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탈북여성의 기막힌 인생 여정
평범한 탈북여성의 기막힌 인생 여정
  • 미래한국
  • 승인 2010.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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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이야기] 탈북, 북송, 강제노동, 인신매매, 그리고…


“우리 네 자매는 모두 남한에 내려와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모두 그리스도인이구요. 첫째인 제가 교회 전도사고, 둘째가 집사, 셋째가 권찰이랍니다. 아버지는 현재 영국 런던의 한 한인교회에서 평신도 사역자로 탈북민들을 돌보고 있어요.”

7월 중순 서울 한 커피숍에서 만난 탈북민 차혜원 씨(41)는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며 활짝 웃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녀의 인생은 죽음과도 같은 처지였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서 전혀 새로운 세상을 살게 되었다”며 지난날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의 자살로 탈북 결심

차혜원 씨의 고향은 한반도 최북단인 함경도 온성이다. 아버지는 노동당 간부들의 차량을 책임지는 운전기사로 일했다. 어머니는 재봉틀 일을 했는데 차 씨가 15세 될 무렵 지병으로 세상을 뜨고 차씨가 3명의 여동생을 돌봐야 했다. 가난했지만 네 자매가 모두 고등중학을 나왔고 차 씨는 전문학교에서 크레인 기술을 배웠다. 그래서 지금도 크레인을 보면 운전하고 싶다고 한다.

차 씨는 의붓 엄마의 소개로 스물네살 때 세 살 위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은 네 살 된 딸을 둔 기혼남이었고 평범한 노동자였다. 차 씨의 집안이 결혼 지참금을 내놓을 만한 형편이 되지 못해 총각 남편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남편은 마음이 여린 편이었는데 집에서 지참금 탓을 하며 아내와 헤어지라는 핀잔이 잦아지자 아사자가 속출하던 90년대 중반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 차 씨는 시집 식구들의 천대와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탈북을 결심했다. 그때가 1999년 4월, 딸의 나이가 네 살 무렵이었다.

이미 2년 전 중국으로 탈북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차 씨는 여동생과 함께 딸을 업고 아직 녹지 않은 두만강을 건넜다. 그러나 차씨 일행은 탈북 직후 중국 공안에 발각돼 북송됐고 청진 도집결소에서 두 달, 온성 노동단련대에서 한 달을 고생하며 보냈다.

차 씨는 그곳에서 “생지옥을 경험했다”며 치를 떨었다. 도집결소에 처음 들어서자, 거의 백골 상태로 발가벗겨진 한 남자의 시신이 들것에 실려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수용된 사람들의 운명이고 또한 자신의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결소 안에서는 경비원과 남자 죄수들이 보는 가운데 여자들을 발가벗기는 일은 보통이고 숨겨온 돈을 찾겠다고 다리를 벌려 몸속을 검사하는 일도 허다했다.


생지옥 같았던 노동수용소

하루 두 끼 식사라고 주는 것은 한 움큼의 강냉이밥이 전부였다. 숟가락은 자살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손잡이 부분은 잘라버렸다. 한 입도 안 되는 밥알을 비닐 종이에 싸서 한 알씩 두고두고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허기를 면해보려는 것이었다. 몇 알갱이 소금도 나눠줬는데 소금이 그렇게 맛있는 줄은 그 때 처음 알았다.

도집결소에는 방 하나에 30명 씩, 모두 200여명이 수용돼 있었고 용변도 제대로 볼 수 없었으며 목욕은 물론 세수도 할 수 없었다. 그 가운데 ‘천행’이라고 해야할까. 차 씨는 노동단련대로 이송된 후 전염병인 파라티푸스에 걸려 고열에 시달렸다. 40도가 넘는 고열로 정신이상이 와서 헛소리를 하게 되자 차 씨는 온성 집으로 귀가 조치됐다. 인사불성이 돼 옷을 풀어헤치고 온 동네를 싸돌아다니던 차 씨는 놀랍게도 10일 만에 다시 제 정신을 찾게 되었다.

