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찾으려는 中華문명은 없다
중국이 찾으려는 中華문명은 없다
  • 미래한국
  • 승인 2011.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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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PD의 미스테리 역사 추적]

 중화민족주의가 날로 거세지고 있다. 이와 함께 중국은 주변국의 역사를 자국에 포함시키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3,000년 전의 주변문명을 중화문명으로 덮어 씌우려 한다. 하지만 그런 시도가 거꾸로 오늘날 중화민족의 문화적 뿌리가 얼마나 박약했던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허구로 가득한 중화문명탐원공정의 실체를 보기 위해 3,0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 .신장지역에서 발굴된 3000년전의 미이라.
▲ 중국 신장지역













2011년은 중국정부 주도 아래 추진된‘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이 10년째를 맞이하는 해이다. 동북공정이 고조선, 고구려, 부여, 발해 등 동북아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탐원공정의 핵심은 BC 3,000년 전의 황제신화를 역사로 구현하고 현재 중국의 영토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과 유적을 바로 ‘중국의 문화’에 편입시키는 데 있다.

중화문명탐원공정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1987년 신장 우루무치에서 발굴된 BC 1000년 전 100여구의 미이라는 정밀분석 결과 모두 코카시안, 즉 유러피언계통이었고 미이라의 의복에서 나타난 직조기술과 장신구들은 중국에 영향을 주었음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중국은 이 미이라의 존재가 동아시아인이 아닌 코카시안이라는 점 때문에 중국사에 포함시키는 것에 실패하고 있다. 3000년 전 중국이 자랑하는 중화문명은 이 지역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다.

만일 이들이 북방 몽골리언이었다면 중국은 단호하게 신장문화를 중화문명에 집어 넣었을 것이다. 유럽의 학자들은 이 신장의 미이라들이 3,000년 전 동부 이란어 계통인 토하라어를 썼으며 아파나시예보 문화 및 그 뒤를 이은 안드로노브 문화와 같은 인도유러피언, 즉 아리안문화를 중국에 전달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중국은 이렇다할 만한 코멘트를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중국의 태도는 중화문명이 문화적 공동체가 아닌 인종주의적 배경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주변을 멀리 살펴볼 필요도 없다. 1992년 사천성 청두시 40K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삼성퇴유적은 중국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BC 1200년경 고도의 청동제련기술을 보여준 이 놀라운 문화는 중국의 어느 사서에도 기록된 바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은(殷)의 청동기술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던 것. 삼성퇴문화는 3000~5000년 전의 고촉(古蜀)문화로만 명명될 뿐 현재의 중화문명과 그 어떤 연계고리도 가지지 않은 채 중국문화의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이 문화의 주인공들이 중국어를 썼다는 보장도 없다. 공통된 의견이 있다면 삼성퇴문화가 전통적인 중화문명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나 메소포타미아적이라는 것과 중화문명의 시작이 황하유역이라는 오랜 믿음을 단박에 깨 버렸다는 사실이다.

홍산유적은 또 어떤가. 중국정부의 동북공정과정에서 발굴된 요하지역의 홍산문명은 6,000년 전의 것으로 황하유역의 반포문화 등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당황한 중국정부는 서둘러 중화문명의 기원이 요하에 있다는 엉뚱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중화문명의 창건자라는 周族, 농사도 지을 줄 몰랐다

중국이‘중화문명탐원공정’을 야심차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결과를 얻는 경우도 있다.

