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 폴 포트 죽음의 진실
‘킬링필드’ 폴 포트 죽음의 진실
  • 미래한국
  • 승인 2010.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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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예춘추 10월호] 캄보디아를 킬링 필드로 바꾼 독재자의 최후 … 폴 포트파 2인자 처의 독점수기를 읽고
▲ 일본 문예춘추 10월호

후나고시 미가(舟越美?) 교도통신 기자

폴 포트 정권 당시 관리인 칸 케 이우 전 정치범수용소 소장에게 금고 35년 형이 내려졌다. 금년 7월 26일 폴 포트 정권의 전 간부를 재판하는 특별법정이 첫 판결을 한 것이다. 유엔이 캄보디아 국내 법정을 지원하는 형태로 2004년에 양자 합의로 특별법정이 설치된 지 6년, ‘충분하지 못하다’ ‘일정한 평가는 할 만하다’ 는 등 판결에 대한 현지의 반응은 여러 가지이다.

칸 케 이우소장은 말단 간부이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폴 포트파 2인자인 누온 체아 전 인민대표의회 의장, 이엔 사리 전 부총리 겸 외무장관, 키우 삼판 전 국가간부회의 의장, 이엔 사리의 처 이엔 티릿 전 사회문제 장관 등 4명에 대한 대량학살죄나 인도적 범죄 등이 관심이 컸다.

최초로 체포된 누온 체아 전 의장의 구치 기한은 2007년 9월 19일. 그는 같은 달 상순에라도 기소될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세 사람도 11월 말까지는 기소될 것으로 보인다.

캄보디아 땅에 킬링필드를 만든 책임에 대해 ‘과거의 잘못’을 여러 가지로 변명하는 전 간부도 있지만 “우리가 한 일은 옳았다”고 계속 주장하는 사람이 84세의 누온 체아다. 그의 처 킴 세인은 73세. 전 폴 포트파의 자치구였던 서부 바이린에서 아들과 딸, 손자와 뜰에 팜야자가 무성한 간소한 집에서 살고 있는 그녀가 남편과 인생을 회고했다.


기쁠 때가 곧 공포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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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지원한 론놀 정권을 쓰러뜨렸다. 기쁨 속에서 남편의 신변을 걱정했다. 무엇인가 변할 때는 언제나 위험하다. 기쁠 때가 공포의 때이기도 하다. 동지들 중에도 남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아이들 손을 잡고 이집 저집 전전해 몸을 숨기며 살았다.>

폴 포트파는 프놈펜 입성 후 도시 주민의 농촌 강제 이주를 실시했다. 저항하면 죽였다. 의사나 간호사에게도 이주를 강제했고 병자도 걷기를 강요당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방치돼 죽었다.

“프놈펜 주민들을 미군 폭격으로부터 피난시키면서 농민을 주체로 한 새 사회 만들기를 목표로 했다” 집권 후 30년째 되는 2005년 누온 체아는 몇 차례에 걸친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강제 이주 추진 이유를 늘 그렇게 강조했다.

한편 이엔 사리 전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실은 주은래 중국 총리로부터 강제 이주에 대해서는 ‘신중히 해라. 우리는 쓰디쓴 과거가 있다’ ‘지식인은 국가 건설에 필요하다. 소중히 여겨라’는 경고를 받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당시 이미 도시 청년층을 사상 개조한다고 해 농촌에 이주시키는 이른바 하방정책의 모순이 드러났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폴 포트파는 주은래의 경고를 무시했다. 이엔 사리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이 지원하는 론놀 정권을 격파함으로써 다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우리가 성공했다는 것에 우쭐했다. 중국에서 잘 안 됐던 일이라도 우리는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주은래 총리의 경고를 무시했다. 최고 간부들이 자신 과잉이 판단을 잘못하게 했다.”

그 최고 간부들 속에는 의당 이엔 사리 자신도 포함됐을 터인데 그는 결코 1인칭으로 말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과 떨어져 시내의 파사크천(川)가에 세워진 공무원 관사였던 건물에서 살기 시작했다. 아이를 부모로부터 떼어내 교육한다는 것이 폴 포트파의 방침이었던 때문이다. 12세 아들은 전화교환수 일을 할당받아 직장에서 기거하기로 됐다. 두 딸은 간부 아이들로 모인 특별한 학교에서 중국어나 베트남어, 영어를 배웠다. 그 학교에는 6세에서 14세까지 50명 정도의 어린이들이 있었는데 내 아이를 만날 수 없었다. 그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최고 간부집단은 농민 주체의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 하고 있고 이를 위해 지금까지의 사회의 가치관에 젖어 있는 부모로부터 아이들을 떼어내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도 그럴 필요가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나는 손 센 국방장관 부인 등과 함께 건물 1층에 살고 남편, 폴 포트, 이엔 사리, 키우 삼판이 3층에 살고 있었다. 근무 장소이기도 하고 숙박 장소이기도 했다. 폴 포트는 암살을 피하기 위해 잠자는 곳을 때때로 바꾸고는 했다.

