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욕망하라” 20년 베테랑 외신기자의 노하우
아름답게 욕망하라” 20년 베테랑 외신기자의 노하우
  • 미래한국
  • 승인 2011.08.24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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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조주희 美 ABC뉴스 한국지국장

 
이화여대 재학 시절 “기자로 성공해 한국 최초의 여대통령이 되겠다”는 당찬 꿈을 안고 미국 조지타운대로 유학을 떠난 여대생이 있었다. 지금 정치인의 꿈은 접었지만 ABC뉴스 한국지국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언론계의 ‘스타’가 됐으니 첫 번째 꿈은 확실히 이룬 셈이다.

최근엔 20년 외신기자 생활의 노하우를 정리한 ‘아름답게 욕망하라’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제목대로 그녀의 외모는 마흔 셋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게 아름다웠고, 연세대 강사와 KBS ‘시사 투나잇’ 진행 등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자리를 거쳐 왔다. 이제 또 다른 목표는 무엇이냐고 물으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한숨 쉬고 가고 싶은 시기에요. 마침 방송업계가 경제적으로 타격이 심했잖아요. 그래서인지 기자들도 요새는 별로 바쁘지 않아요. 북한도 한동안 조용했고 이참에 조금 쉬면서 재충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욕심 많은 그녀, “이젠 조금 쉬고 싶다”

일 욕심 많은 그녀조차 ‘조금 쉬고 싶다’고 소원하는 게 기자생활인가 보다. 하긴, 하루 5시간 외에 온통 일에만 집중하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24시 대기모드로 20년을 살았다고 하니 납득이 간다. 직업의 특성상 위험한 지역을 찾아다니다 보니 생사의 갈림길에 선 일도 많았다고 한다. 탈북민들의 미얀마 대사관 입국 과정을 취재하다 당국에 소환될 뻔하기도 했고 추적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비행기에 오른 일도 있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과 관련돼 주목 받는 이슈가 바로 북한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한 순간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놓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은 국제뉴스의 중심이 절대 못 돼요. 우리나라가 외국에서 크게 보일 거라고 착각하는데 밖에서 봤을 때 그렇지 않아요. 그마나 현대, 삼성 때문에 조금 각광을 받기도 하지만 미국에선 삼성이 일본 회사인 줄 아는 사람도 많고 한국 회사라는 걸 아는 사람은 소수 엘리트들이죠. 그리고 북한문제가 있어요. 핵 미사일이 미국을 공격할 수 있다고 언론이 보도를 하니까요.”

이어 탈북민 문제에서는 여성과 아이들 문제가 제일 심각하다고 말했다. 최근 언론에 보도 돼 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탈북여성 매춘 문제’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몸을 팔며 매춘을 하느냐고 비난하지만 5일을 굶은 채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상황일 때는 밥을 먹고 싶은 욕구 밖에 없다며 오히려 안타까워했다. 반면 탈북자는 강하다 못해 독한 사람들이자 ‘가장 인터뷰 하기 힘든 상대’라고 정의 내렸다.

“탈북이란 건 난관이 많은 과정이거든요. 수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어 살아남은 사람들이 바로 탈북자들이에요. 당연히 독하고 강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이 때문에 인터뷰하기가 제일 힘들어요. 어느 누구나 그렇지만 상처가 많으면 자기 자신을 포장하거나 사실이 아닌데 있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기도 하구요. 다섯 명을 인터뷰 하면 얘기가 다 달라요. 인육 먹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고 못 봤다는 사람도 있죠. 탈북자의 경우 그 사람의 증언 말고는 확인할 방법이 없잖아요. 기자는 그 사실을 염두하고 구분해서 써야 하죠. 이제는 탈북자들을 너무 많이 만나다 보니 누가 진실이고 누가 거짓인지 알 수 있는 눈은 생긴 거 같아요.”

기자의 첫째 자질은 객관성

인터뷰 내내 조주희 지국장이 강조한 기자의 자질은 ‘객관성’이었다. 이슈화하기 위해 과장하거나 기자의 감정이 개입돼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강조했다.

“저는 제 개인적인 주관이 뚜렷해요. 지금도 제 머리 속에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개인적 의견이 있어요. 하지만 한쪽은 블랭크, 중립이에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중립으로 열어 놓고 진짜 제 생각은 친구들에게만 말하죠. 우리나라 기자들은 자기 생각이 뚜렷한 건 좋은데 기자는 자기 주관이 있으면 안 되거든요. 기사에 자신의 생각이 반영된다는 것만큼 언프로페셔널한 일은 없는 거에요.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없을 수는 없지만 잘 숨겨야지 표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주장을 하고 싶으면 논설위원이 돼야죠. 특파원으로 근무했던 워싱턴포스트의 사무실은 에디터들과 기자실이 확실히 구분돼 있었어요. ‘논조’라는 말은 에디터들 쪽에서나 나오지 기자실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에요. 만약 기자끼리 그런 종류의 말을 하거나 상사가 어떻게 쓰라고 지시한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참고로 워싱턴포스트는 절대 보수적인 신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자들이 자신은 리버럴하니까 그렇게 써야지 하는 사람도 없구요. 리버럴하게 쓴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물론 외신들도 기사의 이슈화를 위한 과장된 보도는 있다고 한다.

