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래 편집위원·부산교대 교수
우려할 만한 사회병리현상이 사회 전반에 은연중에 암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개인문제나 사회적 이슈가 발생하면 문제의 책임을 자신이 아니라 남의 탓으로 돌리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또 책임전가에 그치지 않고 문제 원인을 사회구조적인 것으로 보고, 이 모두를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타적인 생각이 그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21세기 대한민국이 100년 전에 유행한 마르크스와 프로이드의 빛바랜 원인분석에 집착해 회피하려는 상황에서 여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드의 그릇된 원인 설정이 사회병리가 된다는 시각은 런던대학의 피터스(R. S. Peters) 교수가 이미 1950년대 영국 BBC 방송 강연을 통해 개진했으며 그 내용은 ‘권위, 책임, 교육’이라는 저서로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마르크스와 프로이드가 제공하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그릇된 논거를 토대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리현상을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사회에 책임 전가하는 운명론자들
마르크스와 프로이드는 20세기 지성의 상당 부분을 지배한 인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의 공헌은 사회문제의 심층 원인을 밝혀낸 데 있다고 합니다. 사회문제 현상의 이면에 문제의 원인이 내재한다고 보고, 그 이면에 이를 조작하는 실체가 있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문제의 심층 원인으로 마르크스는 계층의 문제로, 프로이드는 유아기 무의식 속에 억압된 충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시각이 각광을 받은 것은 멀게는 17세기 이후 계몽의 맥락에서, 짧게는 19세기 말 실증주의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른바 ‘과학적인 설명’이라는 시대적 요청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심층 원인 규명은 과학적 합리주의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설정한 사회문제의 심층 원인이 쉽게 치유될 수 없는 그릇된 신념을 조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있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마르크스와 프로이드의 원인 분석과 처방은 자신들이 지향한다고 하는 과학주의 자체에 위배되는 모순을 드러냅니다. 마르크스의 해석은 사회문제의 원인이 계층 문제로서, 부르주아 계층의 착취를 통해 사회적 모순이 야기된다는 ‘결정론’입니다. 따라서 처방은 원인이 되는 요인의 제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에 공산주의 사회로 가는 자신의 변증법적 발전은 과학에 입각한 것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모순이 극에 달해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는 변증법적 발전이 필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사실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입증됐습니다. 20세기 초·중반에 공산화된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사회 이전인 봉건사회 단계에서 무력에 의해 공산화됐기 때문입니다.
과학주의는 모든 현상[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사고방식인 결정론(determinism)에 입각합니다. 마르크스는 자신들의 원인 규명이 과학주의에 따른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운명론(fatalism)에 빠집니다. 이론상으로도 그의 공산주의 도래는 실증과학에 입각한 결정론이 아니라 운명론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드가 낳은 병폐들프로이드의 이론도 마찬가지로 행위의 원인을 규명하는 결정론에 근거한 듯하지만, 운명론에 빠지게 됩니다. ‘정서적 문제아(mixed-up kids)’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해당 아이의 문제행동의 원인을 행위 발생 시점이 아니라 성적 충동의 억제, 부모의 강압과 같은 초기 유아기의 경험에서 찾습니다. 그러니까 문제아의 치유는 일종의 팔자(?) 타령에 해당하는 무의식이라는 심층에 근본 원인에 있다는 것이 프로이드의 처방입니다.
