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마스터플랜 작성한 ‘자이언트’
서울시 마스터플랜 작성한 ‘자이언트’
  • 미래한국
  • 승인 2010.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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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차일석 국민일보 명예회장
▲ 인터뷰중인 차일석 국민일보 명예회장

 

국민일보와 서울신문 사장을 지낸 차일석 국민일보 명예회장을 아직도 서울시 부시장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오늘날의 서울시 도시계획안을 만들면서 많은 사업을 추진한 도시행정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요즘 SBS TV에서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자이언트>를 열심히 보고 있다는 차 회장을 만나 서울시 부시장 시절의 얘기를 들어봤다.


차 회장은 한국전에 참전한 이후 1956년에 미국유학을 떠나 아델파이대와 뉴욕대에서 행정학을 공부했다. 귀국해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도시행정 관련 글을 신문에 자주 기고한 것이 계기가 돼 서울시 부시장에 발탁됐다.

1962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서울에 의류와 가발공장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체가 생겨났다. 그로 인해 1960년에 245만 명이던 인구가 1965년에 347만 명으로 늘어났지만 서울의 외형은 한국전쟁 직후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당시 서울시장은 부산시장 시절 건설사업부문에서 성과를 올린 김현옥 씨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 시장의 추진력과 차일석 부시장의 이론을 합쳐 작품을 만들어 보라고 격려했다. 그는 여러 전문가를 영입해 마스터플랜을 짰는데 핵심은 한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도시계획은 길게는 20년, 짧게 10년을 내다보고 세워야 합니다. 20년 후에는 그때 실정에 맞게 다시 수정해야지요. 당시 마스터플랜은 예술 문화 역사를 다 감안해서 휴머니즘이 살아있는 도시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는 도시계획을 짤 때 건축가 김수근 씨의 의견을 청취했다고 한다.

“<자이언트> 드라마를 보니까 불도저로 도시를 건설하는 일만 조명하던데 그 당시 우리는 건축과 미술, 역사를 다 감안하고 반드시 건축가의 의견을 청취하며 공사를 시행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울시 마스터플랜 브리핑

그해 8월 15일 서울시청 앞에서 전시회를 열어 서울시종합개발계획을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공청회를 했다. 한 달간 공개하면서 기자들의 의견도 수렴했다.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그가 서울시 마스터플랜을 브리핑할 때 강북 200만, 강남 300만 등 서울시 인구를 총 500만으로 가정해 계획을 세운 이유를 밝혔다.

“북한이 언제 도발할지 모르니 위쪽은 그린벨트와 군사보호지역을 지정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나중에 그린벨트를 풀어 인구의 4분의 1이 수도권에 모이게 된 것은 정말 유감입니다.”

강남 도로개발이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아 현재 교통체증이 일어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강남은 안갑니다. 큰 도로를 살리고 중간도로를 바둑판처럼 해놓은 걸 다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맨해튼처럼 길을 넓혀놨는데 뒷골목 길이 좁아지는 바람에 차가 막히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사람이 바뀌면 계획도 다 바뀌는 게 문제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지정해놓은 잠실 땅에 올림픽 주경기장이 들어선 것은 정말 기쁘다고 했다.

“마스터플랜에 올림픽경기장 계획이 들어있는 걸 보고 박정희 대통령이 ‘무슨 올림픽이냐’고 하셨어요. 그래서 ‘각하, 앞으로 우리나라가 부강하면 올림픽을 하게 될 겁니다’라고 말씀드렸죠. 나중에 김수근 씨가 설계한 올림픽 주경기장이 그 땅에 들어섰습니다.”

마스터플랜을 발표하고 난 후 그는 김현옥 시장과 함께 세계 일주에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세계 여러 도시를 둘러보고 서울을 국제적인 도시로 만들라고 당부하셨어요. 김현옥 시장과 한 달간 세계 여러 도시를 다녔지요. 김 시장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우선 길부터 넓히자’는 겁니다. 그래서 ‘시장님 잘 보셨습니다’라고 말했죠. 돌아오자마자 서울시청 앞에 ‘돌격의 해’라는 표어를 붙여놓고 길을 넓혔죠. 그때 강북의 길을 넓히지 않았으면 지금 서울이 어떻게 됐겠습니까.”

당시는 교통경찰이 신호를 해서 교통질서를 잡았는데 그러다보니 행인들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차들이 시원하게 주행할 수 있도록 지하도와 육교를 건설했다. 세종로 지하도는 국군의 날을 하루 앞둔 1966년 9월 30일에 개통했다.

