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플레이어 봉사활동으로 나이 잊은 영원한 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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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0.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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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상달 가정문화원 이사장·칠성산업 대표


칠성산업 대표, 가정문화원 이사장, 기아대책 이사장, 한국 YFC 이사장… 아직도 직함을 한참 더 열거해야 하는 분을 만나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호칭을 어떻게 할까요?”였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여러 단체의 이사장을 맡고 있으면서 원로장로인 그는 “회장, 장로, 이사장 등 다양하게 불리는데 이사장이 낫겠네요. 여러 단체 이사장을 맡고 있으니…”라고 했다.

이르면 40대 후반 늦어도 50대 후반이면 정점을 찍고 일이 줄어드는 게 보편적인 추세건만 날이 갈수록 바빠져서 도무지 쉴 틈이 없다는 두상달 이사장을 만났다. 고려대 경제학과 60학번인 그는 자신을 386세대라고 소개했다. 60년대에 출생해 80년대에 대학교를 다닌 30대를 이르는 말이다. 해당사항이 없는 두상달 이사장은 “요즘 386세대는 30년대에 태어난 88한 60대를 이르는 말”이라며 껄껄 웃었다. 60년대에 태어난 30대와 30년대에 태어난 60대들이 다 나이를 먹었으니 386세대는 어쨌거나 젊다는 뜻이다.

군살 없는 체형에다 얼굴 피부까지 팽팽한 두 이사장에게 “혹시 의학의 힘을 빌리셨나요?”라는 여성들에게나 해야 할 질문도 던졌다.

“전혀! 운동할 시간이 없어 겨우 숨쉬기만 하고 있습니다. 워낙 바빠서 1년에 골프장에 서너 차례 가는 게 고작입니다. 골프 나가면 하루가 다 지나가니 갈 수가 없어요.”

그는 사업, NGO 활동, 선교, 강연 등 여러 분야의 일을 하느라 한창 나이의 젊은이도 감당하기 힘든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다. 1974년에 창업한 칠성산업과 (주)SD를 경영하고 있으면서 기아대책 이사장, 한국십대선교회(YFC) 이사장, 중동선교회 명예이사장, 대한노인회 부회장,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부회장 등의 직책을 갖고 있다.

또한 가정문화원을 개설해 아내와 함께 가정행복전도사로 활약하고 있다. 대한민국 부부강사 1호인 두상달 김영숙 부부는 초특급 대우를 받는 인기강사로 연간 150여 차례 전국을 무대로 달린다. 바쁜 와중에 칼럼을 쓰고 책을 내고 방송 출연까지 하고 있다.


사업과 병행한 인생 후반기의 봉사활동들

두상달 이사장이 여러 단체에서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은 1974년에 창업한 칠성산업이 탄탄하게 유지되고 있는 덕분이다. 무역과 건축이 주종목이었던 칠성산업은 창업 당시 유류파동으로 잠시 어려움을 겪었으나 계속 순항하고 있다. 요즘은 건축과 부동산개발을 주로 하고 있다. 그는 사업도 동시에 몇 가지를 진행하는 스타일인데 5년간 개발해온 울릉심층수 사업은 작년에 대기업에 넘기고 주식만 보유하고 있다.

무게중심을 적절히 옮겨가며 사업과 봉사를 병행해온 그는 다른 회사에 다니며 실무를 익힌 아들을 올해 들어서야 칠성산업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 느끼지 않고 여러 단체에서 봉사를 하는 것이 보람”이라고 했다.

두상달 이사장은 자신이 멀티플레이어로 뛰게 된 바탕에 CCC(한국대학생선교회)가 있다고 소개했다. 고려대 3학년 때인 1962년에 CCC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그는 대학 졸업 이후 CCC 졸업생 모임인 ‘나사렛형제들’의 회장직과 기독교 21세기운동 청소년분과위원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실무훈련을 받았다.

“CCC에서 몇 천 명 단위의 집회 준비를 많이 했어요. 1970년에는 1만 명이 모이는 집회 준비로 바빴지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여의도에 수십만 명이 모인 ‘엑스플로 74’ 준비 과정입니다. 배식과 텐트 쪽을 담당했는데, 그 이전에 대형집회를 준비해본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지요. 현장에서 뛰면서 계속 노하우를 쌓고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무역회사에 다니면서 주로 CCC를 통해 봉사를 해온 두상달 이사장이 봉사의 영역을 넓힌 것은 칠성산업 창업 이후 사업이 한창 잘될 때의 일이다.

