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내 버릇 백살까지 간다”
“태내 버릇 백살까지 간다”
  • 미래한국
  • 승인 2011.0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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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영실 총신대 평생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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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아기와 불행한 아기는 태내에서부터 결정된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태내 버릇이 백살까지 간다”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어 주목된다.

김영실 총신대 평생교육원 ‘아기 예술 아카데미’ 담당 교수는 지난 2006년부터 총신대에서 ‘태아교육 지도사 과정’을 개설해 태아 교육의 중요성을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해오고 있다.  실제로 태아 교육의 중요성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의학적으로 증명된 사항이기도 하다. 과학자와 의학자들 연구 결과 아기는 태내에서부터 만 3세까지 평생 쓸 뇌의 70∼80%를 발달시킨다는 결론을 얻었다. <미래한국>은 김영실 교수로부터 알면 알수록 놀라운 태내교육의 신비에 대해 들어봤다.

“엄마가 임신해 있는 10개월의 영향이 엄청나게 중요해요. 태아의 청각은 잉태된 지 3개월부터 만들어져 부모의 음성도 들을 수 있어요. 제일 먼저는 한 몸인 엄마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고, 후에 엄마의 마음 상태와 자궁 밖으로부터의 환경에 의해 아기의 성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올바른 태아교육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배 안에서 그 아이가 어떤 인물로 만들어지는지 결정이 되는 것이죠.”

김 교수는 행복한 아기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행복한 가정 분위기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태아교육이 뇌 발달과 품성 순화에 영향

“저는 우리 엄마들뿐만 아니라 아빠는 물론, 시아버지, 시어머니 등 온 국민이 태아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분위기가 안 만들어진 상태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그 아이가 평범하게 살 수는 있겠지만, 정말 나라와 민족을 이끌어가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까 그런 생각을 해요.”

김 교수가 태아교육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약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교수는 총신대 교회음악학과를 졸업한 뒤 1982년 이민 목회를 하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레드랜드 대학교에서 음악석사, 캘리포니아 클레몬트 대학원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 교수는 귀국하기 전 참석한 세미나에서 아기 음악을 접하면서 태아교육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됐다.

“로나 하이거라는 오르겐 음악박사가 아기들을 열심히 관찰하고 아기 음악을 만들었는데 그 세미나에 참석을 하면서 아기들에게 미치는 음악의 영향이 엄청나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위에도 보면 행복한 가정생활, 사회생활을 하고 성공한 사람들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좋은 음악을 좋아하더라고요. 약 2500년 전에 소크라테스는 좋은 음악은 좋은 사람을 만든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 말이 기가 막힌 뜻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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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좋은 음악을 수백 년 동안 내려오면서 변하지 않는 음악, 아직도 우리가 듣고 공부하고, 연주하는 음악으로 정의했다. 아기와 음악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자연스레 2003년 귀국 이후 2006년부터 총신대에서 ‘7Q 쉐마 뮤직(영·유아 음악) 지도사 과정’, ‘발달 증진을 위한 아동 음악 지도사’ 과정을 열게 됐다.

“수업을 하면서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들을 많이 보게 됐어요. 그런데 이제 돌이 막 지난 아기들인데도 이 아이가 잘 될 아이인지, 엄마 속을 썩이면서 클 아이인지 성격이 보이더군요. ”

이렇게 태아교육에 눈을 뜨게 되면서 김 교수의 수업 내용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김 교수가 총신대에서 매년 봄과 가을 학기에 여는 ‘성품태교 지도사 과정’에는 아기의 뇌구조와 태아의 뇌를 이해하고 아기에게 음악이 미치는 역할, 또 태아를 잘 길러내기 위해 필요한 부모의 역할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유대인들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부터 백일기도를 하면서 준비 하고, 잉태 후에는 축복기도를 하면서 잠언을 들려주고 인격적으로 대합니다. 부모 역할 교육이 없이 아무렇게 살다가 아기를 낳으면 불행한 자식이 태어날 수 밖에 없고 악순환이 반복되죠.”

