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공에 실은 나라사랑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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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범수 발행인
  • 승인 2011.0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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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가뛴다-인터뷰]조중건 대한항공 고문
▲ 인터뷰중인 조중건 대한항공 고문

지난해 11월 23일, 북한이 연평도 주민을 공격했을 때 전 국민이 경악했다. 공포에 떨거나 분노하거나 혼돈해 있을 때 조중건 대한항공 고문은 조선일보에 1억 원의 성금을 기탁했다.

“안보는 군인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어요. 지난 10년의 영향이죠. 안보의식이 굉장히 약해졌어요. 통일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을 하는데, 어떤 형태의 통일인지가 문제지요. 우리가 약하면 적화통일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기 현대화를 해야 합니다. 국방예산은 한계가 있잖아요. 조선일보에 내가 낸 걸 보면 뜻있는 분들이 참여할 거고, 그렇게 성금을 모아보자는 의도였어요.”

6·25 때 포병으로 참전했던 조중건 고문은 성금을 기탁할 때 ‘6·25에 참전한 육군 대위 조중건’이라는 이름으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1억 원 성금기탁 소식에 네티즌들은 존경과 박수를 보냈건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행법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정부가 국방성금 명목으로 개인 또는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을 수 없게 돼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한민국 국방력을 강화하는데 써 달라”는 국민의 뜻은 국방부가 “그런 명목으로는 받기 곤란하다”고 거절해 유야무야 됐다.

“법은 절대적인 게 아니라 상대적인 거 아닙니까? 좋은 뜻이라면, 특히 안보관계라면 국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유치원생부터 나이든 사람까지 100원씩 1000원씩 방위성금을 내서 장비를 마련하고, 반공의식을 키워, 안보는 우리가 지키는 것이다, 그걸 깨닫자는 의도였는데 못 받겠다니까 답답했죠. ‘연평도 이주민을 위해서라면 쓸 수 있다’고 하기에 그건 내 생각과 맞지 않아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했죠.”


‘6·25 참전 육군대위’의 성금기탁
 
조 고문은 국민이 성금을 모으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던 일이라고 했다.

“일제시대 국민학교 다닐 때 코 묻은 돈 헌금했고 광복 이후에도 국방헌금을 했어요. 이승만 대통령 시절 비행기를 사기 위해 국민들이 헌금을 했어요. 유치원생부터 돈을 내서 AT6를 서너 대 샀는데 6·25 때 폭격을 맞아 다 부서졌습니다.”

우리의 안보를 미국에 맡기려는 의식은 잘못 됐다는 것이 조 고문의 지적이다.

 

“이라크 치안유지를 위해 5만 명, 아프가니스탄에 15만 명의 미군이 나가 있어요. 한국에 2만5천에서 3만여 명이 와 있다고 하는데, 미 육군의 숫자가 100만 명이 안 됩니다. 이 정도면 교대도 어렵다고 봐야지요. 이북의 목적은 평화협정을 해서 미국을 철수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적화통일이 쉬울 거라고 보는 거죠. 전쟁을 막으려면 우리의 능력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경제 발전을 하면서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평화를 유지해야지요. 전 세계 정부 존립의 목적은 국민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주는 겁니다. 의(衣)와 주(住)는 앞가리고 비 피하는 수준이라 하더라도 먹는 건 해결해줘야 할 거 아닙니까. 국민들의 먹는 것 하나 해결 못하면서 미사일만 준비하는 이북은 정권이 아니라 집단입니다. 의식주 해결도 못하는 집단에 전 세계 10등 이내인 우리나라를 내주면 안 되지요. 소위 진보라는 사람들, 적화통일 되면 6개월 이용당하고 숙청당할 겁니다. 안보의식을 높여야 합니다.”

조중건 고문은 안보에 관해서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말할 태세였다.

“미군이 있는 동안에도 우리 국방은 우리가 70~80% 지키고 미군에 20~30% 정도 의지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100% 준비될 때까지만 미군에 의지하고 장차 우리가 100%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각오를 해야지요.”

연평도 포격 사건을 계기로 그는 자신이 할 일을 찾아 행동하고 있다고 했다. 첫 번째 시도한 것이 재벌들의 구체적인 참여를 유도한 일이다.