“앞으로 계속 사업만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돈 버는 길이 눈에 보였지만 돈만 벌면 돈의 노예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인생 전반전에는 영토를 넓히고 진급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게 당연하지만 인생 후반전까지도 거기에 매달린다면 초라한 인생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사업을 계속 하되 무게중심을 조금씩 섬김과 봉사 쪽으로 옮기기로 결심했습니다. 한때 정치 쪽에서도 얘기가 있었지만 봉사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현재 관련을 맺고 있는 여러 단체와의 인연은 대개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청소년단체에서 활동한 경험을 살려 한국십대선교회(YFC)에서도 활동했고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다. 반포교회 유년주일학교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25년간 어린이들을 가르친 일도 있다.

1984년부터 중동선교회 이사장을 맡아 열정적으로 달리다가 올해부터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다. 중동을 파악하기 위해 중동 20개국을 다녀올 정도로 열심이었던 그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10년 동안 이란에 갈 수 없었던 적도 있다. 중동선교를 위해 뛰면서도 그는 중동지역에 있는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본 일이 없다.

두 이사장은 봉사를 일찍 시작해야 그 단체와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어느 날 갑자기 단체에 찾아가 ‘나 은퇴했는데 일 좀 시켜 달라’고 부탁해도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젊을 때부터 시간과 물질을 투자해 봉사를 하면서 그 단체와 같이 가야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필요에 따라 무게중심을 적절히 옮겨가면서 사업과 봉사를 병행하고 있다. 그의 철칙은 어떤 단체에서든 판공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 선교와 관련이 있는 단체여서 오히려 성금을 내면서 일하고 있다. 사업하랴 봉사하랴 바쁜 데다 여기 저기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그로 인해 힘든 적은 없었다고 한다.

“경제학과를 나온 내가 생각해봐도 설명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 사업하면서 다른 쪽에 시간과 물질을 많이 투자하면 그만큼 어려워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결론은 사람이 열 번 도와주는 것보다 하나님이 한 번 도와주시는 게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부부학교에서 충격 받아 가정문화운동 시작

사업을 하면서 여러 단체의 일을 해온 두상달 이사장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가정문화 운동을 활발하게 펼치던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그가 가정문화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1983년에 지인에게 끌려가다시피 해 부부학교에 참석한 자리에서 받은 충격 탓이다.

“1969년에 결혼했는데 나는 그때까지 우리 가정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에서 아내가 갑자기 우는데 그냥 우는 게 아니라 속에서 터져 나오는 한 맺힌 울음을 토하더군요. 그동안 내가 던진 말과 표정이 전부 상처였다는 겁니다. 자녀들이 예의바르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빠를 무서워해서 경직돼 있었더군요. 그동안 ‘나 같은 남편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라며 큰소리 치고 살았는데 충격을 받았죠. 나는 시골 출신이고 아내는 서울 출신이에요.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데다 결혼 전에 ‘신혼 때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것만 알고 결혼했으니 아내의 고통을 몰랐던 거지요.”

그때부터 가정문화에 관심을 갖고 부부학교 강의를 듣던 중 1987년에 미국 CCC ‘패밀리 라이프’ 프로그램 창시자 레이니 박사로부터 가정생활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받으면서 내가 변화됐고 그러면서 아내와 자녀들과의 관계가 좋아졌습니다. 우리 부부가 교육을 받고 관계가 회복됐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자는 생각에서 모임에 가서 한 과목씩 강의를 해봤어요. 처음부터 아내와 함께 강의를 했는데 둘이 주고 받으며 강의하는 게 독특해서인지 입소문이 나 여기저기서 우리를 초청하는 겁니다.”