“어떤 외국인은 본사에 자신의 기사가 조금이라도 부각되게 하기 위해 과장을 하기도 해요. 북한이 국제사회의 이슈가 되는 것도 핵 미사일이 미국을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건데 사실 ‘할 수도’ 있는 거지 아직 모르는 거거든요. 사실이 아니더라도 써 버리는 경우도 있죠. 뉴스 조직 자체는 객관적이지만 기자들 개인까지 관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본인이 뭐라고 쓰든 본사에서 크로스 체크할 수는 없거든요. 한국인이 콩고나 아프리카 가서 사람들이 인육 먹는다고 쓴다면 우리나라 사람은 사실인지 확인할 길 없는 것과 비슷한 거에요. 저는 탈북자들을 너무 불쌍하게 보이게끔 묘사하지도 않고 너무 비판적인 시각으로 쓰지도 않으려고 노력해요. 특히 미국과 한국, 양쪽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오해가 없게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시각과 영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조주희 지국장은 이 원칙을 사망자가 넘쳐나는 재난 현장과 ‘남북이산가족 상봉’처럼 눈물 없이 보기 힘든 순간에까지 적용시키며 감정의 절제를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의 습관 때문인지 현재는 눈물이 없는 게 고민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트위터에는 책을 읽고 울었다는 글이 많다.

“책을 쓴 목적은 사람들 힘내라고, 동기 부여하라고 쓴 건데 왜 이렇게 울었다는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에요.”

이혼과 양육권 소송의 아픔

이번 자서전은 후배들이 똑 같은 질문을 계속 해오는 바람에 한 번에 정리한 일종의 ‘기자용 참고서’다. 똑 부러지는 베테랑 기자의 조언 중 어느 대목이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것일까? 아마도 조주희 지국장의 개인사를 밝힌 부분이 아닐까 싶다. 20대 초반, 부모님의 권유에 못 이겨 시작한 결혼은 2년 만에 이혼으로 끝났다. 친정 식구들에게까지 외면당한 채 시작한 7년간의 양육권 소송 싸움. 힘들게 승리했지만 사춘기를 맞은 아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며 밀어내자 아들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일만 하던 시절. 당시 몸무게가 38kg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게 한 그 사건을 빼놓고 남들이 흔히 말하는 ‘몸이 안 좋아져서, 피곤해서’라고 얘기만 하고 밝히지 않는다면 제 자신을 속이는 거 같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우리 사회에서는 이혼에 대해 말을 안 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의 경우 그 사실을 숨긴다는 건 제 아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거였어요.”

현재 스웨덴에 거주하는 아들과는 다정한 모자지간의 관계를 회복했다고 한다. ‘아메리칸 스타일’로 자란 덕에 사고방식이 자유로운 아이라며 미소 지었다. 그녀에게 아들은 하나지만 아이들은 여럿이다. 2007년 찍은 농협 CF 수입금 전액을 농촌 청소년을 위해 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고 이어 2011년에는 소셜네트워크 기부 시스템을 창안했다. 이때 인연을 맺은 아이들에게 지금까지 멘토 역할을 해주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기부에 대한 확고한 생각이 있었어요. 가족 같은 고아원을 만드는 게 제 꿈이었거든요. 똑똑하고 예쁜 애들 모아서 피아노도 가르쳐주고 공부도 시켜주고 싶었죠. 30대 후반인데 더 늦기 전에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지인이 충청도를 추천해 주시더라구요. 전라도나 경상도는 정치적으로도 기부금이 많은데 충청도는 그런 게 하나도 없어서 8도 중에 제일 가난하대요. 그래서 충청도 관내 교육청에 얘기해 장학생을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뽑아서 제가 계획한 스케줄을 제안했어요. 제가 기자다 보니 의심이 많아서 기부금에 대한 의심도 많았거든요. 다행히 투명하게 잘해 주셨어요. 아이들 뽑아서 미국에 갔는데 그 스케줄도 다 제가 짰어요. 아이비리그 구경 시켜주고 공부하는 후배들한테 연락해서 상담도 하게 해줬죠. 그 후에도 매년 아이들과 여름, 겨울 두 번씩 만나요. 같이 MT도 하고 수족관도 가고 서점에 가서 책도 사주고.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도와주고 싶어요. 그 아이들 14명 중에 한 명은 서울대, 두 명은 카이스트, 두 명은 한양대 장학생, 나머지는 지방대 장학생으로 갔어요.”

정치는 봉사하는 자리, 자신 없어

오랜 기자 생활에 사회를 보는 눈도 생겼고 기부 정신에 대중적인 인기까지, 어렸을 적 꿈이었던 정치의 길을 걸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정치가 봉사의 자리라는 걸 이제는 알아요. 저는 무엇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레프트다 라이트다 정치적인 입장도 딱히 없어요.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제는 있지만 어떨 땐 굉장히 진보적이고 어떨 땐 보수적이에요. 또 정치를 한다는 건 제 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거잖아요. 전 골프도 좋아하고 여행도 좋아하는데 우리나라에선 공무원, 국회의원이 골프 치는 게 아직까지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잖아요. 이제는 속도를 줄여서 천천히 가고 싶어요. 더 하고 싶은 일은 없고 제가 원했던 꿈은 거의 다 이룬 거 같아요. 예전에는 주변이 모두 일이었어요. 이제는 식구와 친구들과의 관계에 좀 더 중점을 두고 싶어요. 내가 원하는 거 이뤘다고 해도 같이 축하해주고 함께 할 사람이 없다면 무의미하죠. 다만 남북관계에 큰 변화가 오면 제가 그 시기를 잘 넘어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아마 제 인생에서 제일 바쁠 시기가 될 것 같지만 그거 하나는 각오하고 있어요.”     

조진명 기자  jaduj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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