“당시 대림이 1억 원이 넘는 지하도 공사를 단돈 1원에 입찰 받았어요. 서울 중심가의 지하도를 만든 이후 대림이 급성장했지요. 요즘 육교를 철거하고 광화문에 횡단보도를 만들었는데 도시계획은 20년 주기로 상황에 맞게 변화해야 합니다. 그때 당시는 그게 더 맞았지요.”

당시는 뭐든지 돌격정신으로 초스피드 공사를 했다. 1966년 8월 존슨 미국 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했는데 왕십리 한양대에서 워커힐로 가는 길이 2차선 밖에 되지 않았다. 국빈을 맞기에 초라하다고 생각해 2차선을 4차선을 넓히기로 결정했을 때 남은 기간은 단 15일 밖에 안 되었다.

“현대, 동아, 대림 등 큰 건설회사 총수들을 불러 모아 대책회의를 하고 가위바위보로 각자 맡을 공구를 정했어요. 그런데 공사를 하려고 보니 장비가 너무 시원찮아요. 그래서 미 8군 사령관에게 ‘당신네 나라 대통령 오는데 장비 좀 빌려 달라’고 해서 공사를 했지요. 열흘 만에 도로를 만들어 존슨 대통령이 4차선 위를 달렸지요.”

당시 차일석 부시장이 아이디어를 내면 김현옥 시장이 바로 허락을 하고 이어서 건축가가 도면을 그렸다. 김 시장이 그 도면을 들고 청와대에 가면 박 대통령이 웬만한 건설 건은 다 승인해주었다. 그래서 빠른 시간 내에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다.

 
맨하튼 떠올려 여의도 개발, 아파트 들어서 아쉬워

차일석 회장이 가장 보람으로 생각하는 일은 여의도를 개발한 것이다.

“여의도는 뉴욕의 맨해튼을 보고 떠올린 것입니다. 행정부는 중앙청을 중심으로, 사법부는 서초동에, 입법부는 여의도를 개발해 조성하기로 했죠. 동부이촌동에 20만평을 매립해 여의도 조성기금을 마련했습니다.”

여의도에 미군  K 16 비행장이 있었던 터라 미8군 참모장을 만나 비행장을 성남으로 옮기기로 한 뒤 1967년에 기공식을 했다. 여의도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90일 안에 윤중재를 쌓는 게 관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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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홍수 때문에 홍역을 치렀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는 90일 이전에 끝내야 했어요. 한경직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렸어요. 한 목사님께  비가 와도 홍수는 안 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부탁드렸지요. 매년 홍수가 났는데 그해에 비는 왔지만 홍수는 나지 않아 윤중재를 완성했고, 그 덕분에 여의도를 조성할 수 있었습니다.”

여의도를 월스트리트처럼 만들려고 했는데 나중에 아파트가 들어선 것과 여의도광장을 없앤 것이 아쉽다고 했다.

“세계 유명도시 중에 광장이 없는 도시가 어디 있습니까. 여의도광장에서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를 하고 교황 요한바오로 환영행사를 하면서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알려졌어요. 윤중로가 다 공원이고 서울을 둘러싼 산이 많은데 왜 거기에 또 공원을 만듭니까. 국군의 날 같은 큰 행사를 하고 민족이 모일 수 있는 여의도광장이 지금도 꼭 필요하다는 게 내 주장입니다.”

시청 앞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는 전통도 차 회장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부시장이 된 첫해 크리스마스 때 김현옥 시장한테 시청 앞에 트리를 세우자고 했어요. 불교신자였던 김 시장이 그런 거 왜 하느냐고 하기에 ‘크리스마스는 세계적인 절기다. 지금 우리나라를 군사정권이라고 공격을 하는데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면 외국에서 보는 눈이 달라질 거다’고 설득했더니 수긍하더군요. 한경직 목사님 모시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울 때 영락교회 성가대가 와서 성가를 불렀습니다. 그때부터 매년 크리스마스 트리 세우는 전통이 생겼는데 참 보람 있게 생각합니다.”

1967년에 동작동에서 여의도로 들어오는 강변도로를 조성하여 100원씩 통행료를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도 처음 그 도로를 달릴 때 돈을 냈다. 그 4차선 강변도로가 오늘날 경부고속도로를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개통식을 하고 시청에 도착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당 얼마씩 들었느냐고 물어요. 1㎞에 1억 원 가량 들었다고 하니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더군요. 430㎞쯤 될 거라고 했더니 ‘그럼 430억 원이면 되겠네’라고 하셨어요. 이듬해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시작되어 429억 원으로 완공했지요.”