1990년에 ‘가정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창립하여 여러 차례 개명을 거쳐 현재의 이름인 가정문화원으로 사단법인 등록을 했다. 자신이 이사장을, 아내 김영숙 씨가 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강의를 하다 보니 공부의 필요성이 느껴져 아내를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가정회복 박사과정을 밟도록 했어요. 50대에 시작해 60대에 박사학위를 받았지요. 다들 ‘그 나이에 공부해서 뭐하려고 그러냐’고 그러더군요. 그때마다 우리는 ‘남들에게 주려고 한다’라고 답했습니다.“

결혼예비학교, 신혼부부캠프, 부부행복학교, 부부대화학교, 시니어부부학교, 중년학교, 노년학교, 아버지학교, 어머니학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두 사람은 지금까지 2,500여회의 특강을 했다. 가정문화원 주최 강연과 함께 관공서, 지방자치단체, 사회단체, 교육단체, 기업체, 교회 등지에서 열리는 초청강연을 했다. KBS TV <아침마당>을 비롯해 주요 방송사에 출연하고 주요 일간지에서 주최하는 강연에 초청강사로 나서기도 했다.

부부는 결혼주례도 동시에 하는데 결혼식을 통해 신혼부부는 물론 참석자들에게 행복한 가정을 위한 메시지를 전한다.

“전 국민에게 결혼 면허증을 마련해드리고 싶어요. 운전면허가 없는 사람이 운전을 하면 사고를 내고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남편 될 자격, 아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결혼 후 서로에서 큰 상처를 남기죠. 결혼식을 화려하게 할 게 아니라 결혼생활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가정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두 이사장은 2004년에 서울시 부부상과 국무총리표창을 받은 데 이어 2009년 가정의 달에 대통령표창을 수상했다. 아내 김영숙 원장도 국무총리와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우리가 하는 일을 홍보하려고 노력한 적이 없는데 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취재하러 오고, 그러다보니 알려지게 됐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욕심 부리지 않고 남한테 베푼다는 생각으로 달려왔을 뿐입니다.”

<아침키스가 연봉을 높인다>라는 책을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을 내고, 강의를 많이 하지만 인세와 강의료는 가정문화원 운영과 관련 사업에 사용한다.

그는 멀티플레이어로 바쁘게 뛰게 된 것을 아내의 공으로 돌렸다. 김영숙 가정문화원 원장은 이화여대 약학과 출신의 약사이다.

“결혼 전에 제약회사에 다녔어요. 결혼하고 나니 딱 그만두는 겁니다. 그때만 해도 어려울 때라 약사하고 결혼했으니 혜택을 보겠구나 기대했는데, 아내가 ‘없으면 굶겠다. 남편을 앞세우고 아이를 잘 키우겠다’며 전업주부 선언을 하는 겁니다. 그때는 은근히 섭섭했지만 돌이켜보면 3남매를 잘 키우고 나를 열심히 보필해줬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요.”

부부는 늘 “강의하는 대로 사나, 부부싸움은 안하나”는 질문을 받는다.

“인류가 다 멸망해도 바퀴벌레와 부부싸움과 고부갈등은 남는답니다. 우리 부부는 강의하러 가는 차 안에서 대판 싸우기도 합니다. 싸우되 잘 싸우면 문제가 없어요. 표현하지 않고 참고 살면 심장질환을 비롯해 각종 병에 걸릴 확률이 4배나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잘 싸우는 것, 속에 있는 얘기를 상대한테 제대로 토로하고 잘 들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의할 때도 주례할 때도 우리 부부는 싸우되 잘 싸우라고 권하고 잘 싸우는 방법을 알려주지요.”


아내의 ‘봉사 내조’

두상달 이사장은 아내가 드러나지 않는 봉사를 꾸준히 하고 있다고 ‘자랑’하며 흐뭇해했다.

“27년째 안양교도소 교정위원으로 봉사하면서 매주 한 번씩 죄수들에게 영어성경을 가르치고 있어요. 다들 교도소에 어떻게 가느냐고 하는데 아내는 ‘생활’이라고 대답합니다. 가정법원 조정위원으로도 몇 년째 활동하고 있어요. 한 달에 몇 차례 법원에 가는데 그때마다 엄청난 자료를 다 읽고 완전히 숙독해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요즘은 일이 많아서 좀 줄였지만 부부는 가정문제에 대한 무료 상담도 하고 있다. “내 인생은 끝났다”며 울던 사람이 상담 끝난 후 부부가 보는 앞에서 이혼서류를 찢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가정문화원 홈페이지(www.familyculture.net) ‘온라인 상담실’ 코너에 질문을 하면 충실한 답변을 달아주는데 그 일을 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든다고 한다.

