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 초과이익공유제의 위험성을 나름대로 지적한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초과이익공유제가 가져올 해악의 심인(沈因)은 인간의 본성인 이기심(self-interest)을 부정하고 이기심을 탐욕심과 동일시해 도덕적으로 온당하지 않은 악덕으로 간주하는 데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기심을 말살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이기심을 말살하면 과연 좋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집단의 이익을 증대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개인의 이익은 부정되거나 그 가치가 절하될 수 없습니다. 설령 집단 이익 증대를 위해서라도 개인의 이익은 ‘초과이익’, ‘공동이익’의 명분으로 부정할 것이 아니라 존중해야 합니다.
개인의 이익 추구를 전제하는 이기주의는 이익 추구라는 점에서 집단의 공동 이익을 내세우는 목표가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정운찬 전 총리가 주장하는 ‘초과이익공유제’가 잘못된 이유는 바로 개인과 기업의 이익을 ‘초과이익’이라는 명분으로 집단의 공동이익으로 부당하게 환원하려 한 점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 개인이나 기업의 이익이 적정한지 아니면 초과이익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기심이 도덕적이라는 논거를 확인하기 위해 이기주의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먼저 검토해 보겠습니다.개인의 이익 무시하면 집단 이익도 감소
이기주의는 ‘심리적 이기주의(psychological egoism)’와 ‘윤리적 이기주의(ethical egoism)’로 나누어집니다. 심리적 이기주의는 ‘사람은 스스로의 이익 증진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고, 윤리적 이기주의는 ‘사람이 이기적으로 사는 것은 도덕적으로 온당하다’는 것입니다. 전자가 사실 진술이라면 후자는 가치 진술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학문적 논의의 대상입니다. 반면에 ‘세속적 이기주의(vulgar egoism)’는 편협한 이기심(selfishness)에 근거한 것으로서 학문적 논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일상적으로 ‘이기심’과 ‘이기주의’를 탐욕심으로 보면 악덕이 됩니다. 영어에서 ‘covetous’, ‘avarice’ 등이 세속적 이기주의를 지칭한다는 말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세속적 이기주의가 비도덕적(immoral) 개념이라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으로 이기주의는 비도덕적이고 이타주의가 도덕적이라고 간주합니다. 뿐만 아니라 윤리학에서도 ‘이타적’ 의미는 곧잘 ‘도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타적인 삶이 도덕적인 삶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기적인 동기와 목적을 무조건 포기하고 이타적으로 살라는 도덕 명제를 도출하고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기심을 이렇게 비도덕적인 것으로 폄하하면 개별행동이나 인간 활동, 문명의 발전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즉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심리적 이기주의와 이기적 행동이 결과적으로 도덕적으로 온당하다는 윤리적 이기주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인류 역사의 발전, 문명현상, 개인의 삶의 목적 등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얼핏 보면 인간발달이나 인류역사와 문명의 찬란한 전개가 개인의 이기심을 초월한 이타주의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는 상호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이기심에 근거해 이타심이 성립한다는 점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명제 ① : 이기심과 이타심은 배타적이다.
명제 ② : 이타심은 도덕적이다.
명제 ③ : 이기심은 도덕적이다.
명제 ④ : 이타심은 이기심에서 비롯된다(이기심은 이타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명제 ⑤ : 이기심은 이타심에서 비롯된다(이타심은 이기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가 가장 흔히 생각하는 바와 같이 이기심과 이타심이 상호 배타적이라는 명제 ①의 관점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기심’을 ‘세속적 이기심’과 동일시한 결과입니다. 명제 ①은 이기심이 비도덕적이라는 논거에서 심리적 이기주의와 윤리적 이기주의를 모두 부정해야 성립합니다. 그러나 심리적 이기주의와 윤리적 이기주의를 부정할 근거를 명제 ①은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는 상호배타적이 아니다
우리가 가장 쉽게 수긍하는 관점인 명제 ②는 ‘도덕성=이타심’의 도식에 근거해 있습니다. 이타심의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합니다. 이타적으로 사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삶이라는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설은 이 관점을 대표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타심은 선의지(善意志, good will)와 인간 존엄성(human dignity)에서 비롯되고, 이는 선험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도덕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관점이 심리적 이기주의와 윤리적 이기주의를 부정하는 근거를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설이 도덕적 행위자의 이익과 관련이 없거나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는 주장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간존엄성’이나 ‘선의지’와 같은 의무론적 윤리설의 주요개념은 행위자의 삶에 실질적인 이익이 되도록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따라서 명제 ②는 이기심을 전적으로 배격한 것이 아니라 이타심을 강조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자의 삶, 즉 이기적인 삶을 도모하는 윤리설이라고 볼 소지를 남겨놓고 있습니다.