민자를 유치해 복잡하고 더러웠던 지역에 최초의 주상복합단지 세운상가를 조성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서울시 마스터플랜은 1968년 북한 공비 김신조 사태가 났을 때 약간 수정됐다.

▲ 1969년 4월 21일 남산터널 기공식. 박정희 대통령 왼쪽이 차일석 부시장, 오른쪽이 김현옥 서울시장

“수도를 보호하는 방위개념으로 바꾼 거죠. 그때 북악스카이웨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준공식 때 팔각정에서 차를 마시는데 박 대통령이 남산을 바라보면서 ‘터널을 두 개 뚫자. 유사시에 한 터널에 기갑부대, 한쪽은 보병사단을 숨겨두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남산 1,2호 터널이 생긴 겁니다.”

현재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만든 계기도 재미 있다.

“수도방위 계획으로 바꾼 뒤 상징으로 이순신 장군 동상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조각가인 김세중 서울미대 학장에게 제작을 의뢰해서 만든 이순신 장군 동상이 명물이 돼 보람이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을 정말 좋아했어요.”

차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사심이 없고 국가를 위해서는 앞뒤를 안 가리는 분”이라고 평가했다.

김현옥 시장은 불도저 같이 밀고 나가다가 와우아파트가 무너지면서 서울시 개발에서 물러나게 됐다.

“서민아파트를 지어 주거환경을 개선한 것이 효과가 있자 구청장 전결로 아파트 건설 권한을 줬어요. 구청장들이 하청에 재하청을 주면서 부실공사가 돼 사고가 났어요.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고 구청장의 잘못으로 김 시장이 낙마를 했습니다.”

김 시장이 그만 둔 뒤 그도 부시장을 그만두고 연세대로 돌아갔다.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 계속 일을 했더라면 강남 개발과 여의도 개발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이 아쉽죠.”

얼마 후 박 대통령이 그를 불러 금일봉을 주면서 그간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 자리에서 ‘우리나라가 지하자원이 없는데 돈을 벌려면 경주를 개발해야 합니다. 잘 만들어 놓으면 일본에서 수학여행을 많이 올 겁니다’라고 건의했습니다. 나의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경주관광개발 실무단이 발족했어요. 그때 개발단의 핵심 멤버로 들어가 경주 보문단지를 조성했는데 그게 우리나라 첫 관광산업단지입니다. 그 후에 제주도 중문단지, 부산조선 비치호텔로 이어지는 관광산업단지 조성 붐이 일었죠. 보람을 느낍니다.”

경주 관광단지 개발을 마친 후 그는 조선호텔 사장을 맡게 됐다.

“영어를 잘한 게 한몫했겠죠. 한미합작 호텔이어서 월급을 달러로 받았는데 달러 가치가 올라가니 월급이 계속 오르는 효과가 있었어요. 그때 많은 국제인사를 만났는데 한미우호증진에 한 몫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3대 기독교 장로 집안, 조용기 목사와 인연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장로인 차일석 회장의 뒤를 이어 내년에 아들이 장로 장립을 받을 예정이다.

“아버지 4형제가 모두 일본에서 유학을 하셨고 아버지는 우리나라 외과의사 1호입니다. 우리가 5남 3녀인데 4형제가 장로이고 여동생의 남편 3명도 다 장로입니다. 어머니의 기도로 모두 형통하게 잘 지냈습니다.”

차 회장의 5형제는 모두 미국 유학을 마쳤다. 의사였던 형님 우균 씨의 큰 사위가 김황식 국무총리이다. 서울대 명예교수인 셋째 인석 씨는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지냈다. 넷째 호석 씨는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으며 다섯째 우석 씨는 건축가로 63빌딩을 건축했다. 대한민국 예술원 원장을 지낸 차범석 극작가가 그의 사촌형이다.

순복음교회는 차 회장이 서울시 부시장 재직 시절에 서대문에서 여의도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어느 날 어머니가 서대문에 있는 교회에 가보자고 하셔서 순종하는 마음에 따라갔어요. 분위기는 나랑 영 맞지 않았지만 젊은 목사의 설교가 귀에 확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다니게 됐지요. ‘조용기 목사님한테 큰 꿈을 꾸십시오. 서대문에 있다가는 큰 교회 못 이룹니다’ 그렇게 권해서 국회의사당 앞에 교회 부지를 마련했지요.”