“1990년대 초반부터 2002년까지 아내가 유명 메이커의 아웃렛을 운영했어요. 우리 건물 1층에서 어떤 분이 하다가 그만두자 본사에서 우리한테 권해서 하게 된 일이에요. 연간 매출이 40억 원이 넘을 정도로 운영이 잘됐는데 아내가 돈 버는 일 보다 더 근사한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싶다며 갑자기 정리해버렸어요. 다른 대리점 사장이 와서 자기네들보다 몇 배 더 잘되는데 그만 두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아내가 8년 전에 인생을 리모델링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입니다.”


“바쁠 때야말로 봉사를 시작할 때”

많은 사람이 노후에 사회사업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꾸지만 사실 돈을 모으기도, 남을 위해 쓰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두상달 이사장에게 ‘돈 버는 비결’에 대해 묻자 이런 해법을 제시했다.

“수없이 다가오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훈련과 습관, 사고의 태도와 판단력 등으로 순간순간 결정을 잘해야죠. 어떤 일이든 실패는 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을 때 원인을 찾아 고치면 성공하고 고치지 못하면 평생 그대로 가는 거죠. 판단을 잘못하면 순간적으로 큰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매사에 신중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사업하랴, 강연하랴, 각종 단체의 주요 모임에 나가랴, 바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사는 두 이사장은 “바쁠 때야말로 봉사를 시작할 때”라고 강조했다.

“남는 시간에 봉사하겠다고 생각하면 평생 못합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바쳐야 합니다. 할 일이 있으면 건강하고 삶에 활기가 넘칩니다.”

일요일에도 교회로부터 강의 요청이 많아 5년 전에 장로직에서 은퇴를 했다.

“전국구로 뛰게 해달라고 교회에 부탁했지요. 주일까지 쉬지 못하니 365일 달리는 셈입니다. 일이 많아 가끔 스트레스를 느끼기도 하지만 즐기면서 하니까 늘 기쁩니다.”

젊은이들에게 ‘봉사하는 삶의 노하우’를 전수해 달라고 부탁했다.

“퇴직하면 30년 40년의 시간이 있습니다. 한 우물을 파되 부전공식으로 봉사도 하고 섬기기도 하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봉사는 꼭 돈으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젊어서는 시간을 내서 참여하는 게 중요합니다. 젊어서부터 봉사를 체질화해야 합니다. 시간 없다는 핑계대지 말고 주변에서 작게 시작할 수 있는 봉사부터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두 이사장은 인생 후반전이라고 언제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65세가 넘으면 후반전임을 부인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후반전에는 가치와 보람을 느끼는 일, 유익을 끼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은퇴시기에 절반만 은퇴해 일을 완전히 놓지 않도록 조절을 잘 하는 게 중요합니다. 일과 봉사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잡으면서 면밀하게 준비하면 나이 들어도 오래도록 일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강의를 좀 줄이고 책을 내는 일과 가정문화원을 이어갈 후진 양성 하는 일에 힘쓸 계획이라는 두상달 이사장은 “젊어서는 소유가 즐겁지만 나이 들어서는 공유가 즐겁다”며 활짝 웃었다. #

글·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이승재 기자 fotolsj@futurekoea.co.kr


두상달·김영숙 행복전도사가 전하는 부부 십계명

  1. 서로 격려하는 말을 아끼지 말라.

  2. 배우자를 인정하고 그의 의견을 존중하라.

  3. 다른 부부와 비교하지 말라.

  4. 스킨십과 함께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하라.

  5. 두 사람이 동시에 화내지 말라.

  6. 아픈 곳을 찌르거나 상대방의 부모형제를 욕하지 말라.

  7. 해가 지도록 분을 내지 말고 화를 품은 채 잠자리에 들지 말라.

  8. 거짓말을 하지 말고 상대를 끝까지 믿어줘라.

  9. 하루 한 끼 이상 함께 식사하라.

10. 부부싸움을 하되, 행복의 원리를 적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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