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차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정의는 ‘차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 미래한국
  • 승인 2011.08.04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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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래 편집위원·부산교대 교수

김정래 교수의 세설직론

‘정의’, ‘사회정의’는 많은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빠져들게 하는 아주 매력적인 말입니다. ‘정의’를 ‘분배’, ‘공동체’, ‘이타적 삶’의 문제로 치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방식의 주장을 한 롤스(J. Rawls), 샌들(M. Sandel), 그리고 공동체주의자들이 집중적인 조명을 받습니다. 그 결과 은연중에 분배가 곧 사회정의이며,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잘 돼야 한다는 집단주의적 사고가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회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무상시리즈가 ‘사회정의’라는 미명 아래 합리화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정의의 본질이 왜곡되거나 실종됩니다. 따라서 다소 교과서적일지 모르지만, ‘정의(justice)’의 의미를 차분하게 짚어보아야 합니다.

‘정의’와 ‘사회정의’는 다른 개념

먼저 정의가 왜 필요한 것인가부터 보겠습니다. 이에 대한 논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의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간명하게 보면, 전자는 분배 문제와 관련되고, 후자는 개인의 인권 침해 같은 문제와 관련됩니다. 하지만, 정의는 본래 개인의 덕목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고대 희랍에서 개인적 덕목인 정의는 도시국가의 질서 유지를 위한 것으로 그 의미가 확대됐습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과 같은 분배 문제가 일차적 관심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보면 위의 두 가지 논거는 너무 단순해 보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논점은 ‘정의’가 개인의 권익을 떠나서 집합적인 의미로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지난번(제398호)에 지적한 것처럼 개인의 이익을 떠난 ‘공익’이 ‘신기루’인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정의’를 아무 생각 없이 ‘사회정의’와 동일시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다른 차원에서 ‘정의’는 법적 개념과 도덕적 개념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법의 집행과 적용이 엄정한가 하는 적법성으로 정의를 보는 것이고, 후자는 정의를 도덕적 개념으로 보는 것입니다. 도덕적 개념으로 본 정의는 ‘공정’과 ‘공평무사(impartiality)’를 가리킵니다.
법적 개념으로서 정의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법 앞의 평등’이고 다른 하나는 ‘형평’입니다. 법 앞의 평등은 법치주의의 핵심입니다. 권력을 지닌 정치인, 판사나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이 자의적으로 법을 적용하는 인치(人治)의 폐해를 막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법을 적용하는 인치는 정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인격성이라는 핵심 개념이 됩니다. 이 개념은 정의의 도덕적 측면과 밀접한 관련을 맺습니다.

당초 ‘형평’으로 번역되는 ‘equity’는 관습법 전통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즉 관습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편파적인 판결을 방지하고 법 적용을 가늠자 역할을 하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에 앞서 ‘형평’의 뜻을 이해하려면 산술적 평등과 비례적 평등을 구분해 보아야 합니다. 산술적 평등은 그야말로 산술적인 의미에서 똑같이 나누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에 반해 기하학적 평등이라고 불리는 비례적 평등은 사람들 간에 드러나는 여러 가지 차이를 고려해 비례적으로 분배하거나 사람을 처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형평은 기계적인 분배나 일률적인 처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평등의 원리를 이해하는 핵심적 개념입니다. 앞서(제396호) 소개한 ‘차이 있는 곳에 차별해야 한다’는 입장이 이에 해당합니다. ‘차이가 있는 곳에 차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정당한 차이, ‘합당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면 잠정적으로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당위가 성립합니다. 차이가 있어 보여도 차이에 합당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면 사람들은 한 범주에서 똑같이 대우해야 합니다.

"개인의 능력과 공과에 따른 차이를 존중하는 것, 경우에 따라서
능력과 공과에 따라 분리를 허용하는 것은 정의의 원리를 고려할 때
매우 중요한 핵심이 됩니다. 따라서 분리의 원칙은 차별의 원칙과
함께 정의의 중요한 준거가 됩니다."

