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떤 ‘제2 한국전쟁’ 천안함 사건
세계가 떤 ‘제2 한국전쟁’ 천안함 사건
  • 미래한국
  • 승인 2010.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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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예춘추 7월호] 고다케 사다히코 (小武定彦) 저널리스트


1999년 6월 서해에서 남하한 북한군 함정이 한국군에 사격해 교전을 일으켰고 9월에는 NLL 무효를 주장, 독자 경계선을 선언했다. 2002년 6월에 이어 2009년 11월 10일에 세 번째 교전을 시작했다.

2010년 3월 26일 밤 백령도 서남 약 2.5킬로미터 해상을 한국 해군 2함대 소속 1,200톤급 천안함이 항해하고 있었다. 1999년 1차 교전에도 참가했던 베테랑함이다. 3월 16일 밤 오후 9시. 104명의 승조원 중 오후 8시부터 야간 당직을 선 사람은 28명. 함교와 전투상황실 각 7명, 통신실 2명이었다. 소나에도 이상이 없었다.

함장은 9시5분경 함교 부근 함장실에 돌아와 군내부의 연락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승조원은 함 후부의 식당이나 침실에 있었다.

한국군의 검증에 의해 밤 9시 18분에 통화기록이 남아 있다. 그 4분 후인 밤 9시 22분 돌연 “꽝 꽝” 하는 폭발음이 함내에 퍼졌다.

북한이 이번에 천안함을 공격한 것은 2009년 11월 10일 연평해전 때 경비정이 대파된 패전 때문이다. 보복의 당사자로 추정되는 기관은 세 개가 있다. 황해도 해주에 사령부를 두고 있는 4군단, 북한 해군,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정찰총국이 그것이다. 정찰총국은 노동당의 공작기관인 작전부나 35호실을 흡수해 증강됐다. 35호실은 김현희가 소속돼 있었고 일본인 납치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어급 소형잠수함(300톤)이나 유고급 잠수정(80톤) 그리고 이번에 그 존재가 밝혀진 연어급 잠수정(130톤) 등의 반수 가까이는 정규군의 해군이 아니고 정찰총국이 운영한다고 한다.

위 3곳 중 어디서 이번 공격을 주도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연평해전의 복수와 군의 위신 회복을 노린 것임에 틀림없다.

군내의 쿠데타가 두려워 스스로 군의 최고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공포를 해소하려 했던 김정일로서는 군의 의견은 ‘장군에 대한 충성’을 명목으로 하면서도 절대적 영향력이 있다. 후계자인 셋째 아들 김정운도 현재 국방위원회나 총참모부에 적을 두고 있다고 한다. 군의 권위가 흔들리는 것을 원만한 후계 승계의 방해요소로 보고 있다. ‘후계 문제만 해결된다면 인민이 몇 명이 죽든지 상관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오는 상황으로 볼 때 군 주도로 이번 사건이 발생한 것만은 틀림없다.



연평해전 보복차원 천안함 공격

이 사건이 나기 1주일 전쯤 북한이 미국에 미북 양자회담을 전제로 한 6자회담의 예비회의에 참석할 의향이 있음을 전했다. 예비회의는 2월 말 의장국인 중국이 제안한 아이디어였다. 이는 미북 양자회담 말고는 관심이 없다는 북한과 6자회담에 무조건 복귀를 약속하지 않는 한 미북 양자회담에는 응하지 않는다는 미국과의 사이에 있는 중국이 짜낸 고육의 절충안이었다.

미국은 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일 방침을 굳히고 4월 중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 뉴욕에서 접촉할 준비를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천안함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북한 내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혼란했을 것이다.

4월 2일 방한한 캠벨 미 국무차관보가 한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위성락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마주앉았다. 북한의 관련 여부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청와대에 반해 국방부나 외교통상부에서는 북한 관련 주장이 대두되고 있었다. 위성락 본부장은 한국 정부 내의 어려운 상황을 호소하며 미북 협의가 선행되지 않도록 호소했다. 캠벨은 한국의 뜻을 존중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천암함 사건 조사가 끝날 때까지 북한과 협의하는 일은 없다”고 한국에 전했다고 한다. 일단 한미 보조는 맞춰졌지만 그후 이명박 대통령이 강경해지는 것을 미국은 불안해하고 있다. “어떻든 한국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 한미의 일치된 행동을 보여야 한다.” 이에는 전쟁만은 피하고 싶다는 미국의 절박감이 있다. 물론 중동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는 미국이 끝까지 한국과 행동을 한다고 보증할 수 없고 가능한 한 한국의 분노를 진정시키는 미국의 작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태 판단을 잘못했다가는 한국의 폭발을 초래할지 모를 일이다.