“요즘 재벌 2, 3세들이 회사를 경영하고 있어서 전쟁 관계를 잘 몰라요. 자기들은 자기들 방식대로 전쟁을 해석한다고 생각하겠죠. 이번에 전경련 상근부회장과 상공회의소 회장을 만났어요. ‘미국이 언제까지 계속 있진 않을 거다. 우리가 정신 차리고 안보를 튼튼히 해야 한다. 미국만 의지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미군에게 말로만 고맙다고 할 게 아니라 점심 한 끼라도 대접하자’는 제안을 했어요. 각 기업과 각 개인이 미군들을 1년에 1번씩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하고, 산업체 견학 시키는 일입니다. KAL(대한항공)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 어떤 방식으로 하실 계획입니까.

“미군들을 초청해서 시설을 보여주고 밥도 대접하고 그러는 거죠. 삼성, LG, 포스코, 현대, 다 얘기했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미군 측과도 얘기가 다 돼 봄부터 시작할 겁니다. 보고나면 미군들이 돌아가서 자기 부모와 친구들한테 ‘한국기업 대단하더라’고 얘기하겠죠.”

조중건 고문이 나라 걱정을 많이 하는 것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체험했기 때문이다. 1932년생인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6·25 전쟁을 맞았다. 지하실에 숨어 있다 몰래 광화문에 나갔다가 무고한 민간인이 총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3개월을 숨어 지내다 끝내 밀고를 당해 당시 노동당사로 쓰였던 중앙고등학교로 끌려갔다. 북한 의용군에 끌려갈 뻔한 위기 상황에서 인민군이 된 친구의 도움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9·28 수복 때 미군부대 통역관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건 고교 시절부터 미국 유학을 꿈꾸며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둔 덕택이었다. 미군 25사단 통역관 신분으로 압록강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 때 서울로 다시 내려왔다.

1952년에 포병으로 전과해 군대에서 미군의 포병교범을 번역했다. 일본 포병책을 참고해가며 ‘포술학’이라는 책을 완성하느라 눈까지 나빠졌다. 이후 10개월간 철원에서 근무한 뒤 도미(渡美) 유학장교시험에 합격, 1953년 6월에 포병 교관 겸 통역관 자격으로 미국에 가게 됐다.

“포병학교에서 만난 레이킨 중령에게 미국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 친구가 힘을 써보겠다고 했지만 잊고 있었는데 미국 포병학교에 있을 때 그 친구가 나를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에 입학시키고, 리바이스 진의 창시자 아들 월터하스로부터 장학금을 받게 해주었어요. 레이킨 중령의 부탁을 받은 리처드 닉슨 부통령이 워싱턴 파티 석상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나의 입학을 부탁해서 꿈같은 일이 이루어진 겁니다.”

당시 모든 군인은 미국에서 체류했던 기간의 갑절을 국내에서 근무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로 인해 대학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는 이 대통령의 비서인 유태하 비서실장에게 편지를 써서 졸업 후 국내에서 10년간 봉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이례적으로 미국에서 전역, 대학에 입학했다.


이승만 대통령, 닉슨 부통령 ‘백’으로 미국유학, 밑바닥 생활 체험도

“공부하면서 접시 닦고 신문배달하면서 궂은 일을 다 했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을 체험했기 때문에 혼자가 아니라 같이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유학 마치고 돌아와 육군본부에 신고하면서 10년간 국가를 위해 복무할 각오를 했어요. 그때 장교들 숫자를 줄일 때였는데 내 신고사항을 한참 듣더니 그냥 가보라고 하더군요.”

곧바로 형이 운영하고 있던 한진상사에 합류했다. 1945년에 창업해 운수사업과 무역업으로 입지를 다졌던 한진상사는 전쟁 중에 완전히 잿더미가 됐다가 1953년에 재기해 미군 물자수송을 하고 있었다. 그가 귀국한 1959년에는 제법 탄탄한 회사로 성장한 상황이었다.

이후 한진은 베트남 특수로 재벌 반열에 들어섰다. 조 고문은 탁월한 영어 실력과 미군 인맥을 활용해 중장비 조달 등의 악조건을 뚫고 베트남 꾸이년항의 미군 용역과 수송작업을 따냈다. 계약금액은 790만 달러. 조 고문은 베트남 수송사업을 “100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사업”이라고 평가했다. 사업이 커지면서 만년 적자 공기업인 대한항공공사를 떠안게 됐다.

