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치범 딸이 꿈꾼 ‘행복의 나라’
북한 정치범 딸이 꿈꾼 ‘행복의 나라’
  • 미래한국
  • 승인 2010.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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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이야기] 김정희(가명·30·2003년 10월 입국)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해인 1981년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그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는 떠나면서 우리 머리 위에 크나큰 짐 하나를 올려 두고 가셨다. ‘정치범의 자식’ 이라는 낙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북한에서 나의 삶의 목표는 그 무거운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오빠는 공부를 매우 잘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려고 했으나 시험조차 볼 수 없었다. 김정일에게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편지까지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던져준 대답은 ‘정치범의 자식은 구두 수리공이나 하라’는 말이었다.

그 후 오빠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중국으로 갔다. 그리고는 한국행을 감행해 성공했다. 오빠는 한국에 있으면서 암암리에 북한에 있는 우리를 도와주었고 나 역시 조금씩 장사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살았다. 정치범의 자식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그런데 무슨 운명인지 그는 말도 못하게 엄청난 ‘토대’의 집안 사람에다 군관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정치범의 자식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를 정말 사랑했다.

2002년 초여름 한국에 간 오빠로부터 중국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아버지 없이 자라온 나에게 오빠는 둘도 없는 존재였다. 오빠 역시 누구보다 나를 끔찍하게 생각했다. 나는 단숨에 무산을 경유해 국경을 넘었다. 오빠는 나를 한국에 데려 가겠다고 했으나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수 없다는 생각에 돌아왔다. 그런데 그만 돌아오는 길에 민박집 주인의 신고로 붙잡히고 말았다.

월경죄에다 오빠가 한국행을 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던 차라 보위부 조사를 심하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근처 안전부 구류장에 가두어 놓고 매일 보위부 조사를 받았다. 구류장은 ‘예심’기간 동안 들어가는 곳이다. 여기서 교화소로 이관되거나 노동단련대로 간다. 사형선고 받은 사람도 여기 있다가 사형을 당한다. 이곳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곳이다.

북한에는 ‘예심 6개월은 교화 3년 맞잡이다(맞먹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 정도로 구류장 생활은 힘들다. 남한의 장기수 이인모가 올라온 후 북한의 감방을 둘러보았다고 한다. 그는 그때 “내가 이런 생활이면 43년은 고사하고 3년도 못 견디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 이후 약간 나아진 것이 그전에는 꿇어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올방좌(책상다리)로 앉아 있게 하는 것이다. 하루 종일 앉아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이 몇 달 또는 1년 이상 지속된다고 상상해보라. 그것은 악몽이다. 앉아 있는 1초도 길게 느껴진다.

옥란이는 나와 동갑내기 여자였다. 중국에서 생활하다 잡혀 북송됐는데 그 죄로 노동단련대에서 6개월간 ‘꼭박구’(노동) 생활 하다가 나온 애였다. 나온 후 갈 곳이 없어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청진역에 앉아 있었다.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데 한 남자가 중국에 데려다 주겠다고 하면서 밥을 사먹였다. 그 밥 때문에 그녀는 몸을 팔게 됐다. 그것이 발각돼 옥란이는 매춘죄로 교화 6년형을 받았고 안전부 구류장에 8개월 이상 잡혀 있었다.

그녀 어머니가 가끔 면회를 왔는데 중국에서 오는 석탄을 배낭에 훔쳐 팔아 연명을 한다고 했다. 돈이 없고 힘이 없는 사람이 교화소에 간다. 북한돈 300원을 협잡하다가 잡혀 7년형을 받은 여자도 한방에 있었다.

수감자는 앉아 머리를 45도 이상 들 수 없다. 소변이 마려우면 기어서 쇠창살 앞으로 간다. 눈은 바닥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선생님, 오줌 눌 수 있습니까?”하고 질문한다. 허락을 해주면 소변을 볼 수 있고 안 해주면 그냥 있어야 한다. 발이 저린다고 다리를 펴면 안 된다. 1시간에 5분씩 휴식이 있다.

그후 “앉아”하고 명령이 떨어지면 모두 앉는다. 간수가 떠났다고 몰래 다리를 펴곤 하는데 가끔 떠난 척하고 소리 없이 와서 잡아낸다. 감방 뒤편에는 ‘개굴’ 이라고 불리는 조그만 쇠문이 있다. 나갈 때는 그곳을 통해 나가는데 거의 앉아서 뒷걸음질로 나가야 한다. 구류장 내부를 못 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사형수도 있었다. 몇 감방 건너 남자 감방에 있던 어린애(20살 정도)였는데 보위부 조사를 같이 받던 아저씨로부터 그에 대해 들었다. 살인죄였다. 그 애는 살고 싶은 마음에 신고서(탄원서)를 계속 제출했다. 25년형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사는 것이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살고자 하는 지독한 소망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끌려 나갔는데 기대하던 대로 감형을 받은 것이 아니고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총알이 아까워 줄로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한다. 목 졸림을 당하기 전에 사형수들에게 반항하지 못하도록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그도 오랫동안 통 옥수수 몇 알씩만 먹고 있었다. 죽이고 나면 시체는 자신이 덮고 있던 담요에 싸여 트럭으로 던져진다.

인간성이라는 것이 없어지는 곳이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자기 먹을 것만 챙기게 되는 곳이 구류장이다. 옆에서 자살하려고 숟가락을 삼켰다. 시커먼 토굴 같은 감옥 속에서 꺼억꺼억 돼지 목 따는 소리로 데굴데굴 굴러도 자기 밥만 먹었다. 오줌 누려고 일어나다 빈혈로 팡팡 쓰러지기도 한다. 미쳐 갑자기 ‘뱀이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다.

먹는 것만큼 절실한 것이 바깥 세상을 보는 것이다. 주택이 가까운지라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여름에 바깥에 나와 거니는 사람들의 대화, 웃음소리, 새들의 소리가 들리면 자신의 처량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느 날 밤 교육원(간수)이 나를 지적하며 노래를 시켰다. 언제부터인지 남한의 반체제인사가 불렀다며 북한에 도입된 노래가 생각났다.


장막을 열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더 보자
창문을 열어라 부는 산들바람아
한번 더 느껴보자
푸른 잔솔밭으로 나를 걷게 해주오
온갖 새들의 노래 듣고 싶소
나도 울고 웃고 싶소 태양만 비친다면
나도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내 노래를 들으며 모두 울었다. 엉엉 울었다. 어쩌면 간수도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간수는 그 노래를 다시 부르지 말라고 했다.
노동단련대 6개월형을 받았지만 허리병이 있다고 서류를 작성해 20일만에 나올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오빠가 보내준 돈이 영향을 미쳤다.

나오면서 다시는 탈북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북한이라는 곳 자체가 감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오빠라는 ‘창문’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봤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정치범의 자식으로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억울했다.

내가 부른 노래의 ‘행복의 나라’는 오빠가 있는 한국이다. 다른 어느 곳도 아니다. 원하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곳, 일하고 싶으면 여자라도 손가락질 받지 않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행복의 나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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