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과 해방의 차이
광복과 해방의 차이
  • 미래한국
  • 승인 2010.08.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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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양동안 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
▲ 양동안 명예교수


우리나라 국민과 정부는 해마다 나라의 최대 기념일인 광복절을 맞이해 각종 기념행사를 하면서도 ‘광복’의 의미도 잘 모르고, 광복절의 횟수도 정확히 셈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의 압도적 다수는 광복을 해방과 같은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광복과 해방은 분명히 다르다. 우선 국어사전에 기술된 단어의 뜻만 보더라도 두 단어의 의미는 분명히 다르다. 국어사전은 광복을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음’으로, 해방을 ‘구속이나 억압, 부담 따위에서 벗어나게 함’으로 각각 풀이하고 있다. 또 한영사전은 광복과 해방의 영어 번역어를 다르게 소개하고 있다. 광복은 인디펜던스로, 해방은 리버레이션으로 번역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는 것’과 ‘구속이나 억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간에는 더욱 현격한 차이가 있다.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는 것’은 어떤 민족이 외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주권 국가로 독립하는 것을 뜻한다. ‘구속이나 억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어떤 민족이 외국의 지배로부터 단지 벗어나는 구속의 제거만을 뜻한다. 다시 말해 해방은 민족이 외세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것만을 뜻하고, 주권국가 형성까지를 뜻하지는 않는 데 반해, 광복 및 독립은 민족이 해방된 데 더해 주권국가 형성까지를 의미한다.

우리 민족의 국가인 대한제국은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됨으로써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나라를 상실한 우리 민족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해왔으나 힘이 너무 모자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과 소련 등 연합국이 일본을 패망시키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주었다. 그 때 우리 민족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만 됐지 주권 국가로 독립하지는 못했다. 우리 민족은 1945년 해방된 후 3년 동안 주권국가를 만들지 못한 채 미국과 소련의 점령통치를 받았다. 우리 민족은 1948년 8월 15일에 이르러서야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을 건국해 독립하게 됐다.


1949년‘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바꿔

광복절은 1949년 9월 21일 국회가 제정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국경일이 됐다. 당초 행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국경일에 관한 법률 초안은 3·1운동을 기념하는 3·1절, 대한민국 최초 헌법의 공포를 기념하는 헌법공포기념일, 대한민국의 독립(건국)을 기념하는 독립기념일, 단군왕검이 우리 민족의 국가를 만든 것을 기념하는 개천절 등 4개의 국경일을 제정할 것을 제안했다. 국회 본회의에서 이 법안을 심의하던 국회의원들은 초안의 취지에 동의하면서, 초안에 기술된 국경일의 명칭 가운데 ‘헌법공포기념일’을 ‘제헌절’로,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바꾸었다.

국회의원들이 ‘독립기념일’의 명칭을 ‘광복절’로 바꾼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제껏 알려진 것이 없다. 필자가 유추컨대, 3가지 요인이 작용했을 것 같다.

첫째 요인은 일제하나 해방공간에서 민족주의세력이 ‘독립’에 해당하는 말로 ‘광복’이란 말을 많이 사용했던 관행이다. 일제하나 해방 공간에서 공산주의세력은 ‘해방’이란 용어를 많이 썼다. 공산주의자들은 ‘민족해방’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 비공산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민족해방이란 피압박민족이 정치적인 독립을 거쳐 사회주의국가로 되는 것까지를 말한다. 정치적 독립만으로는 민족해방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견해이다. 민족주의세력은 우리 민족의 국가가 사회주의국가로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애용하는 ‘해방’이라는 용어 대신에 ‘광복’이란 용어를 애용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던 시기의 대한민국 국회는 민족주의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광복’을 애용하던 관행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요인은 1948년의 독립은 우리 민족이 역사상 최초로 쟁취한 독립이 아니라, 역사상 오랜 세월에 걸쳐 독립국가를 유지해온 우리 민족이 잠시 상실했던 독립을 되찾은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국회의원들의 욕구이다. 당시 국회의원들은 ‘독립’이라는 용어는 우리 민족이 과거에 오랜 세월 동안 독립국가로 존재해왔었음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잃었던 빛을 되찾는 것’, 즉 상실했던 독립을 되찾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광복’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 회복 의미로 ‘광복’ 용어 선택

셋째는 국가의 명절을 뜻하는 국경일 명칭의 끝 글자를 ‘―절’로 통일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국회의원들의 판단이다. 이러한 판단이 ‘독립기념일’의 ‘기념일’을 ‘절’로 바꾸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 본, ‘광복’이라는 용어의 뜻으로 보나, ‘광복절’이라는 국경일을 제정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의 취지로 보나, 우리나라의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이 외세의 힘에 의해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니라, 1948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이 국가적 주권을 되찾아 ‘독립을 성취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광복절의 횟수는 1948년 8월 15일로부터 기산(起算)돼야 한다.

광복절을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착각하는 계산착오 자체가 수치스럽지만 그에 더해 우리 민족을 제외하면 세계 어느 국가도 자기 민족이 외세의 힘에 의해 외국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기념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치스러움은 배로 커진다. 다른 국가들이 자기 힘이 아닌 외세의 힘으로 해방된 것을 국경일로 기념하지 않는 것은 외세에 의한 해방이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국경일로 기념할 자랑스러운 일은 못 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개최한 최초의 광복절 기념식은 6·25전란 중인 1950년 8월 15일 당시의 임시수도 대구에 있는 경북도청에서 극히 초라하게 거행됐다. 이날의 광복절 기념식은 제2회 광복절 기념식이었다. 제1회 광복절 기념식은 1949년 8월 15일에 거행됐어야 하는데,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1949년 9월에 제정됐기 때문에 거행되지 못했다. 1950년 8월 15일 대구에서 거행된 광복절 기념식이 제2회 광복절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의 광복절 기념사에 명기돼 있다. 이 대통령의 기념사 제목은 ‘기념사(제2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되어 있고, 기념사의 첫머리는 “금년 8·15경축일은 민국독립 제2회 기념일로서”라고 시작하고 있다.

1951년의 광복절 기념식은 당시의 임시수도 부산에 있는 경남도청에서 개최됐다. 이때부터 광복절에 대한 국민의 이해에 혼란이 시작된다. 대통령 이승만은 이날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에 반해 신문들은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보도해 광복절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무시하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착각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한 전란중이라 신문들은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거나, 대한민국 건국의 가치를 무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대한민국 정부도 광복절의 횟수를 1945년부터 기산하고, 대통령들의 광복절 기념사에서는 대한민국 건국에 관한 언급은 사라지고 일제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언급만 남게 됐다. #

/블로그 정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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