임상, 교육, 상담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은 이 견해에 동조합니다. 사실 문제행동의 상당 부분이 유아기에 억압된 무의식 때문입니다. 해당 아동의 과거력(歷), 가족력 등을 추수 조사해야 할 당위성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논거는 설득력 있게 실제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정론적 심층 원인을 규명한다고 하면서 운명론에 빠진 마르크스와 프로이드의 이론은 모든 문제의 책임을 사회구조와 남의 탓으로 돌리는 병폐를 낳았습니다. 빈곤과 같은 사회적 문제의 원인은 사회구조 때문이고, 삐뚤어진 성격은 가정환경과 부모가 무의식적으로 심어놓은 강압 때문입니다. 모두 남의 탓, 사회가 일그러진 탓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문제되는 행동의 원인을 잘 변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면하는 심리상태, 문제행동의 원인이 우리가 책임지지 못할 요인으로만 구성돼 있지 않습니다. 예컨대 게으름, 비겁함, 자기중심성, 정직하지 못함과 같은 요인은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요인입니다. 선천적 장애, 저지능, 성격의 구조적 결함 등의 문제와 구분돼야 합니다. 후자는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운 원인입니다.
빈곤 타파의 근본 해결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공산사회 건설에 있고 빈곤의 원인을 사회구조에 돌리는 마르크스의 논거가 운명론에 빠진 결정적인 근거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프로이드 분석과 달리 개인에게 귀착시킬 수 있는 문제행동의 원인이 있듯이, 일 안하고 게으른 개인의 그릇된 습관 때문에 가난하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빈곤의 원인이 되는 사회구조적인 요인을 줄이는 데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만, 모든 빈곤의 책임이 사회구조에 있다고 할 근거가 없습니다. 빈곤의 원인이 사회구조에 있다면, 경위야 어찌 됐건 과거 공산주의 국가에서 빈곤이 사라지고,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원인을 제공하는 자본주의 국가는 몰락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난 세기 역사는 정반대로 공산주의는 몰락하고 자본주의는 건재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백보 양보해서 모든 문제의 원인이 사회구조, 자라난 배경과 같은 운명론적 요인에 있다고 합시다. 그래서 모든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사회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합시다. 이런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첫째, 사람들은 일할 의욕도 없는 무기력한 사회가 됩니다. 개인은 기생심리에 의존하게 됩니다.
개인의 도덕적 판단이 부르주아의 것이라고?!요즈음 실업 문제나 빈곤 문제나 다 국가가 해결할 문제이고, 대기업의 착취로 사회가 불공정해진다는 의식이 팽배한 현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둘째,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기존 부르주아 사회의 세뇌 때문이거나 과거 부당한 압박의 산물이기 때문에 개인의 성취는 정당한 근거를 찾기 매우 어렵습니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참지 못한다’는 말이 통하는 현 세태가 이에 해당합니다. 셋째, 개인의 선택은 실종됩니다.
사회(국가)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개인의 선택을 말살하고 국가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경우가 우리 사회에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평준화 정책은 개인의 학교선택권을 말살하고 국가가 지정하는 학교에 가야 하는 사회주의 발상입니다. 넷째, 사회가 이렇게 답보 상태가 되면 ‘위대한 독재자’를 불러옵니다. 남의 탓으로 돌리고 사회구조가 잘못됐다는 타령에 입지가 좁아진 개인의 선택은 그나마 전체주의 체제 속에 함몰됩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드의 이론은 개인의 도덕적 판단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마르크스에게 도덕 판단은 유한계층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고, 도덕성의 근원은 부르주아 계층이 자신의 기득권을 영구 유지하기 위한 합리화(rationalization) 구실에 불과합니다. 교육학에서 널리 소개된 각종 ‘재생산이론(reproduction theory)’은 이에 근거합니다. 권위와 도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한 공산주의 사회 도래를 가로 막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좌파교육감이 학생인권조례제정과 체벌금지라는 그럴 듯한 명분으로 교권을 실추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편 프로이드에게 도덕 판단과 도덕성은 무의식 속에 내재한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개인의 도덕적인 판단의 근거를 찾기 어렵게 되고 도덕적인 책임을 질 일이 없어집니다. 프로이드의 이론 틀은 일부 정신질환이나 임상에 적용되지만, 건전한 개인의 합리적인 판단의 근거를 전혀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의 이론에 천착하면, 모든 사람은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없으므로 ‘타고난 팔자대로’ 살아야 합니다.