4월 26일 중국 방문 귀로에 서울에 들른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이명박 대통령,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잇따라 회담한 후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침몰 원인 조사 결과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유엔 안보리 논의를 지원한다는 입장을 새삼 강조해 “북한 지도자의 책임을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한국은 어려운 상황이지만 감정적으로 흐르지 않고 잘 대응했다”고 말해 우회적으로나마 한국의 보복 의지를 견제하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미간의 국면 전환이 있었던 4월 2일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한다는 극비 정보를 접했다. 이 중국 방문은 김정일의 ‘최후의 해외 여행’이 될지도 모를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2012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연다’고 국민에게 약속했지만 경제 재건이 지지부진해 진전이 없다. 오히려 김왕조를 비난하는 소리가 늘고 있다. 2009년에는 한국과 정상회담을 모색했고 경제지원을 끌어내는 전략을 폈지만 실패했다. 올해 식량 부족을 해소할 방도가 서지 않고 춘궁기 식량난도 눈앞에 다가왔다.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 중국 방문은 피하고 지나칠 수 없는 관문이었다.

그런데 이날 김정일을 태운 특별열차는 국경의 중조우의교를 건너지 않았다. 한국의 보복을 두려워해 예정을 변경한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4월 2일 중대한 중국 방문을 앞둔 김정일이 어찌해서 직전에 한국 공격을 명령했을까. 공격을 하면 당연히 중국 방문 스케줄에 영향이 오는데 말이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아마도 공격일까지 사전에 몰랐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잠수함을 보내더라도 적의 함선이 가까이 올지 어떨지 발견당하지 않을 만한 환경이 갖춰져 있을지 하는 것은 현장에 가서야 비로소 아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무선은 봉쇄돼 있다.
김정일도 중국 방문 직전에 공격 타이밍이 오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 아닐까. 또 공격을 했다고 해도 한국의 반격이 있을 뿐 국제간의 심각한 영향을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천안함 사건 1주일 전 북한, 양자회담 예비회의 참석 의향 전해

김정일의 행동을 되돌아보면, 직접 미국의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국제 여론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온 눈치인 듯하다. 중국에 대해서도 스케줄을 변경하면 그만이라는 정도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충분히 추측된다.

실제 천안함에 대한 공격이나 중국 방문 스케줄 변경에 초조해하는 것은 오히려 중국이다. 원래 이번 김정일의 중국 방문은 1년 전부터 중국이 제안한 것이다. 이제 와서 ‘오지 말라’고 할 수 없고 더욱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게 된다. 그렇다면 빨리 불러들여 김정일에게 ‘6자회담 예비회의 지지’를 말하게 해 귀찮은 공을 미국에 던져 버리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4월 8일 다시금 북한 호위총국 관계자들이 베이징을 방문, 서둘러 스케줄 재조정이 이뤄져 5월 3일부터 중국 방문이 결정됐다.

그러나 중국의 내심은 결코 평온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은 작년 7월 북한이 5월에 실시한 핵실험을 맞아 후진타오 주석이 극비리에 국가안전보장회의에 해당하는 ‘외사영도소조(?事領導小組)’를 개최했다. 새로운 대북정책을 수립하는 장(場)이 된 이 회의에서 중국은 북한의 비핵화보다 한반도의 안정을 우선하는 정책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북한이 정말로 한국의 초계함을 침몰시켰다면 이는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정도가 아니라 전쟁행위에 해당한다.

한미일과 함께 북한을 비난하면 북한을 한 수 더한 모험행위를 하도록 몰고가는 모양이 되고 그렇다고 그냥 봐넘기기도 곤란하다.
이런 고민의 표현이 김정일의 중국 방문으로 나타난 것이다. 포인트는 5월 6일 밤. 이날 베이징에서 후진타오 주석은 김정일과 함께 북한의 피바다 가극단이 출연하는 중국의 전통소설 홍루몽 가극을 감상하기로 돼 있었다. 공연 직전에 대량의 티켓이 외교 관계자들에게 흘러 나왔다. ‘더 필요하지 않게 됐으니까’ 이런 소리가 이쪽 저쪽에서 흘러 나왔다.