차 씨는 다시 탈북을 계획했다. 그리고 2000년 6월 어느 날 대낮에 딸을 업고 두만강을 건넜다. 강폭이 불과 30미터 남짓인 회령의 한 두만강 지역을 눈여겨 보아두었다가 경비가 느슨한 틈을 보아 강을 건넌 것이다.

참으로 무모한 탈북이었다. 강물 속에 들어서자 의외로 유속이 빨랐고 강바닥은 뾰족한 바위투성이로 매우 위험했다. 차 씨는 딸을 등에 업고 강물을 헤쳐 나아갔다. 갑자기 물이 깊어지며 차 씨는 몇 번을 물속에서 뒹굴어 떠내려갔다. 거의 포기할 만큼 기진맥진했을 때 큰 느티나무 뿌리에 걸려 중국 쪽 강변으로 오를 수 있었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이미 죽은 북한 여인의 처참한 시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인간 사냥꾼’들의 함정과 강제 결혼

그러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강변을 지나 둑을 건너야 중국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그 중간에 조선족으로 보이는 6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무리를 지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북에서 넘어오는 여자들을 기다렸다가 잡아 팔아넘기는 ‘인간 사냥꾼’ 인신매매범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강에서 올라와 탈진 상태였던 차 씨는 어차피 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에 딸을 업고 그들 앞을 지나갔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그들은 지나가는 차 씨와 딸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차 씨는 탈북 전에 강냉이밥과 된장 그리고 안전 면도날을 준비했다. 잡히면 수용소에서 생고생을 하며 죽느니 차라리 목의 동맥을 끊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온 몸에 긁히고 찢겨지는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차 씨와 딸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신발마저 강물 속에서 벗겨져 옷을 찢어 발에 감고는 100리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자동차 불빛이 보이면 길섶에 숨어 숨을 죽였다. 다행히 조선족 할머니를 만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얼마 후에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과수원에서 일을 하며 비교적 안전한 곳에 은신해 있었다. 차 씨는 이 과수원에서 딸과 함께 한 달가량 상처를 치료받으며 지냈다. 당시 어린 딸은 얼마나 굶었던지 차려놓은 밥상을 놓지 않고 토하면서도 계속 먹어댔다. “이 밥이 모두 네 밥이니 천천히 먹어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처럼 무서운 생명력이 있었기에 차 씨도 어린 딸도 죽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이다.

차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 생각하니 죽음의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의 도움과 계획이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신앙이 없었지만 할머니의 신앙과 하늘에 계신 어머니의 돌보심 덕분이라는 생각했다. 할머니는 천주교 신앙을 가진 분이었다. 할머니는 가끔씩 가슴에 십자가를 긋고 기도를 했으며 개신교에서도 부르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라는 찬송을 자주 불렀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 할머니를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그것이 할머니도 살리고 가족도 살렸다고 한다.


온 가족이 함께 남한으로


그러나 곧 아버지와 숨어 지내는 것에 한계가 왔다. 당시 국경 일대에는 탈북민들을 잡아 돈을 벌려는 공안들이 설쳐댔다. 그들은 얼굴이 반반한 여자들을 한족에게 팔아넘겼다. 차 씨는 위험을 피해 중국인들 속에 숨어들어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할머니를 돌봐주는 간병인으로 일했다.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시키는 일들을 1년 가까이 감내했지만 차 씨도 결국 인신매매범들에게 팔려 강제결혼을 했다. 이때 사내아이를 낳았으나 현재는 아들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그것은 그가 지닌 가장 큰 아픈 기억 중 하나로 두고두고 남게 됐다.

차 씨는 얼마 후 조선족에게 팔려온 여동생 소식을 접하고 동생을 찾아 목단강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생은 다행하게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남편을 만나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동생 집에 공안들이 들이닥쳤고 동생은 잡혀가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날 여동생이 집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목사와 남편이 손을 썼던 것이다. 차 씨는 그것이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었으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고백했다.

이후 여동생은 조선족 남편의 도움으로 남한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차 씨는 먼저 남한에 입국한 아버지의 도움으로 딸과 다른 여동생과 함께 남한에 입국했다. 차 씨는 현재 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찬양 사역자로서 꿈을 키우고 있다. # 

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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