개인이 책임을 회피하고, 사회구조 탓, 국가책임으로 돌리는 운명론적 의식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리현상(malaise)이 됐습니다. 무상급식이 2010년 지방선거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은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책임을 회피하는 사회병리에 익숙해진 개인들이 자신의 책임은 회피하면서 책임회피의 합리화 방책으로 절대 선을 상정하고 거기에 자신을 은폐시킴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다 하고 있다는 이중성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 그 간명한 예는 북한 문제를 대하는 무책임한 태도와 통일교육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결정론적 심층 원인을 규명한다고 하면서 운명론에 빠진 마르크스와 |
북한문제에 눈감는 세대
현행 통일교육은 근본 방향부터 잘못 설정됐습니다. 평화 공존, 화해협력,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만을 강조하지,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 문제는 아예 다루지도 않습니다. 평화 공존과 화해협력은 중용의 의미를 심하게 왜곡시킨 사례입니다.
이 원칙은 적화전술에 매번 농락당합니다.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피살사건이 화해협력의 결과인가요. 쌍방이 공존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중도’니 ‘중용’을 언급하는데, 이는 중용도 아니고 중도도 아닙니다. 얼치기로 적당히 얼버무리는 부도덕한 작태(mediocre)입니다. 이 문제는 차후에 별도로 검토하기로 하겠습니다.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도 위장전술일 뿐입니다. 작년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이 이를 말해 줍니다.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에 대한 젊은 세대의 책임 회피 의식은 또 다른 심각한 사회병리현상입니다. 이른바 3-8-6세대와 젊은 20-30대들이 통일과 북한문제에 대해 반응하는 양상이 그러합니다. 통일은 민족 지상의 신성한 과제로 간주하면서도 당장 개인이 책임을 질 일이 아니라고 인식합니다. 특히 적지 않은 젊은이들은 북한 주민들의 절대빈곤, 기아문제나 정치수용소 수감자들의 인권 참상을 거론하면 애써 외면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북한인권 문제 집회 참가자들이 대개 50대 이상인 것은 이를 말해 줍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습독재가 실존하는 북한체제와 참담한 동포들의 실상 즉 북한 동포의 기아, 유린, 불법체포와 감금, 수용소 문제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수도 없는 개인의 상황을 핑계로 국가 책무로 돌리거나 기성세대의 잘못으로 간주합니다. 같은 동포 이전에 같은 인간으로서 느껴야 할 최소한의 도덕적 책임감마저 실종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민족지상이라는 허울뿐인 좌파 통일론으로 자기합리화하며 일종의 심리적 보상을 받고자 합니다.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에 대한 젊은 세대의 책임 회피 의식은 또 다른 심각한 사회병리현상입니다. 특히 적지 않은 젊은이들은 북한 주민들의 절대빈곤, 기아문제나 정치수용소 수감자들의 인권 참상을 거론하면 애써 외면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
게다가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과거 행적을 보면, 점입가경입니다. 수백만 명의 아이가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아동의 참상은 노골적으로 외면하면서, 남한에서 2-3명의 아동이 급식사고나 안전사고만 발생해도 시시콜콜 간섭하면서 교장을 문책한다는 둥 온갖 법석을 떱니다.
끝으로 일부 단체가 주관하는 북한 동포를 위한 풍선날리기 행사마저 반대하고 방해하면서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을 ‘태양절’이라 하여 원시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야만적 행패에 동조하는 일부 목사, 신부들에게 스스로를 ‘태양’이라며 우상화하는 패륜 세습정권을 옹호하라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베푸는 종교와 양심의 자유라고 항변하고 싶으면, 적어도 대한민국을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기본적 책무는 도외시하면서 어느 사회나 존재하는 문제를 들어 대한민국의 태생과 정체성 탓으로 돌리는 행태 역시 심각한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입니다. 무엇보다도 성직자를 자처하는 자신들의 정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종’인지 아니면 우상 숭배나 일삼는 사이비인지부터 명백하게 밝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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