~4년 정도 혁명화 구역에 있다가 2003년에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중국으로 탈북했죠.
중국에서 남한에 대해 알기 시작했어요. 한국 회사에서 일하게 됐는데 한국 사람인 사장과 얘기도 하고 텔레비전도 보며 탈북민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북한에서 살면서도 북한 상황이 어떤지 잘 몰랐는데 정치범 수용소나 인권문제들도 알았어요. 김정일이 소련에서 태어난 것, 사생활이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김일성이 남침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죠. ‘진달래 꽃 필 때까지’ 라는 탈북민을 주제로 한 영화를 봤는데 우리도 같은 처지라는 느낌을 받고 북한이 이런 사회였던가 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라디오도 듣고 남한에서 온 드라마 ‘슬픈 연가’, ‘겨울 연가’ 등을 보면서 남한이 발전됐다는 것도 그때서야 깨달았어요. 그래서 2006년에 온 가족 6명이 남한에 가기로 결심했어요.

- 평양 사람과 지방 사람이 인식이 많이 다르다고 하는데 그들이 교류하지 않나요.

1990년 제가 평양에 있었을 때 그때는 서로 잘 모르더라고요. 지금도 평양 사람들은 지방에 사람들이 아무리 못산다고 해도 그렇게 못사느냐며 잘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제가 중국에 있었을 때 중국의 친척을 방문하고 온 평양에 사는 사람과 전화하며 물어본 일이 있는데 지방이 못사는 줄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평양 사람들은 아직도 북한은 강국이라고 믿고 있고 김정일을 좋게 생각해요. 그러나 지방 사람들의 인식은 반대에요. 김정은이 후계자로 나선 것도 평양에서는 찬양하더라고요. 평양 사람이라고 다 잘사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쌀도 꿔서 먹는 등 지방만큼 경제적으로 힘들지는 않아요. 평양 사람들이 불만이 있더라도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아 그럴 수도 있을 거예요.


- 북한에 평양 수준의 다른 도시가 있나요.

큰 도시는 많지만 평양만큼 문화적으로 발달되고 깨끗하지는 않아요. 북한에서는 주민들이 전반적으로 못살아요. 그저 먹고 살 정도이고 텔레비전, 냉장고 등이 있고 먹을 식량이 있을 정도면 잘 사는 집이라고 여겨요.


- 백화점이 있고 남한에서 인기 있는 상품들을 파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외화로 매매하는 상점이나 식당이 있어요.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니라 돈이 상당히 많은 사람만 가죠. 북한은 남한보다 가격을 두 배 정도 높이 파는데도 그런 값을 내면서 사고 먹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이런 사람은 극소수죠.


- 북한의 대학에서는 인문이나 사회과학 관련 학과들이 있나요. 대학 생활은 어땠는지, 그리고 교수진에 혹시 외국 사람은 없나요.

저는 사회과목을 전공했어요. 1년에 적어도 5개월 정도는 행사에 동원돼야 해서 공부할 시간은 별로 없었어요. 북한에서의 대학 공부라는 것이 그저 수령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한 정신을 가지도록 사람을 키우는 것뿐이에요. 기본 과목은 다 있고 교과서도 있지만 그것을 다 배우는 것은 아니고 혁명 역사 같은 과목만 배워요. 논리학 심리학도 있지만 북한에서 만든 교과서고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는 데 중점을 둬요. 다른 것은 다 못해도 혁명 역사만은 꼭 암송하듯이 외워야 돼요. 아무리 다른 수업을 잘해도 혁명 역사를 못하면 사회에 진출을 못해요. 입학하는 첫 날부터 유일사상 10대원칙을 배우는데 한 글자도 빠짐없이 암송해야 해요. 하나라도 빠지면 퇴학 또는 지방에 추방되죠. 그리고 제가 다녔던 대학에서 외국 사람은 못 봤어요. 외국어 교수들도 다 북한 사람들이었어요.


- 대학생들이 정치에 관심 많나요.

대부분이 정치에 관심이 많죠. 남한과 북한의 관계, 한반도의 미래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연구도 많이 해요. 하지만 남한 실정에 대해 잘 모르면서 일방적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어요.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산다는 것은 이제 아니라는 것도 알고요.

5·18 때 정부에서 남한 뉴스를 북한 사람들에게 보여줬는데 남한 대학생들이 머리도 기르고 옷도 잘 입고 시계도 있고 차도 있는 것을 보고 알게 됐어요. 북한에서는 그게 멋있어서 남한 사람들 따라 한다고 머리를 기르고 했는데 북한 정부에서는 남한 사람들이 이발할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선전했어요. 우리는 그 선전을 단순하게 믿었죠. 열 번 선전하면 안 넘어오는 사람이 없다고, 거짓말도 계속 하면 결국 다 믿게 되는 것 같아요.


- 마지막으로 미래한국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부터 북한에 지원한 것이 다 군부에 갔어요. 그런 방식으로 북한 주민을 도와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현재 한국에 온 탈북민들이 계속 북한에 있는 가족 친척들에게 돈을 보내주고 남한 소식을 알려줘요. 북한에 있는 가족이나 친척들은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파해 북한 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죠.

현재 한국에 입국한 2만 명에 이르는 탈북민들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예요. 이들이 한국에서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도와주면 북한에 있는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지원하는 것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현재 북한 사람들은 ‘나도 탈북 친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고 해요. 이것도 대북심리전에서 중요한 점이 아닌가 생각해요. #

홍근호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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