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위해 북한으로 되돌아간 남편, 이제는 원망보다 이해
선교 위해 북한으로 되돌아간 남편, 이제는 원망보다 이해
  • 미래한국
  • 승인 2010.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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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이야기] 김진숙(가명·40·2002년 12월 입국)



사람들은 남편이 바보짓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남편은 왜 죽는 길을 택했을까? 나는 그로부터 직접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이젠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남편의 집안은 좀 특이한 면이 있었다. 시아버지는 국군포로 출신이다. 술 한잔 걸치면 옛날 노래를 부르며 충청도의 고향집과 부모형제를 그리며 눈물을 짓던 분이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당에 열심히 충성해서 좋지 않은 배경에도 불구하고 작게나마 기반을 닦았다.


국군포로 출신 시아버지와 교인이었던 시어머니

시어머니는 더욱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시어머니는 재혼을 했다. 전 남편은 목사였는데 신앙을 지키다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때 그들 사이엔 이미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고 어머니는 남편이 끌려간 이후에 세뇌 교육이다, 비판이다 하며 여기저기 끌려 다니다 정식으로 이혼하고 지금의 시아버지와 결혼했다.

어머니는 강한 여성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자식들에게까지 숨기면서 신앙을 지키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앙이 은연 중에 자식들에게로 전해졌다.

교사였던 남편은 효자였고 성실했다. 언젠가는 늙으신 아버지를 위해 남쪽에 있는 친척들을 찾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1996년에 결혼을 했는데 점점 살기가 어려워졌다. 1997~1998년 남편의 월급이 100원 정도였는데 쌀값은 kg당 30원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업고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시장에서 그날 본 사람이 그 다음 날 안보여 안부를 물어보면 굶어 죽었다는 말을 듣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사라졌다. 나는 남편이 중국으로 간 것을 짐작으로 알고 있었다. 보위부와 당원들 그리고 학교 교장 등이 와서 남편이 어디 갔는지 추궁했지만 남편이 중국으로 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나와 시댁 어른들이 수모를 당하기 때문에 나는 모른다고 잡아떼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편이 그리워졌고 죽어도 남편 곁에서 죽겠다는 생각으로 1997년 중국으로 탈출했다. 당시엔 경비대에게 돈만 주면 국경을 건널 수 있었다. 중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몇 달 사이에 신앙이 깊은 기독교인이 돼 있었다. 북한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와 거리가 매우 멀다. 그럼에도 남편이 그렇게 빨리 기독교인이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나는 남편이 기독교인이 된 것에 대해 놀랐지만 중국 교회에서 우리 가족을 도와주었고 또한 남편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뜻에 따라 함께 예배를 드렸다.

남편의 소원대로 남한의 친지들과의 연락에 성공했고 그분들이 중국으로 우리를 방문하기도 했다. 남편은 항상 “하나님이 나와 내 가족을 구원해 주셨는데 나는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성경 배달 위해 북한으로 들어가 
 
어느 날 남편이 조용히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북한의 형제들에게 성경책을 가져다주고 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도 할 일이 많다. 어쩌면 하나님은 당신이 북한에 가는 것보다 여기 남아 봉사하시기를 바라실 것이다”고 하면서 남편의 북한행을 막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남편은 웃으며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1,000대까지 은혜를 베푸시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떠나기 전날 밤 남편은 만약 잡혀도 자신은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듯 말했다. 그러면 자신을 체포한 사람들이 자신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남편은 펄쩍 뛰는 나에게 “2주 후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 그는 평안한 얼굴로 또 다른 탈북민 기독교인과 함께 북한으로 떠났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남편의 모습이었다. 1999년 1월의 어느 매우 추운 날이었다.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함께 떠났던 길동무는 돌아왔지만 남편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그는 다만 “나올 때 함께 나오지 않았다”라는 대답만 계속할 뿐이었는데 나중에 우리는 그가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고 원조를 위해 교회에 접근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러 경로를 통해 남편은 북한으로 들어가던 중에 잡혔고 함흥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시댁 분들도 화가 미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교회에서도 많은 돈을 써서 남편을 구출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한국 입국, 초등학교 아이 축복에 감사

그후 남편이 좋아하던 음식만 보아도 울었고 남편이 당할 고통을 생각하며 그 고통을 나에게 달라고 기도하며 울었다. 남편을 책임감이 없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원망도 했다. 하나님께 남편을 구해달라고 기도했다. 당신을 위해 들어간 사람이니 당신이 구해달라고 원망하기도 했다.

목숨을 끊으려고도 했다. 목을 매어 죽을 생각으로 동네 야산에 올라가 앉아 있는데 “아이를 생각해라. 네 목숨은 네 것이 아니다”라는 음성이 머리를 때렸다. 그 소리를 듣고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산을 내려왔다. 집에 도착하니 딸아이가 안으로 잠긴 방의 유리문에 얼굴을 비벼대며 악을 쓰고 울며 나를 찾고 있었다.

2년 반 후 나는 한국으로 왔다. 지금까지도 남편의 소식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얻은 게 있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기도를 계속하다가 어느덧 하나님과 진실로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내 옆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본다. 이 아이는 정말로 축복받았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의 이 아이 역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고통의 세월보다 자유와 풍요의 날을 바라보며 살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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