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흐르기 시작하는 고원 태백(太白)
강산이 흐르기 시작하는 고원 태백(太白)
  • 미래한국
  • 승인 2002.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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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우익의 국토기행] - 강산이 흐르기 시작하는 고원 : 태백(太白)

역사는 도서관 서고 속이 아닌 땅에서 생겨나는 것 황혼을 넘기는 자색 능선의 자유로움에 전율 느껴져 이 군, 이번 답사에 자네가 함께 하지 못한 것이 내내 맘에 걸렸네. 답사기를 쓰려고 비망록 쪽지를 집다 무심코 내다본 창밖에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네. 한참을 보고 섰다가 이 글을 자네에게 쓰기로 했네. 바빠서 못 읽어도 괜찮네. 내 맘이 그렇다는 것뿐이니까.

언젠가 땅이 만들어지고 강이 생겨났다네. 산이 솟고 골을 따라 강이 흐르고, 흐르는 강은 골짜기를 파내다 들판을 덮으면서 역사를 만들어 갔네. 산이 솟고 강이 흐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땅에 역사가 새겨져온 것이리니, 그러고 보면 역사는 도서관 서고 속보다는 땅에 있는 것 아닌가?

이쯤하면 내가 왜 불현듯 태백을 찾아 나섰는지 군은 짐작리라 믿네. 오랜만에 간 청량리역의 이른 아침은 여전히 생기가 있었네. 친구든, 연인이든, 가족이든, 함께 보고, 생각하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라면, 기차 여행은 참 푸근한 것이지. 겨울 기차를 타고 과거와 미래, 현실과 꿈 사이를 넘나들며 때로 침묵에 시간을 맡기면, 잊었던 자신과도 다정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네.

▲ 태백산의 설경

자네 혹시 알고 있었나? 낙동강과 한강의 발원지가 모두 태백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동해로 가는 오십천의 발원지까지. 조금 전에 제천을 지났으니 이제 태백선이지. 석탄을 실어내기 위해 놓은 철도가 관광열차로 탈바꿈하고 있는데, 방향은 맞는 것 같지 않나? 산이 자꾸만 차창에 다가서는 걸 보니 계곡이 깊은 거라, 강원도일세. 태백산(1,568m)은 중허리부터 하얀 눈꽃의 관을 쓰고 있네. 철도청에서 눈꽃·눈썰매 여행을 기획했다더니, 이 눈이 오고 나면 참으로 장관이겠네.

험준하지 않고도 중후한 산세가 백두대간의 중추로 손색이 없네. 정상의 천제단에서는 해마다 개천절에 천제(失祭)를 지낸다지. 자네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사람들이 하늘을 경외하여 그렇게 국태민안을 발원(發願)하는 마음씨를 귀하게 여기네. 거기에 굳이 원시라는 말을 붙인다면, 발원(發源)이든 시원이든 지금 내가 찾아가고 있는 것과 어딘지 감이 닿고 있지 않나?

천년을 산다는 주목이 죽어서도 다시 천년을 버티는 이치를 생각해 보게나. 88올림픽 후에 세워진 태백산 비문에는 ‘12만 시민의 정성’이 담겼다고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태백시에는 그 절반의 주민만 살고 있다네. 오랫동안 삼척 땅이었다가 황지가 장성에서 갈라져 읍이 되고 다시 합쳐 태백이 될 때만 해도 석탄이 주요 에너지원으로 우리의 산업발달을 이끌어갔었지.

그 땐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 했다니까. 석탄박물관은 석탄산업의 변천사와 함께 채탄부터 이용까지의 전 과정을 짜임새 있게 전시해 놓았네. 광부들의 빈한한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구 석에서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네. 우리 세대는 누구 없이 그 같은 환경에서 자랐거든.

지하 1,000m의 막장 체험은 실감이 났으나, 특수효과를 이용해 갱이 무너지는 상황을 연출해 내는 데에는 솔직히 기가 질렸네. 이렇게 해서라도 굳이 ‘잊지 말자’고 한다면, 그럴 만도 하지. 장성광업소에서 정년퇴임하고 문화 유산 해설사로 일하고 있다는 김선생이 더 고마워졌네. 산줄기(山脈), 석탄줄기(炭脈)에 이어 이번에는 물줄기의 원천을 찾아 나설 차례일세. 시가지 한복판에 작은 공원 하나.

그 가운데 하루 5,000t의 물이 용출되는 아담한 연못이 있네. 황지(潢池). 낙동강 1,300리의 발원은 이렇게 가까이 있었네. 시주승을 박대한 노랭이 황부자의 집터가 벼락을 맞아 패인 자리에 연못이 생겨났다는 우화 같은 전설을 들은 적이 있는가? 아이 업은 아낙이 뒤돌아보다 돌이 되었다는 고갯마루는 강원도판 로렐라이일세 그려.

옛날에는 황지를 늪벌이라고 불렀다는구만. 마당늪(上池), 방깐늪(中池), 통시늪(下池)이라는 이름이 전설을 더 구체화시키고 있고, 굴뚝소(沼)의 물을 길어다 먹었는데 묻혀 버렸다네. 자넨 복원을 좋아하지? 심연의 수면은 뜻밖에 조용하네.

잎 떨어진 나뭇가지가 되비친 모습이 정결하지만, 앞뒤를 에워싼 빌딩의 그림자는 끝내 지울 수가 없었네. 비석을 들여다보고, 다시 몇바퀴를 도는데, “한강 쪽으로 가시지오” 동행한 조교의 말씨가 조심스럽기까지 하네.

돌섶에 서서 흘러 나가는 물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대답 대신 발길을 돌렸네. 이번에는 한강 514km 의 발원지 검룡소(儉龍沼)를 찾아 금대봉골로 향했네. 안개비가 뿌옇게 내리는 가운데 시내를 벗어나 북으로 한참을 달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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