2006년 중국문명에 관한 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시노-플라토닉 페이퍼(Sino-Platonic Papers)는 ‘중국농경문화의 기원- 고고학적 발견과 역사기록의 불일치’(The Rise of agricultural civillization in China- The disparity between archalogical Discovery and Documentary Record)라는 논문을 통해 중국인들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황제족이 실제로는 유목부족이었으며 황하와 양자강 유역에 도착한 BC 2100년 경, 그곳의 先主문화로부터 농경을 배우게 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商書>>,<詩經> 등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황제에게 농경을 알려준 周族의 시조 후직(后稷)의 등장은 역사적 연대로 BC 2100년을 넘지 못하지만 양자강과 황하에서의 농경은 고고학적으로 BC 5000년을 앞선다는 것이다. 논문은 결론으로 중국문명의 배경과 확장에는 周族의 문화와는 확연하게 다른 양자강과 황하유역의 先主문화 영향이 결정적이었으며 중국 역사는 이를 배제하고 있다고 끝맺고 있다.


東夷족은 동아시아의 수메르 같았던 존재

이러한 상황은 낯선 것이 아니다. 과거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쐐기문자들 역시 한때는 모두 바빌론이나 앗시리아의 문화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수메르문명이 발굴되면서 앗시리아, 바빌론의 문명에 수메르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음을 알게 됐다. 서구의 어느 학자도 수메르의 문명이 정복자 바빌로니아의 것이었다거나 현재의 이라크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쐐기문자는 수메르에서 발명됐고 이 영향을 받아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등이 차용했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수메르인들과 앗시리아인의 생활풍습은 비슷했겠지만 그들이 사용했던 언어는 현재의 중국어와 영어만큼이나 달랐고 종족적으로도 분명히 구별됐다는 것을 현재의 학계는 알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시노플라토닉의 논문이 밝힌 것처럼 동일한 상황들이 BC 3000년경 동아시아에서도 일어났던 것이다. 양자강 유역의 先主문화가 수메르라면 황제의 周族 문화는 그곳을 점령한 사르곤대제의 앗시리아였다고 보면 맞다. 그렇다면 중화문명의 창건자라는 周族이 농경을 배운 선주문화의 주인공들은 누구였을까.

오늘날 중국인들 가운데 漢族 을 자처하는 종족은 周 나라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다. 당시 周族 은 중국 산동성을 비롯 양자강 하류 유역의 東?族 과는 확연하게 다른 세계관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신화학자 荷新은 그의 저서 <神 의 기원>에서 周 의 文 과 東? 의 신탁 (神託) 을 문화적 정체성의 근본적 차이점으로 제시한다. 유교적 질서를 바탕으로 한 周 나라의 文 의 체계가  東夷 의 신인공주 (神人公主) ,신인공식 (神人公食) 의 카오스적 세계를 이겼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 하신의 주장은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화하 (華華) 와 동이 (東夷) 간에 분명한 문화적 차이가 있었다는 자백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당시  東夷 는 어떤 존재들이었던가?

▲ 갑골문 東자의 여러표현-東자는 초기에 동쪽의 뜻이 아닌 쌀가마와 같은 곡식자루를 의미했다. 자료: 김경일 상명대 교수

東夷에 대해서는 독자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그 정체에 대해 김경일 상명대 중국어학과 교수가 발표한 ‘갑골문을 통한 동이명칭의 연구’는 우리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殷대 갑골문에 나타난 東尸(동시)가 곧 동이(東夷)였다는 사실로부터 東夷는 다름 아닌 ‘쌀가마를 져 나르는 사람들’을 표기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고증해 낸 것이다. 그는 우선 東자가 은대에는 동쪽의 방향을 지시하는 방향어가 아니라 쌀가마를 뜻했다는 점에 착안했다.

▲ 東夷의 이체자로 추정되는 갑골문
아울러 김 교수는 夷의 가장 오래된 고문형이 尸와 동일한 의 형태였다는 점에서 그것이 중국의 다른 민족과는 달리 무릎을 꿇고 앉거나 쭈그리고 앉는 생활을 하던 사람들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조상신을 의미하던 神자의 金文이 제단에 꿇어앉은 사람을 표시하는   라는 사실로부터 추론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 모른다. 동이족은 유난히 神에게 제례를 중요시하던 사람들이었다.
▲ 은대 갑골문의 東夷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 중국대륙에서 고도의 문화를 펼치던 殷에게 중요한 정복대상은 바로 이 쌀가마니를 지고 나르던 東夷였다. 은대의 갑골문의 많은 점복문들은 신에게 東夷지역에 풍년이 들겠냐고 묻는 것과 그들의 창고를 습격하면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내용들이 김 교수의 논문에 등장한다. 김 교수는 바로 이 쌀가마니를 뜻하던 東자가 풍부한 농경을 영위하던 동이족의 땅을 지칭하면서 비로소 東쪽의 의미를 갖게 됐다고 주장한다.