동창회·향우회 가입 제한은 평등과 관계없어

 도덕적 개념으로서 정의에 해당하는 ‘공정무사’는 ‘법 앞의 평등’, ‘형평’과 같이 법적 개념에서 도출됐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법의 적용을 가리키는 법리적 의미만이 아니라는 뜻에서 도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실정법의 차원을 떠나 이 개념을 이해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원리를 형식적이고 논리적인 문제로 보는 입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원리를 실천적인 원리로 보는 것입니다. 개념상으로 보면 ‘impartiality’는 ‘fairness’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실천적 측면에서 두 말은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모두 ‘공정’이라고 번역합니다.

형식적 원리로서 공평무사는 엄정한 법 적용과 의미가 유사합니다. 법치와 합당한 차이에 따른 차별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관점에서 정의의 문제는 곧 형식논리의 문제, 합리성, 일관성의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형식논리나 일관성 규칙 적용이 곤란한 경우가 발생한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공정이나 공평무사의 개념을 실천적 원리 또는 윤리적 개념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칸트입니다. 그에 따르면 도덕 법칙은 종합적이지만 선험적인 원리를 준수해야 합니다. 그의 황금률이나 보편성, 보편화가능성 등은 생활 장면의 실제성과 함께 선험성을 통해 ‘인간존엄성’이라는 확고한 도덕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도출된 것입니다.

롤스의 ‘사회정의론’에서 공정성은 이 원리를 매우 형식적으로 정형화한 것입니다. 그가 칸트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선험성을 토대로 한 롤스의 공정성 원리는 한 개인을 다른 개인이 각기 추구하는 욕망과 이익과 똑같은 비중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형식 원리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그의 ‘원초적 지위’, ‘무지의 베일’ 등의 개념이 도출됩니다. 롤스의 사회정의론의 이론적 타당성은 나중에 별도로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실천적 원리로서 정의 원리인 공정성은 평등의 원리와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합당한 차이 있는 곳에 차별’에서 정의의 관점은 ‘차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이나 아동권리협약, 기타 중요한 권리 선언 문서에 따르면 차별은 철폐돼야 한다고 규정돼 있습니다. 그러나 차별이라고 해서 모든 차별을 무조건 철폐한다면, 그것은 평등의 원리에도 어긋나고 정의롭지도 못합니다. 인종이나 카스트 제도처럼 신분제에 의한 차별은 당연히 철폐돼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 기호나 성향에 따른 결사체, 동창회, 향우회 등의 가입 여부에 따른 차별은 평등이나 정의의 원리와 상관없는 것입니다.

차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분리 문제입니다. 과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처럼 정의롭지 못한 것도 있지만, 학생선발의 경우처럼 반드시 필요한 것도 있습니다. 예컨대, 가톨릭 재단에서 설립한 학교는 가톨릭 신자를 선발함을 원칙으로 해야 합니다.

개인의 능력과 공과에 따라 차등 안하면 전체주의로 전락

분리의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물론 인종과 신분에 따른 분리는 차별의 원리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종교에 따른 분리는 수용 가능한 측면이 있습니다. 종교계 학교 선택과 학생 선발 문제가 그 예입니다. 그리고 문중, 향우회, 동창회, 개인들의 결사체인 클럽에 따른 분리도 허용할 수 있습니다. 종친회와 같은 모임의 각종 혜택이 해당 회원이나 그 자녀들에게 돌아간다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목적에 따른 분리도 허용할 수 있습니다. 각종 이익단체의 활동을 일정 부분 정의의 한계를 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능력과 공과에 따른 분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회는 획일적인 잣대만이 잔존하는 전체주의로 전락합니다.