“한반도의 긴장을 높이는 행위는 자제해야지.” 후진타오 주석은 전날 북중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제안한 ‘6자회담 예비회의’가 북한의 모험주의에 의해 무너진 것에 대한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역으로 김정일은 중국에 대규모의 투자를 부탁했다가 냉담한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서로 맞물리지 않는 기분이 가극 감상의 중지로 나타난 것이다. 김정일은 7일로 예정됐던 베이징 출발을 하루 앞당겨 6일 저녁 열차로 베이징을 떠났다.

현재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의 대북제재 논의를 요청하는 한국에 대해 고개를 흔들고 있지만 북중 관계도 결코 온전하지 않은 상황이다.

전쟁 발발 위기를 앞에 두고 일본은 출발부터 뒤뚱거렸다. 원인은 정보 부족이다.

일본은 도쿄나 워싱턴, 서울, 베이징을 중심으로 초계함 침몰의 진상에 접근하려 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신중한 자세를 보여 경계를 낮춘다. 다음에는 미국이 한국에 약간 보조를 맞추는 움직임을 취하는 것이 결정적 요인이 됐다.

도쿄 외무성에는 ‘북한의 관련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뢰에 의한 공격은 생각할 수 없다’는 네거티브한 정보만 모아졌다.


한국, 일본의 교과서 검정 문제에 불만

한국도 싸늘해진 시선으로 일본을 보고 있었다. 작년 9월 하토야마 정권 발족 당시 한국 정부는 큰 기대를 했다. 하토야마 총리가 취임하기 전 종군 위안부 문제나 역사 인식에 전향적인 발언을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외국인 지방 참정권 부여 법안은 틀림없이 성립될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한국 관계자도 있었다. 그런데 약속은 줄지어 휴지가 되고 3월말에는 소학교의 교과서 검정을 할 때 독도 서술에 관해 소학교 5학년 교과서에 강화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천안함 문제로 여유가 없는 우리를 노린 기습 행동이냐”고 농담인지 진심인지 분간이 안가는 말을 하는 한국 정부 관계자도 있었다.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도 한국을 불안하게 했다. 한반도 유사시에는 후텐마에 있는 주일 미 해병대가 한반도를 향한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병력에서 뒤처지는 북한군은 전격작전으로 나올 가능성이 많다. 전쟁 시작의 성패가 수도 서울의 피해 규모를 크게 좌우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고 한국군은 분단위로 방위작전을 세우고 있다. 그럼에도 후텐마의 미 해병대가 괌까지 후퇴하면 해병대의 한반도 도달이 며칠은 늦어지게 된다. 하토야마 정권의 행동은 한국의 눈에 ‘짓궂은 짓’으로 비쳐져 왔다.

이 대통령은 4월 6일 침몰 원인 조사에 국제사회의 참여를 요구해 동맹국인 미국,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영국, 중립국 이미지가 강한 스웨덴, 북한과 국교를 가진 호주 4개국이 선정됐다. 그러나 이웃 나라인 무인 해저탐사능력에 빼어난 일본에는 요청하지 않았으며 또 일본 정부도 스스로 나서기를 주저했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5월 16일 아침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오카다 가츠야 외무 장관과 회담할 때 오카다 외무 장관이 “전면적인 지지”를 표명해 유 장관도 “북한의 관련은 명백하다”고 응했다. 이때 이미 한국은 북한이 관련된 결정적 근거인 어뢰의 스크루 부분을 회수, 미·영·호·스웨덴 등과 함께 최후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이 일본에 알려진 것은 이틀 뒤인 18일. 한국이 ‘북한의 우호국’으로 인정하는 러시아와 중국과 같은 타이밍 통지였다.

하토야마 총리는 늑장부림을 만회나 하려는 듯이 “제재의 선두에 선다”고 흥분했으며 사이키(齊木) 아시아 대양주 국장도 5월 28일 급거 서울에서 한미 양국 정부 당국자와의 회담에 임했다. 그런데 한미 양국은 외교면에서는 일본의 협력을 요구하고 있지만 군사면에서는 거의 정보를 주지 않으며 논의를 함께 하려 들지 않는다.

한반도 유사의 위기를 목전에 두고 일본은 ‘모기장 바깥’에 놓인 신세라는 것이 현실이다.  #

번역·이영훈 객원해설위원·교포교육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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