양자강 유역과 한반도 고대문화는 일란성 쌍둥이

이러한 정황들은 殷사회만 하더라도 본격적인 농경사회로 접어들지 못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따라서 殷의 주된 관심 영역은 바로 동쪽의 농경사회였고 은의 서쪽에서 기원한 周의 사회를 殷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 소로리 고대비 (BP 13000녀전의 순화미다.

중국문명의 형성에 황하가 아닌 양자강유역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이 지역에서 최초의 농경, 그것도 쌀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들이 최근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쌀 농경의 시작은 동남아나 인도의 아셈지방인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1997년 Spencer 등이 미 고고학회에 보고한 바에 의하면 중국의 쌀(Oriza sativa)은 양자강 유역에서 탄소보정연대로 11500년 전에 재배되기 시작했으며 그 연도가 세계에서 가장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시기의 벼가 과연 재배종인가는 학계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대체적으로 중국에서 쌀 농경이 시작된 것은 팽두산 유적의 BC 8000년대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시기는 최초의 농경이 시작됐다는 중근동의 기록과 거의 동시대적이라 할 수 있다.

▲ 소로리 탄충에서 발견된 딱정벌레. 습지에서만 발견되는 곤충이어서 고대에 소로리 일대에 벼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이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 충북 소로리에서 발견된 13000년 전의 탄화미는 하버드대 연구소를 비롯 세계공인기관으로부터 가장 오래된 순화벼, 즉 재배품종인 것으로 확인됐지만 주변에 경작지 유적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미스테리로 빠져 버렸다. 그러나 조수원 충북대 교수팀에 의해 소로리 탄화미 유적 탄층에서 습지에서만 서식하는 딱정벌레(carabidae)과 곤충화석들이 26종이나 발견되면서 소로리 일대가 과거에는 벼과나 사초과의 식물들이 군집으로 서식할 수 있는 습지였다는 점이 밝혀졌다.

아울러 양자강유역을 중심으로 중국의 동부 연안 지역과 한반도간에 유사한 전승과 설화 등의 내용은 익히 잘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것은 한국인의 DNA 유전자와 가장 가까운 거리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산동성과 같은 중국동부지역과 일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1999년 사토시 일본고등연구소 교수가 한국, 중국, 일본, 아이누인들의 미토콘드리아 DNA의 유전적 거리를 분석함으로써 밝혀졌다. 중국의 사서는 이들을 오래 전부터 東夷로 인식해 왔다.

▲ 유사벼 출토 사진

한반도에는 최초의 문명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있다. 바로 13000년 전 소로리의 재배볍씨가 그렇고 경남 창녕비봉리의 통나무 선박은 8천년 전의 것으로 현재 기록상 세계최초의 선박이다. 제주 고산리에서 발굴된 토기는 1만년 전의 시기를 다투며 세계에서 가장 오랜 토기라는 죠몬토기에 필적한다. 중국문명의 기원과 형성에 그 자양분을 제공한 東夷문화의 옛 중심이 한반도가 아니었다는 단정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한정석 편집위원 前 KBS PD

한정석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89년 KBS 19기 공채 PD로 입사<세계는 지금>, <KBS 스페셜> 등 다큐멘터리를 8년간 연출했다.현재는 미디어컨설팅 시너지웍스의 대표로 있으며 동아시아 문명의 기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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