“군인들이 10년간 운영하다 보니 매년 100만 달러 이상 적자를 냈어요. 형님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러 갈 때 ‘절대로 인수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어요. 돌아온 형님 얼굴이 창백하더군요. 어떻게 됐느냐고 하니 ‘대통령이 제안하는데 어떻게 노하느냐?’ 그러셨지요. 그렇게 시작했어요. 우리 형제는 일단 맡으면 죽기 아니면 살기로 했어요. 기왕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의 방법인가를 찾아 난국을 뚫는 거죠. 처음에는 여객이 없었어요. 열심히 하는 가운데 국력이 발전하고 경제가 좋아지면서 좌석 구하기가 힘들게 됐죠.”

조 고문은 형님 조중훈 회장과 함께 70~80년대 대한항공의 성장사를 주도했다. 국제노선 개척을 위해 당시 소련과 중국 등 적국까지 남나들며 대한민국의 하늘을 확장했다.

대한항공 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는 국내선 기내에서 서빙을 해 화제가 됐다.

“커피 배달을 하면서 손님과 대화를 했는데, 나를 알아본 승객들이 반가워했지요. 어떤 국회의원이 전화로 ‘국회의원 나간다며?’ 하고 물어요. 그래서 ‘당신 지역구에 출마할 거야’라고 농담을 했지요. 정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관심 없었어요.”

형제의 난으로 구설수에 오른 재벌가가 많은데 한진의 故 조중훈 대한항공 회장과 부회장을 지난 조중건 고문은 재계에 ‘아름다운 관계’로 알려져 있다. 언론에서는 조중건 고문에 대해 ‘성공한 2인자’라는 평가를 내렸다. 조중건 고문이 오늘날의 한진을 일구는 데 중요한 축이었지만 장조카 조양호 회장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쿨하게’ 떠났다는 것이다.

- 형님과 잘 지낸 비결이라도 있나요.

“우선 피가 섞인 형제고, 형님과는 12살 차이로 띠동갑이었어요. 두세 살 차이면 싸우겠지만 12살이나 차이가 나니 토론은 해도 싸우지는 않았어요. 내가 철이 들기 전부터 중훈 형님과 그 위의 중열 형님은 이미 외국을 다니며 원대한 이상을 꿈꾸는 패기만만한 청년이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형들을 내 인생 선배이자 스승으로 존경했고 그 마음은 평생 변함이 없었어요. 중훈 형님은 머리 회전이 빠른 분이에요. 서로를 존경하고 서로를 밀어줘서 오늘에 이른 겁니다. 동생 말 듣는 형님도 드문 케이스일 겁니다.”


“형은 선장, 나는 일등항해사”

조중건 고문은 자서전 <창공에 꿈을 싣고>에 “형이 대한항공 ‘선장’이었다면 나는 ‘일등항해사’였다. 선장은 모름지기 새로운 곳을 향한 모험심과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배를 움직이는 것은 일등항해사다”라고 기술했다. 그러면서 “2인자는 항상 해결사 역할을 해야 했다. 성공 확률은 거의 50% 이하였다”고 자평했다. ‘2인자들은 1인자가 꾸는 꿈에 덩달아 취해 열정을 다해 일하는 존재’라고 정의한 조 고문은 조중훈 회장을 “육해공 종합 물류기업이라는 꿈을 내게 보여주었다”고 기술했다.

- 그래도 물러나실 때 아쉬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욕심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대로 살아갈 능력이 있으니 은퇴한 거지요. 형님이 사업을 잘 이끌어 오셨고, 지금 조양호 회장이 잘 하고 있어요.”

- 살아오신 삶이 대한만국 근현대사와 발걸음을 함께 하셨는데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룬 저력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는 이북으로부터 계속 무력침공 받았어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독재다 뭐다 비판을 하지만 그때 상황에서는 ‘먹히느냐 마느냐’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 여건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까요. 당시에는 안보의식이 투철했어요. 확고한 안보의식이 없었으면 오늘이 없었을 겁니다.”