내가 맡은 일은 이들에게 하루 세 번의 식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밤 이외에 반찬은 두 종류 뿐이고 간부 식사도 결코 사치하지 않도록 정해져 있었다. 남편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식사를 나를 때 뿐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최고 간부 집단 식사 뿐 아니라 외국에서 손님이 와 요리사가 요리할 때 입회하는 일도 했다. 요리사가 독을 넣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이들을 노린 독살 미수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다.>


킬링필드의 책임

그러나 폴 포트파의 경제정책은 실패하고 국민은 기아에 시달렸다. 내부에서 최고간부집단을 비판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누온 체아는 “많은 적이 있어 숙청이 필요했다”고 당시를 되돌아봤다. 중요한 결정은 중앙위원회에서 내리도록 돼 있었으나 폴 포트와 누온 체아 둘에 의해 결정되는 중요 사항도 많았다. 이엔 사리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폴 포트는 스탈린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고 말했다.

<S21(고문이 있었던 툴 스렌스 정치범 수용소)와 같은 장소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당시 나는 프놈펜에서 나갈 기회가 없었고 지방의 상황을 본 적도 없었다. 남편이 많은 사람을 학살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들의 공산주의는 불교에 뿌리박고 규율과 도덕을 중히 여기고 있었다. 사람들을 죽인 것은 지방의 하사관들이고 최고 간부 집단이 아니다. 나는 결혼 후 줄곧 남편과 함께 지냈는데 남편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남편이 명령 내린 것은 도시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나 마음가짐을 농민 같이 바꾸는 것이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었다.>

치안 담당자였다고 일컬어지는 누온 체아는 35년의 금고형 판결을 받은 칸 케 이우 전 정치범수용소 소장의 상사였다. 칸 케 이우는 특별 법정에서 누온 체아가 관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누온 체아가 ‘순수한 농민 주체의 독립국 건설’을 실현하기 위해 ‘불순분자’나 ‘적’의 처형을 명령한 것은 틀림없다. 실제 누온 체아는 “어린이를 교육하는 것은 간단했지만 어른 교육은 어려웠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또 숙청이 격화됨에 따라 지방의 지도자들은 ‘적’이나 ‘스파이’로 의심 받는 것을 두려워해 최고 간부 집단의 지시를 확대 해석해 “의심스러운 사람은 모조리 죽이는 것이 가장 안전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게 됐다”(폴 포트 정권 외무부 대변인이었던 스온 시이쿤의 말)

유엔은 1980년 10월 폴 포트파의 민주 캄푸치아의 대표권을 승인했다. 폴 포트파는 베트남에서 지원한 헹 삼린 정권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폈다. 1982년에는 폴 포트파, 시아누크파, 손센파의 민주 캄푸치아 3파 연립정부가 수립되고 헹 삼린 정권과의 본격적 내전으로 확대됐다. 폴 포트파를 지원한 것은 반베트남의 중국, 태국 등이다. 미국이나 일본도 간접적으로 폴 포트파를 지원했었다.

1991년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고 캄보디아 정치세력의 무장 해제와 선거 실시가 결정됐다. 그런데 폴 포트는 선거를 보이콧했다.


시기심과 숙청의 광풍

<전투가 격해지면서 우리들 사이에도 내분이 심화됐다. 폴 포트는 점차 남편보다 전투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다 모쿠 참모총장을 의지하게 됐다. 1990년대 전반이었든가 다 모쿠가 간부들을 회의에 소집했다. 나와 남편은 늘 하는 작전회의라 생각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갔더니 다 모쿠는 “트럭에 타라”고 명령했다.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트럭은 달리기 시작했다. 옷도 입고 간 그대로였다. 도착한 곳은 다 모쿠가 지배하는 북부의 거리 안론펜이었다.

다 모쿠는 이미 태국 국경 쪽의 산에 간부들의 집을 지었다. 다 모쿠는 이 일에 관해 우리의 동의를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실시한 것이다. 다 모쿠는 산 정상부에 폴 포트와 키우 삼판 등을 입주하게 하고 그보다 낮은 곳에 손 센의 집과 이웃해 남편 누온 체아와 나를 거주하게 했다.>

폴 포트파의 내분은 더욱 심해졌다. 중국 원조를 착복한 배반자로 규탄 받은 이엔 사리는 1996년 숙청을 겁내서인지 4,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투항했다. 폴 포트파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1997년 6월 10일 밤으로 기억된다. 우리 집 이웃에 사는 손 센 일가가 참살당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손 센은 휴대전화로 캄보디아 정부의 훈센 제2총리와 은밀히 정치 교섭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폴 포트에게 알려져 배반행위로 간주됐다. 폴 포트의 지시를 받고 쳐들어간 병사들이 손 센과 가족 모두를 사살한 것이다.

