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진화과정을 소프트웨어 버전(version)처럼 단계에 따라 숫자를 붙일 때 네 번째에 해당한다는 뜻. 자유방임의 고전자본주의(1.0),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케인스가 내세운 수정자본주의(2.0), 1970년대 시장의 자율을 강조한 신자유주의(3.0)에 이어 등장했다. 시장의 기능을 존중하되 기업 등 시장 참여자의 사회적 책임과 ‘다 같이 행복한 성장’을 중시하는 ‘따뜻한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 진화과정 아닌 正·反·合 변증법적 과정일 뿐
조선일보의 ‘자본주의 4.0’ 버전은 아나톨 칼레츠키의 저서 ‘자본주의 4.0’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책은 ‘자본주의’가 진화하는 실체로 보고, 네 가지를 상정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자본주의 1.0은 미국·프랑스의 정치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시작돼 대공황과 함께 막을 내린 전통적인 자유방임 자본주의이며, 자본주의 2.0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영국과 유럽의 복지국가 개념을 포괄하는 정부 주도의 수정자본주의입니다. 이어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위기가 발생한 후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의 자유시장 혁명으로 탄생한 것이 자본주의 3.0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저자의 자본주의 ‘진화과정’ 설정은 진화가 아니라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입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 3.0의 시대엔 언제나 시장이 옳고 정부가 잘못됐다고 여겨지고, 자본주의 2.0 단계에서는 언제나 정부가 옳고 시장은 잘못됐다고 상정합니다. 이와 같은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면서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자본주의 4.0’이라고 봅니다. 변증법적 필연성을 전제합니다.
자본주의 4.0 단계의 출현을 변증법적 전개과정으로 보는 것은 “새로운 자본주의 시대 가장 큰 특징은 정부와 시장 모두 잘못될 수 있고, 때로는 이런 오류가 거의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있다”는 저자의 주장을 바탕으로 합니다. 문제는 4.0의 출현이 역사적인 필연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4.0’은 변증법의 성질상 ‘자본주의’가 아니어야 합니다. 또 “이렇게 하면 정치와 비즈니스의 모든 영역에서 이전 자본주의 버전에서는 받아들이기 꺼렸던 개념들인 리더십·창조력·실험정신을 발휘할 여지가 생긴다. 정부와 시장이 모두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가 자본주의 3.0의 시대처럼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협력하는 관계임을 뜻한다”는 저자의 설명을 보면, 4.0 버전은 변증법적 전개에 치중한 나머지 자본주의가 아닌 것을 자본주의로 둔갑시키는 ‘의사(擬似)자본주의’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 노른자인 시장을 부정하면서 자본주의 4.0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르긴 해도 요즈음 회자되는 ‘공생(共生)’, ‘상생(相生)’의 기조 때문인 듯합니다. 자본주의 4.0의 상생, 공동발전이라는 측면은 조선일보만의 의도가 아니라 현 MB정부의 후반기 국정노선에 맞닿아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은 제66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사회적 격차를 줄일 수 있는 경제발전을 통해 기존의 시장경제가 새로운 단계로 진화해야 한다… 시장경제의 새로운 발전모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균형과 형평이 전제된 지속가능한 성장’, ‘성장과 삶의 질 향상’, ‘국가발전과 개인발전이 동행하는 새로운 발전체제’ 등 상생의 기조 위에서 양극화해소를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국정기조가 ‘자본주의4.0’ 버전에 근거하고 있음은 “이 대통령과 청와대는 경제성장 과정에서 소외된 계층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최근의 ‘자본주의 4.0’ 움직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청와대 핵심 관계자의 발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현 정부의 후반기 국정기조와 맞아떨어지는 ‘자본주의 4.0’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인 조선일보의 연재로 확산돼 가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4.0’은 변증법적 전개 과정을 답습하다보니 자본주의 핵심인 시장의 자생적 기능을 부정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핵심인 시장의 자생적 기능 부정
‘자본주의 4.0’ 버전에 따르면, 양극화 심화로 ‘자본주의 2.0’처럼 정부의 역할과 영향력 증대를 인정해야 하고, 동시에 패러다임 변혁(paradigm shift)으로 야기되는 불확실성의 증대와 예측불가능의 복잡성 등은 정부가 해결하기 불가능해 다시 ‘자본주의 3.0’ 버전을 담아야 하는 양가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시장이 불확실성에 대한 신뢰는 확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시장의 기능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하는 ‘돌연변이’가 탄생하게 됩니다. 시장이 만능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따라 움직이는 자생적 질서이기 때문에 늘 의도한 결과 도출을 바라는 쪽에서 보면 시장이 불확실성의 주범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4.0’은 작명(作名)부터 잘못됐습니다. 자본주의가 변증법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가 시행착오를 거쳐 변형돼 온 것입니다. 이를 마치 형태를 달리하는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것처럼 설정했기 때문에 이 같은 작명이 나온 것입니다. 실제로 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 19세기 이후 나타난 ‘새로운 자유주의(new liberalism)’,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libertarianism)’로 진화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진화과정은 변증법적 전개과정이 아니라 시행착오의 과정입니다. 이 세 가지는 칼레츠키와 조선일보가 소개하는 ‘자본주의 1.0’, ‘자본주의 2.0’, 그리고 ‘자본주의 3.0’에 상응합니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17~8세기 개인주의와 민권사상의 초석을 마련한 홉스와 로크의 사상과 이기심에 기초한 아담 스미스의 자유시장 원리가 그 핵심입니다. 특히 로크의 ‘생명’, ‘재산’, 그리고 ‘자유’라는 개인적 가치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점은 이미 소개한 바 있습니다(제395호 세설직론). 이 고전적 자유주의가 바로 ‘자본주의 1.0’에 해당합니다.
