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戰場)의 이승만 대통령과 장군들
전장(戰場)의 이승만 대통령과 장군들
  • 미래한국
  • 승인 2010.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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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도산 전사연구원장


전쟁 원인


1945년 얄타회담에서 미·영·소 정상들이 한국을 신탁통치하기로 밀약한 것이 38선 장벽을 만들고 한국전쟁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1947년 말 미 육군참모총장 아이젠하워 원수, 미 해군참모총장 니미츠 원수, 미 공군참모총장 스파츠 대장, 미 합동참모본부의장 레이히 원수 등 합참 수뇌들은 아이젠하워 주도로 의견을 모아 미국에서 볼 때 한국은 전략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트루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군사 지식이 없는 트루만은 미군의 일급 전략가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1949년 미국 2개 사단이 남한에서 철수했고 1949년 중국 본토가 완전히 공산화돼 버렸다.

1950년 1월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내셔널클럽에서 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다고 선언했다. 이 말은 미국은 일본, 필리핀을 보호해 주지만 한국, 대만은 해당이 안 된다는 것이다.


전쟁 전야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수년전 맥아더 원수는 당시 미 육군 참모차장 리치웨이 중장에게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면 공산군 남침이 우려되는데 미국 정부가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맥아더 원수는 후배 브래들리 장군에게도 철군하지 않도록 얘기해 육군참모총장이 된 브래들리도 미군 철수를 반대했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1949년부터 1950년까지 1,000여 통의 전문을 워싱턴에 보냈다. 그 전문 내용을 보면 “중국 남부 복건성에서 임표의 제4야전군이 만주로 이동하고 있다. 1950년 6월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정확하게 보고했다. 

1945년 영국의 전사학자 리델 하트는 5년 후 1950년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언했다. 이에 대해 휴베리 미 UPI 통신사 사장은 미국 정부가 남침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6·25 이전 개성 송악산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수시로 벌어지기도 했다. 육탄 10용사가 적진에 돌격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1949년 5월 4일 한국군 제1대대장 표무원 소령이 군인 455명을 이끌고 월북했다. 제2대대 강태무 소령은 밀파된 인제 내무서장의 안내를 받아 월북했다. 1949년 5월 12일 해사 2기 이송학은 7명의 공산분자를 이끌고 해군 508정사령관 황웅서 중령과 정장 이기완 소령을 사살하고 해군 508정을 월북시켰다. 

 
국방 관계자의 의문점

일선 부대의 적정 보고를 채병덕 총장이 외면했다. 1950년 3월 8사단장 이형근 준장이 공비를 생포하고 곧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알렸으나 들으려 하지 않았다.

1950년 6월 10일 전방의 사단장, 연대장을 교체 이동했다. 6월 13일 내린 비상경계령을 6월 24일 돌연 해제했다. 군인 50%가 휴가를 갔다. 육군본부 장교 클럽 건물 낙성식에서 지휘관들이 댄스파티를 했는데 그 비용을 간첩 정국은이 지불했다. 남침 수개월 전 김홍일, 이응준 장군은 후방 예비사단의 전방배치를 주장했으나 채병덕 총장이 반대했다.

전쟁 준비가 안 돼 천애 요새인 한강 이남에서의 지연작전을 이응준, 김석원, 김홍일, 이형근 장군이 주장했으나 채병덕이 반대했다. 국군이 퇴각하는데도 6월 25일부터 27일까지의 방송은 반격 북진중이라고 허위방송을 해 군부, 국민들의 상황 판단을 그르치게 했다.

육군본부가 한수 이북에 있는 국군주력부대, 전투경찰,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이 도주한 후 한강을 폭파한 것은 반역행위이다.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 집행, 책임 소재를 가리지 않고 일찍 처형한 것은 정치적 복선이 있었음을 의심하게 한다.

김효석 전 내무장관의 애첩이 간첩 이중업의 누이동생이었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의 아들이 육군 소령이었는데 남로당과 연관이 있었다. 채병덕 소장 주위의 부관 신치호 대위, 나회광 중위, 식모는 첩자이고 행방불명이 됐다. 나회광은 장교 명단에도 없다.

트럭, 자동차, 군사 장비를 수리한다고 공장에 70% 보냈다. 김홍일 장군이 채병덕 총장에게 빨리 백선엽 부대를 철수하게 하라고 요구했으나 채병덕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1950년 6월 26일 공군정보국장 김현진 소령, 경리국장 이월준 소령이 행방불명됐다. 1사단 12연대 공병중대장 김동일 대위도 임진강을 폭파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행방불명됐다. 6월 25일 7사단 공병대대장 최정훈 소령은 오전 9시 운현궁에서 남침 지령을 받고 위장 결혼식을 각본대로 연출했다.


6·25에 대한 평가

맥아더 원수 : 만주 폭격과 중공해안을 봉쇄하고 미 해병대와 자유중국군 40만이 압록강변에 상륙하고 미군 특수부대와 자유중국군 10만이 나진에 상륙해 남하하고 미8군과 한국군이 북상하면 중공군 수십만을 포위할 수 있다.

미국은 한국에서 휴전을 해 훗날 월남에서 더 큰 피해를 보게 됐다. 전쟁에서 첫 번째 목적은 승리에 있는 것이지 미해결이나 휴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에서 승리의 대체물은 없다.

쪾알란 보로코 전 영국 합동참모본부 의장 : 내 판단에 의하면 맥아더 원수의 전략은 정당했다고 본다. 맥아더 원수는 군사전략가이고 군인정치가이며 독일과 일본을 통치해온 그분에게는 어느 정도의 재량권을 줘야 한다.

리치웨이 2대 유엔군 총사령관 : 미국 정부의 명령만 있었더라면 1951년 4월 말까지 한·만 국경에 도달 가능했다.

밴플리트 전 미 8군 사령관 : 트루만 대통령의 실책은 중공군을 쓸데없이 과대 평가한 것이다. 정치인이 군사작전에 참견해선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제한을 받은 전쟁은 해 본적이 없다.

클라크 3대 유엔군 총사령관 : 맥아더 원수의 만주 폭격, 국부군 사용, 중공 연안 봉쇄 주장은 정당하다고 본다.

브래들리 전 미 합동참모본부 의장 : 1960년 샐러리 이브닝 지(紙)와의 회견에서 한국전쟁 이후 10년이 지난 오늘날 회고해 보니 맥아더 원수의 주장이 옳았던 것 같다.

갈로아 전 프랑스 드골 대통령 군사고문
: 한국전쟁에서 트루만, 아이젠하워가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 아이젠하워는 공산군에 유리한 것을 다 들어주고 나서 뒤늦게 원자탄 사용 고려를 운운했다. 이것은 인간의 양식에 관한 문제이다. 아이젠하워가 제대로 일을 처리했다면 한국은 그렇게 이재민이 많이 생기고 황폐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테일러 미 8군 사령관 : 한국전쟁에서 미해결 상태인 휴전이 돼 월남 전쟁으로 확대됐다. 월남 전쟁 당시 한국의 이승만 박사 같은 지도자가 월남에 한 명만이라도 있었으면 월남은 공산화 안 됐을 것이다.

존 R. 하지 전 남한 주둔 미군사령관 : 미군정 시절, 한국 실정을 잘 모르고 이승만 박사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초토화되는 것을 보고 이승만 박사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

로마드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 : 아이젠하워가 고작 휴전한 것은 실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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