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가 밀리언셀러가 된 이유
‘정의란 무엇인가’가 밀리언셀러가 된 이유
  • 미래한국
  • 승인 2011.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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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래 교수의 세설직론]진보라는 미명의 전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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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적 가치를 수호하는 정론지 <미래한국>은 신년에 새 칼럼을 신설하여 연재합니다. 본지 편집위원 김정래 교수(부산교대)가 집필하는 ‘세설직론(世說直論)’은 세간에 그릇되게 형성된 여론이나 가치관을 되새겨 바로 잡아보고, 근거 없는 포퓰리즘의 실체를 포함하여 부당한 추론이나 치환(置換), 여론의 호도를 알기 쉽게 파헤쳐 비판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애정 어린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요즈음 마이클 샌들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밀리언 셀러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이 책을 비판 대상으로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왜 이토록 어렵고 딱딱한 철학 책이 예상 밖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한 번쯤은 짚어 보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집권 중반기에 ‘공정’이라는 화두로 지지율이 한 번에 솟아오른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실용론’과 이어 나온 ‘공정사회론’이 기폭제가 된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미래한국>은 이미 중도실용론의 허구와 위험성에 관해 1970년 히스(Heath)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의 실패를 들어 소개한 바 있으므로(378호, 34~35p) 다시 상론은 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에 ‘공정’과 ‘정의’를 동의어로 보고 ‘정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정의’, ‘공정’에 대한 관심 증폭에 대한 심인(淹因)은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와 시장경제, 보수의 가치를 부정하는 이른바 ‘진보’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 때문입니다. 진보에 대한 막연한 향수는 대한민국 정통성마저 부정하는 종북(從北)세력이나 좌파인사만이 아니라 자칭 중도라고 생각하는 건전한 일반인들에게도 펴져 있는 심리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진보’라는 말 속에는 이미 ‘좋은 것’, ‘선한 것’을 지향한다는 의미를 전제하고 있어 ‘정의’나 ‘공정’이라는 가치는 진보의 맥락에서 누구나 쉽게 수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정’이라든가 ‘정의’에 앞서서 우리가 초점을 맞춰 살펴보아야 할 문제는 ‘진보’의 의미입니다.

진보(progress)는 무엇인가 나아지는 상태나 그것을 지향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즉 개선(improvement)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보다 좋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진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개인이나 사회를 나아지게 하지 못하는 수구 세력인 친북(親北), 종북(從北)이나 한물간 좌파세력이 ‘진보’라는 항진(?眞) 수식어를 달고 버젓이 행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보’의 실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따져보지 않은 채, 대다수 언론마저 당연히 취급하는 보수-진보의 이분법으로 재단하게 되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는 일차적으로 언어 게임에서부터 패배하는 셈입니다. ‘진보’의 의미가 무엇인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진보의 역사는 계몽사상에서 시작

‘진보’의 의미가 ‘개선되는 것’을 가리키는 한,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은 늘 상대를 개선돼야 할 대상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맥락에서 보면 ‘타도 대상’, ‘투쟁’이라는 말이 좌파세력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정 타도할 구악(舊?)이나 폐습이 없더라도 늘 가상의 적을 상정하고 생떼를 쓰는 행태도 이 점에서 명백해집니다.

그러나 진보가 원래 이렇게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형태로 배태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진보의 형성을 3R, 즉 르네상스(Renaissance), 종교개혁(Reformation), 그리고 낭만주의(Romanticism) 맥락에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진보의 역사적 원형은 르네상스입니다. 르네상스는 ‘부활’, ‘복귀’, ‘재생’ 등의 의미를 지닌 말로서 중세가 마감되며 고대 희랍과 로마의 인간중심적 문명으로 복귀를 의미하므로 일견 진보와는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중세의 신(神) 중심 사고를 ‘타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엄연히 진보사상입니다. 물론 르네상스가 기독교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사상, 문학, 예술 등의 제 분야에서 사고의 중심에 인간이 자리 잡았다는 점은 인류사에서 근대성이라는 거대한 진보를 가져다 준 커다란 사건입니다.

르네상스가 교회를 부정하지 않은 데 반해 종교개혁은 교회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 커다란 진보 사건입니다. 종교개혁이 가져다 준 진보는 종교적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가들이 주도한 라틴어와 희랍어 본 성경의 자국어 번역은 보편교육의 필요성과 함께 국민국가 형성의 기폭제가 됩니다. 시간적으로는 상당히 뒤에 나타나는 ‘공교육’의 씨앗은 종교개혁과 함께 배태된 것입니다. 공교육처럼 ‘공(公)’이라는 수식어를 유독 선호하는 좌파사조의 씨앗은 이 때 형성된 것입니다.

진보의 역사적 흐름은 계몽사상의 맥락에서 이해되고 수용됩니다. 계몽사상은 협의로 보면 17~18세기의 민권사상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폭 넓게 보면 르네상스 이후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인류문명의 발전 자체를 가리킵니다. 신(神) 중심을 탈피한 르네상스, 일방적인 교회 권위에서 성경 위주로 전환한 종교개혁은 광의의 계몽사상에 수용됩니다. 그러니까 계몽이 곧 진보이고, 진보가 계몽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진술은 아닙니다. 하지만, ‘진보’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초로서 ‘계몽’은 광의의 맥락이 아니라 인간 이성을 강조한 합리주의에 일차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즉 ‘계몽=합리주의’라는 등식을 통해 진보의 실체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합리주의 역시 여러 방식으로 이해가 가능한 복잡한 개념입니다만, 여기서는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 내지는 신조라고 하겠습니다.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인 합리주의적 전통은 개인주의, 자연과학의 발달, 시장경제 형성 그리고 시민혁명 등의 순기능적인 진보를 수행합니다. 우리가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이 맥락에서 형성된 가치체제입니다.