‘새로운 자유주의’는 사이비 자유주의이러한 고전적 자유주의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변색되기 시작합니다. 즉 자유를 향유하는 주체로서 ‘개인’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전체’와 ‘집합’의 의미를 부각시킨 19세기 ‘새로운 자유주의’는 ‘진보사상’을 잉태합니다. 현재 미국에서 자유주의를 가리키는 ‘liberal’이 ‘진보’와 동의어인 것은 이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진보로 포장된 ‘새로운’ 자유주의는 여러 가지 요인의 결정체입니다. 멀게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박애(fraternity)’ 정신에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으며, 19세기에는 영국의 공리주의와 독일의 관념론의 영향을 받은 결과입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의 국가독점은 19세기 사회주의 사상 형성의 씨앗이 됩니다. 공리주의는 벤담의 유명한 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서 알 수 있듯이, 공리주의 효용을 자유의 주체인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의 총량에 비춰 가름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독일의 관념론적 전통은 국가의 법체제가 도덕률에 정합(整合, coherent)해야 하며, 이 관점에서 국가의 의무가 강조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헤겔의 ‘절대정신’이 기여합니다. 독일의 관념론은 자유의 의미를 ‘개인’에서 ‘집합’, ‘전체’로 부당하게 이월시켜 ‘자유’는 더 이상 개인의 구체적인 일상사와 무관한 개념이 돼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변형된 19세기 자유주의는 마르크스의 영향으로 오늘날 좌파 노선 색깔을 드러내고, 국가사회주의로 변질됩니다. 다른 한편 19세기 자유주의는 진화론에 의거한 사회유기체설의 영향을 받아 홉슨, 홉하우스 등의 사상과 듀이와 미드로 대표되는 미국의 진보주의로 발전하고, 20세기에 이르러는 사회적 복리나 분배의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됩니다.
그 과정에서 나온 대표적인 것이 1971년 롤스의 ‘사회정의론’이고, 1980년대 이후 롤스를 비판 대상으로 한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가 대두됩니다(제394호 세설직론). 롤스의 정의론과 맥킨타이어, 샌들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주의가 논의 전개상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주의 본령을 부정한 점에서는 동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일련의 흐름이 ‘새로운 자유주의’를 형성했으며, 이에 상응하는 것이 버전 2.0의 수정자본주의입니다. 그러나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은 자유주의 진화과정에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이들은 심지어 개인의 ‘자유’를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현상을 시정하고자 하는 사회공학적 기획을 시도합니다. 이는 데카르트의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의 이성에 대한 과도한 맹신은 진보좌파의 장밋빛 ‘이상향’을 설정하고 전체주의를 초래해 인류에게 크나큰 불행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같은 중차대한 시행착오 때문에 ‘자본주의 2.0’에 상응하는 ‘새로운 자유주의’를 자유주의 본령에서 벗어난 의사(擬似)자유주의로 보는 것입니다.
진보적 복지정책의 비효율성, ‘큰 정부’가 갖는 도덕적 오만함, 사회공학적 합리주의가 갖는 치명적 결함 등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선두에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이 있습니다. 특히 하이에크의 ‘치명적 자만’은 이러한 ‘의사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정책들의 비효율성뿐만 아니라 비도덕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본령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libertarianism’이라는 용어가 탄생합니다. 이것이 목하 관심사인 ‘자본주의 3.0’에 해당하는 자유주의입니다.
빈부격차는 시장의 탓 아닌 문명 패러다임 변혁에 기인
그러면 ‘자본주의 4.0’ 출현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언필칭 ‘신자유주의’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3.0’이 양극화와 불확실성을 초래했다고 보고 ‘상생’, ‘공생’, ‘공동발전’ 등을 내세워 ‘자본주의 4.0’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버전의 수용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와 우려를 낳습니다. 첫째, ‘자본주의 4.0’ 버전 탄생은 변증법적 사고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만약 변증법적 사고의 결과라고 한다면, ‘자본주의 4.0’은 변증법의 성격상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버전은 유독 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노른자인 ‘시장’의 기능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4.0’은 자본주의도 아니고 자유주의의 한 형태는 더 아닙니다. 둘째, 버전 3.0에서 야기된 양극화와 불확실성은 자유주의나 시장의 탓이 아니라 문명의 패러다임 변혁에 따라 나타난 것입니다. 사회구조가 산업화 패러다임에서 정보화 패러다임으로 전환된 상태에서 최근 세계 IT 산업의 지형변화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가지 변수가 불확실성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양극화와 불확실성이라는 병리현상의 치유는 ‘자본주의 4.0’처럼 자본주의 변종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사회안전망 확충에서 찾아야 합니다. 셋째, 자본주의 4.0이 버전 3.0의 부정이라는 도식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 도식은 변증법적인 것으로서 버전 2.0이 버전 1.0의 부정이듯이, 버전 4.0은 버전 3.0의 부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식으로 이해한다면 버전 2.0이 시장의 부정으로 나타났듯이 버전 4.0 역시 시장의 부정으로 나타난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은 곧 버전 2.0이 사회주의 좌파 노선과 결합됐듯이, 버전 3.0을 부정한 버전 4.0도 시장을 부정하고 좌파 노선과 은연 중에 결합해 여러 폐해를 낳는 우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넷째, 자본주의 4.0을 ‘따뜻한 자본주의’로 표현하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를 호도합니다.
원래 비인격적 대상을 인격적으로 과도하게 비유하면 그 본질을 왜곡하게 됩니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분배적 기능은 따뜻해 보이지 않고, 인위적 분배기능을 강제하는 사회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가 오히려 훨씬 더 따뜻해 보입니다. 정말 ‘따뜻한 공산주의’에 동의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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