명제 ③은 이기심이 도덕적으로 옳기 때문에 이타심은 옳지 못하다는 관점입니다. 이 점에서 명제 ③은 특히 심리적 이기주의 관점을 뒷받침합니다. 명제 ③의 관점은 이타적인 일체의 행위가 개체의 생존에 방해가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관점은 주로 진화론자들에 의해 개진됩니다. 진화론을 설명하는 자연선택론은 개체가 생존경쟁에서 이기려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이기심이 사람들의 교류를 규율하는 원리로 작용명제 ④의 관점은 윤리적 이기주의가 성립하는 논거를 제공합니다. 즉 이타심을 포함하는 일체의 도덕적 행위의 근원은 이기심에서 비롯된다는 관점입니다. 이 논점은 전형적으로 흄의 ‘동감(同感, sympathy)’에 입각해 정당화됩니다. 또한 명제 ④의 관점은 시장경제를 설명하는 논거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도살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의 자애심에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에 대한 이들의 관심에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가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성이 아니라 그들의 이익에 호소한다”는 아담 스미스의 명언을 명제 ④를 대표합니다. 이 말은 얼핏 세속적 이기심에 한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스미스는 이 말을 통해 ‘자기애’(self-love)가 사람들의 교류를 규율하는 원리로 작용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명제 ④는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利己]이 남도 이롭게 하는 것[利他]이라는 논점을 대표합니다.
마지막으로 명제 ⑤는 이타심이 종국에는 개인에게 이익을 가져온다는 의미입니다. 이 명제는 앞의 명제 ④와는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종교적 교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남을 돕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교훈이 그것입니다. 종교적으로 이타적 행위가 결국 자신의 이익으로 돌아오는 것은 현세의 경우일 수도 있고, 내세의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명제 ⑤는 명제 ④와 마찬가지로 이기와 이타가 모종의 관련을 맺는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러나 명제 ④에 비해 명제 ⑤는 교훈적이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 명제 ④가 동기부여에 유리한 반면에 명제 ⑤는 행위자의 측면에서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조적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명제를 검토한 결과 명제 ①을 제외한 네 가지 명제를 통해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서로 관련을 맺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명제 ②와 명제 ③은 우선순위가 이기심에 있는가 아니면 이타심에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습니다. 명제 ②는 이기주의를 세속적 이기주의로 보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윤리적 이기주의와 관련을 맺을지라도 이타심만이 도덕적이라는 관점입니다. 명제 ③만으로는 이기심과 이타심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논거를 찾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명제는 명제 ④와 ⑤입니다. 명제 ④의 입장에서 보면, ‘이타심은 이기심에 기인한다’는 논점은 집단의 공동 이익 추구를 위해서라도 개인의 이기심을 침해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논거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명제 ⑤는 사태의 본질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고로 명제 ⑤가 함의하는 관점, 즉 종교지도자나 도덕군자들이 ‘이타적 삶’만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하는 관점에 세심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자칫 ‘이타적 가치를 추구하려면 이기심을 존중해야 한다’ 또는 ‘이기주의는 이타주의를 포섭한다’는 명제 ④의 논점을 배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좌파들이 이기심을 폄하하는 이유
그러나 종교경전이 이타적 삶의 태도를 강조한다고 해서 이기주의를 부정하거나 폄하한다고 예단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교훈을 면밀히 살펴보면 종교적 가르침이 이기심과 정반대라는 우리의 상식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종교적 교훈 자체를 왜곡하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 박동운 교수의 저서 ‘성경과 함께 떠나는 시장경제여행’에 소개된 몇 가지 내용을 토대로 성경에 나타난 이기심을 중요성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박 교수의 책 제2부 제1장에서 세계 종교로 발전한 초기 기독교의 정신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CEO 정신이라고 강조합니다. 오늘날의 기업인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지도자들이 앞장선 것은 그들의 지도자적 자질 때문입니다. 얼핏 이타심으로 보이는 그들의 종교적 소신과 소명의식은 사실 그들 자신의 삶을 이끄는 이기심입니다. 그들의 소명의식이 결과적으로 많은 이들의 삶에 보탬을 주어 이타적으로 보일 뿐입니다.
둘째, 제2부 제2장은 기독교가 소유의 정신을 강조한 구약과 신약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가 공동체 정신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공산주의라고 선동하는 일부 그릇된 주장을 반박하는 좋은 논거입니다. 물론 기독교가 평등사상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공산주의와 다르다는 점을 이어지는 제3장에서 논파하고 있습니다.
셋째, 기독교가 법치와 자유를 존중한다는 점을 제2부 제6장과 제7장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영적인 자유만 아니라 자유인의 특권과 법치를 존중한 내용은 기독교를 사회주의화, 공산주의화, 집단주의화에 악용하려는 사악한 의도에 경종을 울립니다.
이렇게 볼 때 이타적 삶을 강조하는 기독교 정신의 밑바탕에 이기적 삶이 전제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남도 이롭게 한다는 명제 ④의 관점은 여러 입장에서 그 정당성이 확인됩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과 논어 헌문(憲問)편에 나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관점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기심을 부정하는 이타적 삶은 존립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기심은 개인과 사회발전의 원동력입니다. 부정해야 할 것이 아니라 존중돼야 합니다. 이기심은 자조(自助, self-help)정신을 길러주지만, 이타심을 위장한 탐욕심은 기생심리를 조장하고 의타심만을 길러줍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The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는 경구는 곧 인간의 이기심에 관한 교훈입니다. 종교적 이타심을 핑계로 이기심과 탐욕심을 동일시하는 논법을 좌파논객들의 선동과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의 포퓰리즘에 동원해선 안 됩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초과이익공유제’처럼 이기심을 부정하는 정책으로 혹세무민해 자유민주주의에 토대를 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전락시키도록 내버려 두어도 될까요.
김정래 편집위원·부산교대 교수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