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굴욕·두려움 … 세가지 감정으로 본 세계
희망·굴욕·두려움 … 세가지 감정으로 본 세계
  • 미래한국
  • 승인 2010.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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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감정의 지정학 (도미니크 모이시·랜덤하우스 刊) 최정환 자유주의진보연합 중앙위원


천안함 사태가 나자 중국은 일관되게 북한을 비호했다. 러시아도 천안함 침몰원인에 대한 국제조사단의 조사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두 나라 때문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된 천안함 문제는 결국 북한을 강력히 제재하는 안보리 결의 대신에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의장성명’의 헝태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아마 중국과 러시아도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공격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그 사실을 끝내 외면했다. 왜일까?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두 나라, 특히 중국의 경우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는 것이 자신의 지정학적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이성적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프랑스의 국제문제 전문가인 도미니크 모이시는 색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거기에는 두 나라의 ‘감정’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이다.

도미니크 모이시의 <감정의 지정학>은 바로 이런 ‘감정’이라는 관점에서 국제관계를 보는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공포의 서양, 굴욕의 이슬람, 희망의 아시아’다.


감정과 정체성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물론 공포, 굴욕, 희망 이외에도 다양하다. 저자는 이 세 가지 감정에 주목하는 이유에 대해 “이 세 감정이야말로 국가와 사람들이 직면한 도전 과제를 해결하고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결정적 요인이라 할 수 있는 ‘자신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두려움은 자신감의 부족을 나타내지만 희망은 자신감의 표현이다. 굴욕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상처받은 자신감’을 뜻한다.

저자는 “세계화 시대가 되면서 감정은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한 세상을 파악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됐다. 언론에 의해 확대된 감정은 세계화를 반영하고 이에 반응하며 지정학에 영향을 미친다”면서 “토머스 프리드먼의 유명한 문구처럼, 감정은 세계를 ‘평평’하게 만들기는 했으나, 그 어느 때보다 격정적으로 만들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왜 세계화된 시대는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가 됐을까? 도미니크 모이시에 의하면, ‘세계화가 불안정성을 야기하고 정체성(正體怯)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진영(陣營)논리’가 지배하던 냉전 시대에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체제가 바로 그 나라, 혹은 개인의 정체성을 바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탈냉전시대는 그렇지 않다. 저자는 “정체성은 자신감과 큰 연관이 있으며, 반대로 자신감과 자신감의 부족은 감정으로 표출된다. 특히 두려움, 희망, 굴욕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오늘날 정체성의 문제로 가장 고민하는 지역은 이슬람권일 것이다. 중세 1000년간 세계를 주름잡았던 이슬람권은 지난 수 백 년 동안 구미 열강의 식민지 내지 반(半)식민지로 전락했다. 중동 이슬람 세계 한 가운데에는 그들의 눈에는 구미 열강의 ‘앞잡이’에 다름 아닌 이스라엘이 눌러 앉았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아랍민족주의나 사회주의는 독재와 낙후된 경제만을 남겨놓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좀처럼 타개될 것 같지 않다. 때문에 오늘날 그들을 지배하는 감정은 ‘굴욕’이다.

‘굴욕’이라는 감정이 항상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 ‘굴욕’은 국민적 각성을 촉구하고, 더 나아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경우로 한국과 타이완, 그리고 근래의 중국을 들고 있다. 이들 나라는 과거 점령국이었던 일본에 자신들도 세계경제 무대에서 잘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했고, 따라서 아시아 지역에 일본이 가한 굴욕은 지역 전체에 활력을 주는 약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도미니크 모이시는 굴욕이 ‘좋은 굴욕’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낙담한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상당 수준의 전도유망한 정치적·경제적 배경이나 국가적 리더십 등과 같은 최소 수준의 자신감과 우호적인 상황’을 든다.

문제는 ‘희망 없는 굴욕’이다. 저자는 “희망 없는 굴욕은 절망에 이르며, 쉽사리 파괴로 향하는 자극으로 변모해 복수의 욕구를 더할 수 있다. 자신에게 굴욕감을 느끼게 한 이들의 수준까지는 도달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그들을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는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앞에서 말한 정체성의 문제가 겹쳐진다. 저자는 “특히 유럽의 무슬림 젊은이들의 경우 종교·성(怯)·가족과 관련해 고질적인 정체성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들은 파괴와 자살 등의 죽음을 통해 소외되고 외로운 삶에 의미를 부여한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이 유혹에 손쉬운 먹잇감이 됐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무엇이 떠오르는가? 여객기를 납치해 뉴욕의 쌍둥이 빌딩으로 돌진하고, 런던과 마드리드 시내 한 복판에서 자살폭탄테러를 자행하는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두려움 사로잡힌 구미, 희망 찬 아시아


이들의 1차적 공격대상이 된 구미 사회를 지배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단순히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무차별 공격의 대상이 됐다는 데서 오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그보다 더 본질적인 곳, 즉 자신들이 더 이상 세계를 움직이는 주역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온다.

유럽의 경우, 경제적으로는 새로이 대두하는 아시아의 도전을 받고 있고, 세계는 더 이상 그들의 뜻대로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자랑하던 민주주의마저 삐걱대고 있다. 냉전의 해체는 ‘유럽’이라는 집단의 정체성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슬람 테러는 유럽인들의 두려움에 불을 지르면서 그들을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유럽 각국에서 번져가는 외국인 혐오는 그 좋은 예이다.
미국의 경우는 어떤가?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도덕적 우월성, 미국 고유의 국가적 사명감, 국제사회에서의 미국의 위치 - 한 마디로 아메리칸 드림-를 상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다. 유럽이 느끼는 두려움 가운데 상당 부분은 미국의 두려움이기도 하다. 9·11테러는 미국의 두려움의 문화를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두려움의 깊이를 더했다.

설상가상으로 냉전 종식 이후 표면화된 미국과 유럽 간의 불신과 갈등은 양쪽 모두의 두려움을 심화시켰다.

이슬람세계나 구미와는 달리, 아시아는 ‘희망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희망은 자신감에서 나온다. 그 자신감은 경제적 발전, 특히 중국과 인도의 폭발적 발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만 경제적으로 침체하고 사회적으로 늙어가는 일본은 이러한 희망에서 벗어나 있다.

저자는 위에서 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타인과 자신에 대한 이해’를 강조한다.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와 관용, 변화돼 가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수용하는 슬기(예컨대 미국이나 유럽에게는 국제사회에서 축소된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라는 얘기), 자기 고유의 가치를 재해석하고 이를 공유하려는 의지 등을 강조하면서, 특히 미국에서 국제사회에서 보다 겸손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이 저자의 주문이다.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감정의 색깔은?

희망, 굴욕, 두려움이라는 세 가지 감정의 잣대를 가지고 세계를 분석하는 도미니크 모이시의 관점은 한반도 문제나 국내 정치를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 

남북한 관계에 저자의 공식을 대입한다면, 저자도 말하듯이 대한민국은 ‘굴욕감’을 국가발전의 에너지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국가이다. 다행히 우리는 이승만-박정희 정권 시절에 모이시가 들었던 ‘좋은 굴욕’이 되기 위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북한은 ‘나쁜 굴욕’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총체적 ‘실패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이 굴욕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라로 추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희망의 대한민국’이어야 한다. 그리고 ‘희망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몫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굴욕(상처받은 자신감)과 두려움(자신감의 부족)부터 몰아내야 할 것이다. #

/이슈와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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