차 회장은 조선호텔 사장직을 그만 둔 1979년부터 조용기 목사의 해외성회에 동참하게 됐다.

“샌프란시스코에 갔다가 조 목사님이 성회를 하신다기에 새크라멘토의 작은 호텔로 찾아갔어요. 가보니 목사님이 빨래를 하고 계셨어요.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돌아올 때보니 나는 퍼스트클래스인데 목사님은 이코노미예요. 그래서 ‘목사님 성회초청 오면 초청장을 저한테 주세요’라고 말씀드리고, 그때부터 성회 일정을 내가 다 조정했지요. 그때까지 목사님은 강사료도 안 받고 성회를 다녔어요. 주최 측으로부터 성회 강사료도 제대로 받고 비행기표도 퍼스트클래스로 요구했죠. 교회에 와서 장로들한테 ‘지금 목사님이 어떻게 하고 다니는 줄 아느냐’고 호통을 쳤어요. 그때부터 장로들이 조 목사님 해외성회에 따라가게 된 거예요.”

차 회장은 조선호텔 사장 재직 때 알게 된 미국의 유명 교계인사들을 조용기 목사에게 소개했다.

“조용기 목사님 해외성회 강사료로 하루에 10만 달러를 받은 적도 있어요. 그때 3일 성회하고 30만 달러를 받았죠. 한 번은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이 뉴욕에서 조용기 목사가 영어로 설교하는 걸 듣고 감동했다며 전화를 했어요. 뭐가 필요하냐고 하기에 돈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20만 달러를 보내줬어요. 그런 돈을 모아 일본선교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남미 국가와 인도 등 가난한 지역의 선교자금을 후원했습니다. 순복음실업인 선교회에서 목사님 성회강사료를 다 관리하고 장로들이 목사님 따라다니며 함께 선교했지요.”

타고난 미성(美聲)인 그는 성악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교회에서 솔리스트로도 활동했던 그는 해외성회 때 갑자기 성악가가 나오지 못하면 즉석에서 성가를 부르기도 했다. 분장을 배워 해외성회 때 조용기 목사 분장도 직접 해주었다. 영어, 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한 차 회장은 해외성회 때 그 나라 말로 조용기 목사를 소개하는 등 다양한 활약을 했다.

1931년생인 차일석 회장은 돌이켜보면 참 행복하고 보람된 삶을 살았다고 회고했다. 6·25 전쟁에 참전했을 때 엄청난 고생을 한 것 외에 일생이 순탄했다. 그 비결을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라고 말한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아쉬운 점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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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를 통해 동남아의 힘든 지역을 많이 돌아보면서 선교사가 돼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울시 사랑’을 늘 가슴에 안고 사는 차 회장은 서울처럼 아름다운 도시는 없다고 예찬했다.

“평양에 가보니 산이 없더군요. 도시로서 멋이 없어요. 정도전이 평양을 수도로 정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계 어느 나라를 가 봐도 산과 물이 어우러진 서울 같은 도시는 없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는 극히 드물죠.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게 문제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100% 활용해야 하는데 아직도 활용을 다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서울시에서 일한다면 한강변 정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한강변에 아파트를 짓지 않고 멋진 오페라하우스와 박물관을 만들고 싶어요. 그러면 주차장도 많이 조성할 수 있을 겁니다.”

청계천 복원과 4대강 살리기에 대해서는 이런 의견을 제시했다.

“당시 청계천이 너무 지저분했어요. 자유당 때부터 복개공사를 하고 있었어요. 이왕 복개하는 거 고가도로를 만들어 빨리 달리게 하자고 생각했죠. 그 시절에는 그게 필요했어요. 청계천을 복원한 건 잘한 일이에요. 욕심 같아선 물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겁니다. 4대강 살리기는 해야 합니다. 예전에 순천 장어를 임금님께 바쳤습니다. 순천 다음이 영산강 장어고 그 다음이 임진강 장어였죠. 지금은 어디에도 장어가 없어요. 4대강 살리기는 잘하는 겁니다.”

차일석 회장은 오늘의 서울을 만든 자이언트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현옥 시장, 그리고 건축가 김수근 씨라고 말했다. 도시계획은 20년 마다 변경해야 하니 앞으로도 서울은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그는 “나는 작은 자이언트나 되려나”라며 허허 웃었다. 서울을 사람 중심 도시로 만드는 일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글·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이승재 기자 fotolsj@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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