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명의 名士가 말하는 생생한 6·25 체험담
35명의 名士가 말하는 생생한 6·25 체험담
  • 미래한국
  • 승인 2010.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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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안내] 60년 전 6·25는 이랬다 (김동길 외·조선뉴스프레스 刊)
▲ 김동길 외·조선뉴스프레스 刊


20대의 56.6%가 6·25가 언제 일어났는지 모르고 초등학생의 35%가 6·25를 북침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이들에게 35명의 명사가 전하는 60년 전 6·25의 진실을 모은 책이 나왔다.

처절했던 피란길에서, 악몽 같던 적 치하에서, 죽음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설한 분들이 아픈 상처를 헤집으면서 남긴 피눈물 나는 증언을 모았다. 일반인들이 이름을 들어 누구나 알 만한 분들의 얘기이지만 당시 전쟁을 겪은 모든 사람의 얘기이기도 하다. 전쟁의 참혹함과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소중함을 느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6·25 종군기자 1기인 이혜복 대한언론인회 고문 인터뷰, 오효진 전 서울방송 보도국장의 실화소설 ‘김팔봉과 인민재판’을 실었다. 또한 송종환 전 안기부 해외정보실장, 이지수 명지대 북한학과 교수, 이춘근 이화여대 겸임교수가 각각 소련에서 나온 6·25 관련 비밀문서들에 관해 분석한 글을 함께 소개했다. 명사들의 체험담 중 관심을 끄는 내용을 몇 가지 소개한다. /편집국


피란길에서

◈ 날이 되니 벌써 붉은 완장을 두른 놈들이 교정의 여기저기에 나타나 괴성을 지르고 다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이 확실했다.
박상래 교수가 나를 찾아와, “김 군, 아무래도 2~3일 한강을 건너가 있다가 학교로 돌아오는 것이 상책일 것 같아” 하면서 학교 회계로부터 타 온 돈뭉치 4개를 내게 건네 줬다.

“어서 떠나!”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 염치없게도 한 공깃밥을 나눠 먹고 누룽지를 끓인 ‘눌은밥’을 축내야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자 경기도 양주에 사는 먼 친척집을 찾아갔다. 모내기 일을 거들어 주고 감자 한 자루를 얻어다 삶은 감자로 끼니를 이었다. 얻어온 감자를 형편이 딱한 하숙집 주인에게 나눠주기까지 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
 

赤治下 60일-서울에서 벌어진 일들

◈ 다음 날 숙모님의 옷 보따리를 챙겨서 나오려는데 아랫동네 사람들 5~6명이 몰려왔다.

“아주머니 동무! 이제 나누어 먹는 세상이 되었어요?” 그리고 집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어떤 사람은 의자나 집기를 들고 나오고, 어떤 사람은 부엌에서 먹을 것을 챙기고 나오고 야단이 났다. …나는 그제야 “이런 것이 인민공화국 세상이구나”를 실감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

◈ 더욱 기절할 노릇은 젊은 남자들을 몽땅 벌거벗겨 두 손을 머리에 얹게 한 채 맨발로 걷게 하면서 뒤에서 총을 겨누며 행진하는 것이었다. 저 벌거벗겨진 이는 도대체 누구며 저 총을 겨눈 이는 또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일순간 다가온 혼란에 나는 넋을 잃고 나도 모르게 행진의 흐름을 따라 서울대병원 쪽으로 흘러가다가 바로 발아래 피로 범벅이 된 시체가 나둥그러진 것을 보게 되었다. <정희경 전 이화여고 교장>


우리는 이 나라를 이렇게 지켰다


◈ 입대 후 1주일쯤 지나, 비상이 걸려 전원 집합했는데 대위 한 사람이 나와 “포항 인근의 안강·기계 쪽의 전황이 급해 결사대 50명이 필요하다”며 “지원자는 나오라”고 했다.

서로 뒤질세라 결사적으로 뛰어가서 줄을 섰는데 나는 인원이 차서 끼지 못했다. 동작이 빠른 중학생들이 주로 뛰어나갔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

◈ 모자에 빨간 완장, 카빈총을 거꾸로 멘 자가 “너희 놈들은 동회 자금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며 인민의 고혈(膏血)을 빨아먹고…”라더니, “즉결처분하려는데 찬성하는 사람은 박수를 치라”고 을러댔다. … 그가 목덜미에 총구(銃口)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는 메마른 총성이 나고, 두 사람은 볏단처럼 옆으로 푹 고꾸라졌다. <김운용 전 IOC부위원장>


내 인생을 바꾼 6·25


◈ 인민군은 70여 명을 데리고 밤에만 이동했다. …자리에 누워 있다가 일어난 나는 김형록 교수에게 “나는 조금 있다가 변소에 가는 척하고 도망칠 것이니 생각이 있으면 따라오라”고 하고선 어둠을 타 무리를 뛰쳐나왔다. 뒤를 보니 김 교수도 어느새 따라오고 있었다. …무작정 걸어 산속을 헤맸다. <권이혁 전 문교부 장관>

◈ 칼 파워스는 통역을 통해서 어머니에게 진지하게 자신이 나를 데려가고 싶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때 이 어린이들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전쟁에서 구해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빌리를 보는 순간 내가 도와주어야 할 아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미국에 데려가서 공부시키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김장환 목사·극동방송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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