김 교수의 강의에는 좋은 태교를 거쳐 태어난 아기를 잘 양육하기 위한 ‘7Q 쉐마 뮤직’ 수업도 포함된다. 이 수업은 생후 7개월부터 7세까지 영유아를 대상으로 성경 말씀, 성품을 음악으로 풀어주면서 아기들 수준에 맞춘 음악 활동이며, 명곡 감상과 악기 탐구를 통해 뇌 발달을 활발하게 하는 적기 음악교육 과정이다.


영유아기 때 음악성 키우면 논리력과 사회성 향상

“영유아기 시절에는 음악을 이해하는 뇌가 열려 있어요. 이 뇌는 우뇌 속에 들어 있는데 7살까지 열려 있어서 아이들의 성장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이 시기에 음악성을 향상시키는 것은 뇌 발달을 활발하게 해주고 좌뇌의 역할인 언어와 수학, 논리, 사회성, 도덕성 및 리더십에 도움을 줍니다. 이 시기가 지나 좋은 음악을 들어도 그다지 효과가 없어요.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좋은 사람을 만들어 내는 거지요.”

김 교수는 아기들의 뇌가 폭발적으로 발달하는 3세 때까지는 엄마가 아기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며, 아이를 때리거나 아이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는 언행은 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는 만 3세까지 아이들한테는 때려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아이들은 뇌가 발달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못해요. 뭔가 다 뜯고 찢고 탐구하는 일들은 뇌세포가 시키는 거죠. 그런데 엄마가 쫓아다니면서 야단을 친다면 아이는 그때마다 뇌세포가 망가져요. 자율성이 없어지고, 창조뇌가 망가지고, 자신감이 없어지지요.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아이에게 어른을 만나면 ‘배꼽인사’를 강요하는 것도 안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의 인상을 뇌에 새겨 놓지요. ‘배꼽 인사해’ 이렇게 강요하는 것은 역시 직관뇌를 망가뜨리는 것이죠.”

한편 김 교수는 이 일을 하는데 기존의 유아 교육학을 전공하신 분들로부터 ‘왜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주제 넘게 이러한 교육을 하느냐’며 싫은 소리도 듣지만, 누가 뭐라 하든 상처가 안 된다면서 “저희 어머님이 태교를 잘하신 것 같습니다”라며 허허 웃었다.

▲ 김상옥의사
사실 김 교수가 이렇게 자녀교육, 부모교육에 열심을 내게 된 데에는 그녀의 가정환경도 역할을 했다. 김 교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독립운동을 하던 집안의 자손으로 특히 김 교수의 할아버지는 항일 독립운동에 큰 자취를 남긴 순국선열한 지 김상옥(金相? 1890~1923) 의사(義士)이다. 김상옥 의사는 1923년 1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독립운동 탄압의 상징과도 같았던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5일 간격으로 일본 경찰과 세 차례의 시가전을 벌였던 인물. 서울 출신인 김 의사는  3ㆍ1운동이 일어난 뒤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1923년 1월 국내로 잠입해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의 고관을 암살하고 총독부를 폭파하려는 대담한 계획을 세운다.

1월 12일에는 독립투사들을 잡아 심하게 고문하던 종로경찰서(지금의 제일은행 본점 자리)에 폭탄을 던져 일제 당국을 전율케 했고 닷새 후엔 추격하는 일경을 상대로 후암동에서 총격전을 벌여 5명을 쓰러뜨렸다. 일본 군경 500명이 김 의사를 포위하자 그는 대설이 쌓인 남산으로 잠적하기도 했는데, 이때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나무를 타고 간격을 넓히면서 왕십리 안장사로 탈출해 승복을 빌려 변장하고 짚신을 거꾸로 신고 하산해 탈출에 성공한다. 이에 김상옥 의사에게는 ‘귀신출몰 김상옥’, ‘제비 김상옥’이라는 별칭이 붙여지기도 했다.