- 요즘 젊은 세대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오늘의 대한민국은 거저 된 게 아닙니다. 이북한테 괴롭힘을 많이 당했어요. KAL 사장 할 때 김현희 사건이 일어났어요. 안보 상황이 정착되고 자신이 있어야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합니다. 이북, 중국과 대결하면서 성장하려면 무조건 힘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일본도 중국도 미국도 우리를 다시 보는 이유는 우리가 잘하니까 그런 겁니다. 힘이 있으면 얘기 좀 더 하자고 하지만 힘이 없으면 만나는 걸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안보의식이 많이 흐트러졌는데 이대로는 안 됩니다. 힘이 있으면 이북도 함부로 못합니다. 힘이 있으면 밖에서 먼저 찾아요. 힘을 길러야 합니다.”

1987년 발생한 KAL 858기 폭발사건 때 조 고문은 마유미 일행의 실체를 정부에 알려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858기가 공중폭발한 후 탑승자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일본인 2명의 행적이 의심스러웠다고 한다. 당시 박수길 교통부 차관을 통해 일본 외무성에 여권 조회를 의뢰했고, 위조 여권이라는 것이 밝혀져 사건의 실마리가 풀린 것이다. 

지난해 11월, 1억 원의 성금을 기탁하려다 거절당한 이후 그는 신문 인터뷰에서 그 돈을 보수단체 지원에 쓰겠다고 했다. 현재 광고와 안보의식 함양 등 여러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조중건 고문의 평소 행적을 아는 사람이라면 1억 성금 기탁 소식을 듣고 그리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미 20년 전부터 사재를 털어 장학금 전달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그의 호를 딴 화암(華菴)장학회에 그가 현재까지 출연한 기금은 15억 원이다. 곧 5억 원을 더 출연하여 장학기금을 20억 원으로 늘일 예정이다.


장학사업, 안보의식 강화에 전념

-장학기금은 어떻게 조성하셨나요.

“오래 전에 경기도 광주에 부동산을 샀는데 10억 원의 이익이 생겼어요. 이건 내가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아내와 의논하여 장학회를 만들었지요. 국내 대학생, 유학가는 학생들, KAL 직원 자녀들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어요. 내 친구였던 워커 대사의 모교인 사우스캐롤라니아대학에도 장학금을 주기로 했어요.”

모교인 캘리포니아대학에도 150만 달러를 기부했고, TIEN 도서관 건립에도 5만 달러를 기부한 바 있다. 극동방송에도 오래 전부터 매년 1,000만원씩의 운영기금을 지원하고 있다.

“1959년에 김장환 목사님도 나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어요. 1965년에 UN군 사령관 집에 초대를 받은 자리에서 알게 되었는데 어디를 가든 만나는 거예요. 내가 두 살 많지만 얘기가 잘 통해 친구가 됐어요. 김장환 목사는 미8군부대 초청으로 집회를 많이 할 때이고 나는 미군 군납사업 관계로 미군들과 접촉이 많을 때였죠. 김 목사님이 극동방송 운영하면서 애를 많이 썼어요. 1980년에 러시아나 중국으로 출장 갈 일이 있으면 그쪽에서 소니 단파 라디오로 방송이 잘 나오나 확인하곤 했죠. 어디서든 방송이 똑똑하게 잘 들렸어요. 어려운 여건에서도 이 사업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조중건 고문이 대한항공에서 실무를 본 10여 년 동안 김장환 목사는 해외 선교를 나갈 때 1등석을 무상으로 이용했다.

“대부분 1등석의 몇 자리는 비게 마련이에요. 친구로서 빈자리를 이용하게 하는 게 뭐 대단한가요. 세계 선교를 하는 목사님을 편하게 모시는 건 당연한 일이죠.” 뜻밖에도 조 고문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했다. 김장환 목사님이 전도를 많이 하셨을 텐데 왜 교회에 안 나가시느냐고 하자 “하나님 뜻에 어긋나지 않게 내 나름의 박애정신을 갖고 살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 계획을 묻자 “우리 나이로 올해 80이니 10년은 어렵고 5~6년 정도 더 살 텐데 끝을 잘 마쳐야지”라며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조중건 고문의 목소리와 몸짓은 청년처럼 밝고 활기찼다.

“좋은 일 많이 하고, 갖고 있는 돈 전부 장학금으로 주고, 보수단체도 돕고 그래야죠.”

마무리 대화도 안보문제였다. 조중건 고문은 안보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이 있으면 열심히 나설 거라며 분명한 실천을 다짐했다.#


인터뷰 / 김범수 편집위원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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