큰 소동이었다. 이윽고 차가 와서 우리 일가는 차에 태워져 산 정상에 있는 폴 포트의 집 근처에 왔을 때 폴 포트가 차에 다가왔다.


베트남과 전투 격해지며 내분 심화

“이 사람들 어디로 데리고 갑니까?”라고 운전수가 물었다. 폴 포트가 뭐라고 말할지 두려움에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폴 포트는 차 속의 우리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내 집 근처 주거지다”라고만 말하는 것이었다.

참극이 일어나기 전 폴 포트는 남편에게 “손 센과 다 모쿠를 데리고 와 얘기 나눌 장소를 마련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결국 그것이 실현되지 않아 폴 포트는 남편에게 노여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다 모쿠와 손 센이 휘둘렀던 힘은 남편으로서는 통제불능이었는데 이 사건 전후 폴 포트는 남편도 신뢰하지 않게 됐다. “폴 포트는 옛날부터의 동지를 신뢰하지 않고 젊은 사람들만 믿게 됐다. 우리는 50년이나 함께 해왔는데…” 남편은 유감이라는 듯 말했다.
한편 폴 포트는 ‘낡은 세대를 과신했던 것이 내분의 원인이다’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괴롭고 무서운 나날이었다. 나의 요리 솜씨를 칭찬해주고 예의 바르고 부드러웠던 사람들, 그때 모두가 꿈꿨던 이상이 한번은 실현될 듯했는데 서로를 의심하게 됐다. 베트남이 파놓은 함정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다 모쿠는 폴 포트가 오른팔이었던 손 센을 살해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1997년 7월 25일 돌연 손 센 일가 살해죄로 폴 포트를 구속해 인민재판에 회부해 종신형을 선고했다.

<폴 포트는 심장병과 고혈압을 안고 있는데다 암에 걸렸다. 나는 집에 있어서 인민재판을 보지 못했고 남편으로부터 그것을 전해 들었지만 전적으로 불공정한 재판이었다고 생각한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폴 포트는 산 중턱에 있는 집에 연금됐다. 조잡한 헛간이었다. 그의 젊은 처 메아스와 경호원 그리고 키우 삼판의 처가 시중 들고 있었다.>

1998년 4월 상순 클린턴 미국 정부가 폴 포트를 인도적 범죄를 이유로 체포해 재판을 받게 할 방침을 밝혔다.

<적의 공격이 심해지는 가운데 간부 중에는 폴 포트를 미국에 인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 때문에 폴 포트와 키우 삼판은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태국으로 가 거기에서 중국으로 도망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을 알게 된 미국이 태국에 경고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국경 부근에서 태국 경찰이 신병을 구속당하고 경호를 받으며 안론펜으로 돌아왔다. 폴 포트는 퍽 쇠약해 있었지만 스스로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가 4월 15일이었다.>

두 사람이 돌아온 후 다 모쿠는 회의를 열고 폴 포트 처리에 대해 논의했다. ‘미국에 인도해야 한다’ ‘지도자는 자살해야 한다’ 두 의견으로 나뉘었다.

<그날 밤이었다. “살려 줘”라며 폴 포트의 처 메아스의 소리가 우리 집까지 들렸다. 키우 삼판의 처가 달려갔을 때 폴 포트는 입에서 거품을 내며 이미 사망해 있었다고 한다.

폴 포트는 가지고 있던 약을 단숨에 삼키고 자살한 모양이다. 그를 그 지경까지 몰고 간 것은 다 모쿠이다.

나를 포함한 여자들은 소리를 내 울었다. 남편은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표정으로 봐 큰 슬픔에 잠긴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50년이나 함께 일해온 동지였기 때문이다.>

다 모쿠는 “지금은 폴 포트가 거름보다 못한 존재가 됐다”고 말했고 시신은 타이어 등 쓰레기와 함께 불태워졌다. “너무 심했다”라고 비서 데프 큰나루는 증언하고 있다. 그 해 12월 누온 체아와 키우 삼판은 투항했다. 1999년 3월 다 모쿠 참모총장이 구속되고 폴 포트파는 소멸됐다. #

번역·이영훈 객원해설위원·교포교육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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