개인의 능력과 공과에 따른 차이를 존중하는 것, 경우에 따라서 능력과 공과에 따라 분리를 허용하는 것은 정의의 원리를 고려할 때 매우 중요한 핵심이 됩니다. 따라서 분리의 원칙은 차별의 원칙과 함께 정의의 중요한 준거가 됩니다. 차별과 분리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보는 것은 피상적이고 그릇된 것입니다. 오히려 학교선택권과 학생선발권을 동시에 부도덕하고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보고 원천 봉쇄한 평준화 정책은 이 점에서 도덕적이지도 못하고 정의롭지도 못한 정책입니다. 영국의 경우, 국.공립학교 외의 사립학교의 선발권은 애초 간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예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노동당 정부가 꾸준히 추진해 온 영국식 평준화 정책인 종합학교는 여러 가지 폐해 때문에 학교선택권 증진의 방향으로 교육정책이 선회하고 있습니다. 학교선택과 학생선발에 관한 문제는 별도의 방대한 검토를 요구합니다.

 
‘공정성’, ‘공평무사’를 핵심으로 하는 정의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기회균등과 분배입니다. 기회균등 문제는 지난번에 이미 다루었으므로 논의를 생략합니다. 분배의 문제는 세 가지 측면에서 고려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재능에 따른 분배이고, 다른 하나는 공과에 따른 분배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필요에 따른 분배입니다. 앞의 두 가지는 분배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으므로 결과적으로 기회균등의 문제로 환원됩니다.
문제는 필요에 따른 분배를 고려할 때 야기됩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보상받는다’는 마르크스의 강령이 대표적입니다. 이 강령은 다음의 논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첫째, 개인이 지닌 재능과 공과를 사유재로 보지 않고 공공재로 본 오류입니다. 전형적인 전체주의 전조가 여기서 싹이 틉니다.

거대 국가와 국가통제의 비극도 여기에 숨어 있습니다. 둘째, 사회생활에서 사적 영역이 돼야 할 모든 분야가 제거돼 공적으로 관리되는 오류를 범합니다. 이를테면 과학영재, 운동선수는 모두 개인의 능력발휘가 아니라 개인의 축복이 아니라 국가적 필요에 따라 요구되는 ‘인민의 영광’이고 ‘당(黨)과 수령(首領)의 은혜’가 됩니다. 셋째, 일체의 개인차가 무시됩니다. 따라서 개인의 자율과 책무성은 물을 수 없습니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침체되는 요인이 됩니다. 넷째, 모든 인간의 이기심을 묵살하고 이타적 인간을 전제합니다. 공산주의와 좌파 정책이 역사적으로 도태하는 가장 큰 심인(沈因)은 이처럼 인간 본성 자체를 왜곡하는 데 있습니다.

개인의 생존, 자유, 재산 보호 못하는 정의는 비도덕적

따라서 정의의 문제는 기회균등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보완적 조치로서 정의의 원리로서 ‘필요에 따른 고려’는 기회균등의 보완원리로서 작용해야 합니다. 이 때 필요는 인간의 기본적 생존에 요구되는 필요에 한정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생존, 자유, 재산을 위협하는 조치들이 나오게 됩니다. 어떤 경우이건 간에 개인의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지 못하는 정의 원리는 도덕적이지도 정의롭지도 못합니다. 만약 기회균등 문제를 떠나 분배 문제를 정의의 차원에서 고려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 필요 충족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져야 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무상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안전망(social safety net) 확보의 문제로 접근해야 합니다. 따라서 복지 영역 중 공공부조(公共扶助)를 사회 정의 차원에서 부각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또 복지의 원래 취지가 개인의 권익 증진에 있는 것이므로 온갖 무상 서비스를 정의의 이름으로 확대해석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서두에 지적한 바와 같이, 정의를 개인의 권익을 떠나 ‘사회정의’로 고려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논거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회자되는 사회정의, 공정은 분배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무상복지에 따른 동일한 분배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개인과 나라가 공도동망(共倒同亡)하는 전조는 정의 개념을 잘못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정의’가 법치를 확립해야 하고, 공정의 원리로서 획일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차별과 분리를 합당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모든 재화와 사회적 가치를 분배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보다는 기회균등의 틀 속에서 분배를 고려하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바르고[正] 옳게[義]’ 이해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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