계몽의 맥락에서 형성된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핵으로 형성된 자본주의는 그 자신이 진보의 산물이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진보의 타도 대상이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계몽의 산물로 태어난 자유민주주의가 또 다른 계몽의 이단자들로부터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유주의를 타도 대상으로 한 사회주의와 이어지는 공산주의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단아의 탄생은 상당히 미묘한 과정을 통해 전개됩니다. 지면상 두 가지만 지적하면 하나는 루소로 대표되는 낭만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칸트와 헤겔로 대표되는 독일 관념론입니다.


낭만주의에서 친환경 좌파 찾을 수 있어

루소의 낭만주의는 계몽의 산물이면서도 계몽을 철저히 부정한 자기모순을 드러냅니다. 자연주의로도 표현되는 낭만주의는 이성을 부정합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이나 자연상태를 절대 선으로 가정합니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친환경 좌파’의 원조는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또 낭만주의는 기존의 제도와 질서를 부정합니다. 성상파괴라는 뜻에서 나온 ‘iconoclasm’은 이 점을 잘 대변해 주는 말입니다. 좌파 교육감들이 내세우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은 이 사조의 영향으로 학생의 신분을 자연인으로 부당하게 치환한 결과이며, 일방적 체벌금지 조치는 교육기득권 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한 시도라고 보면 이해가 쉽게 될 것입니다.

독일의 관념론도 역시 한 마디로 재단하기 어렵지만, 논제와 관련해 말씀드린다면 진보의 이념을 지극히 관념화시킨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관념에 해당하는 ‘ideal’이 ‘이상(理惻)’이라는 의미를 가진 애매어라는 사실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듯이, 관념론은 진보사상을 이상적인 형태로 치환시켜 놓았습니다. 얼핏 보면 ‘진보’는 좋은 것을 향해 가는 것이니까 이상적인 것을 지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결론을 쉽게 내릴지 모르지만, 실제적인 사회생활 장면이 이상적인 것에 재단돼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진보 인사들이 들고 나오는 것을 곰곰이 뜯어보면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거나 절대 선(善)을 상정한 것들이 많습니다. 2008년 우리 사회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빠진 미국산 쇠고기 파동은 진보 측에서 현실 가능성 없는 사실을 식품안전이라는 절대선으로 교묘하게 그리고 그릇되게 치환한 사건입니다.

칸트 사상의 학문적 타당성 여부는 논외로 치고라도 칸트는 보편적 윤리 형식을 제공함으로써 진보사상이 보편성을 갖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무상급식이 보편적 복지라는 것은 칸트의 보편적 도덕 법칙을 그릇되게 적용한 결과입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모든 사람이 생존할(굶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보편적 법칙을 받아들인다 해도, 이것이 ‘모든 사람은 국가로부터 무상급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진술을 보편적 명제로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그 자체가 진보의 사고방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반-합의 발전 원리가 곧 진보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변증법의 원리가 개개인의 구체적인 생활 장면보다는 이념적인 발전과정에 이상적인 상태를 지향하도록 그려넣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주의를 부정하고 내세우는 집합주의, 즉 전체주의 기원의 단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과문(寡聞)하기는 해도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사건을 하나의 ‘사건(accident)’이 아니며 또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것은 바로 이 맥락이라고 봅니다.


‘정의’‘공정’ 화두도 ‘진보’라는 미명으로 탈바꿈

앞서 ‘진보=합리주의’라는 등식에서 진보가 계몽의 이단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를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진보는 ‘합리주의의 이단’입니다. 진보는 합리주의가 역사의 진보과정에서 나온 부산물로 보지 않고, 인간이성이 이상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갈 수 있으며, 심지어 그러한 이상향을 이성에 의하여 설계할 수 있다고 믿는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계획주의 경제를 낳지만, 결과적으로 하등 쓸 데 없는 공상(空惻)에 지나지 않음이 입증됐습니다. 공산주의 실패가 이를 말해 줍니다. 하이에크가 그의 여러 저서를 통해 인간이성의 오만을 경계한 것은 바로 진보의 이러한 맹점과 위험을 지적하고자 한 것입니다.

끝으로 진보의 맥락에서 나온 자유주의와 ‘자유’의 의미 역시 진보사상에 의해 크게 왜곡되고 있습니다. 자유를 강압(coercion)의 부재로 보질 않고 ‘정치적 지위 또는 경제적 능력 행사’로 부당하게 치환하면 자유주의가 전체주의로 가는 전초 단계가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이사야 벌린이 소극적 자유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한 것은 진보사상의 자유 왜곡을 경계하기 위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보’는 ‘보다 나은 상태’로 간다는 제 이름 값조차 못하고 전체주의로 가는 교두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 회자되는 ‘정의’나 ‘공정’이라는 화두도 ‘진보’라는 미명에 편승해 우리 사회를 전체주의 사회로 몰고 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어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쉬운 예로, ‘공정’과 ‘정의’를 주장하는 데에는 대개 ‘제3의 조정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그 제3의 조정자란 알고 보면 알력(軋轢)을 사용하는 거대한 집합체입니다. 그것은 과거 히틀러나 스탈린 정권이거나 아니면 대개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거대정부이거나 제3세계의 ‘깡패정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공정’, ‘정의’, ‘진보’ 같은 화려한 수식어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과 굳건한 수호의지입니다. #

 
김정래 편집위원·부산교대 교수(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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