열흘 뒤인 22일에는 효제동에서 단신으로 일경 1천여명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때 김상옥 의사는 형사대ㆍ집총대ㆍ기마경찰대ㆍ헌병대 등 4중으로 포위한 천여 명의 군경에 맞서 권총 두 자루만으로 무장하고 무려 3시간 동안이나 싸워 적 15명을 살상했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항일 시가전’으로 평가되는 이 전투 끝에 김상옥 의사는 34세의 나이에 마지막 총탄 한 발로 자결했다. 당시 김상옥 의사가 펼친 세 차례의 시가전은 일제 식민통치 심장부인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만주에서 독립군의 대부대 작전 성과에 못지않은 쾌거로 평가되고 있다.

김상옥 의사는 독립운동 이외에도 16세 때부터 동대문감리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교회 서적을 보급하는 일에 앞장서는 한편 야학당을 만들어 공부할 수 없는 청소년들에게 독립 정신을 심어주고, 일제의 진상을 알려줬다.

또 경성기독교청년회관(YMCA) 회장(당시는 청년부장이라 칭했음)을 역임하면서 회관 내의 경성영어학교에서 영어공부를 하고,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자극을 받아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신상품 개발의 필요성을 인식, 자신이 경영하던 철물상회 2층에 공장을 설치하고 말총을 사들여 말총 모자를 생산해냈다. 영국인 선교사 피어슨 여사와 함께 국내외 항일 독립운동 소식 및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알려주는 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간한 이도 김상옥 의사였다.


독립운동가 김상옥 의사의 손녀

김 의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입한 것은 물론이고, 임시정부 원조를 위한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해 정부는 지난 1962년 3월 1일 김상옥 의사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지난해 7월 2일 서울시는 서울 종묘 동쪽 창경궁로 접점에서 종로 6가 율곡로 동대문 방향 접점에 이르는 818미터 길을 ‘김상옥로’로 명명했다. 이 도로는 김상옥 의사의 생가와 최후대격전 자결순국현장을 통과하는 도로이며, 김 의사의 공훈을 선양하기 위해 서울시에서 지정한 것이다. 오는 1월 22일에는 김상옥 열사의 출신학교인 효제초등학교 ‘순국선열 김상옥체육관’에서 김상옥 의사 순국 88주기 추모식이 열린다. 

김 교수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굶는다’는 말처럼 독립군 아들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는 일제로부터 재산을 몰수당하고,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걱정과 근심 속에 평생을 사셨다고 했다. 역시 독립군의 딸이었던 김 교수의 어머니도 아버지가 끌려가고 고문당하는 것을 보면서 자라났다. 자연히 몸에 질병을 갖게 되고, 자녀 다섯을 낳으셨지만 제대로 키울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정치를 맡아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했지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빛을 본다는 것은 힘든 일이에요. 정말 자부심이 있고 훌륭한 부모님들을 뒀지만 이러한 환경 속에서 저희 오빠도 그렇고 언니도 건강하지 못하게 태어났습니다. 어쩌면 슬픈 역사들이 계속 이어진 거죠.”

김 교수는 김상옥 의사를 알리는 일은 정부가 할 일이지만, 현재 85세의 김 교수의 아버지 김태운 씨가 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우리 조상들은 청춘과 목숨을 다 바쳐 나라를 사랑했는데, 부유하고 행복을 누리는 우리 세대의 젊은이들이 좀 더 애국심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가르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 훌륭히 자식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곧 나라를 사랑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를 널리 알리는 것이 저의 사명이며 강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김 교수는 “김상옥 의사의 일대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도록 드라마로 제작되고, 김 의사의 생가와 자결 순국현장이 독립운동사적지로 지정돼 후세들에게 나라사랑정신을 본받게 하는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전했다.#


서은옥 기자 seo0709@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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