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은 지난 8월 30일 저녁 여의도 내 식당에서 가진 간담회에서 최근 수 년간 ‘자원외교 특사’ 신분으로 남미,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지역 12개국의 각국 정상을 23번이나 만나며 펼친 활동을 설명했다. 이 의원의 이러한 활동은 그가 최근 펴낸 저서 <자원을 경영하라>에도 생생히 담겨 있다.
말이 특사지 자원을 확보해야 하는 입장으로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권위적인 정부 관료들 비위를 맞추며 협상해야 하는 일은 국가의 미래를 건 전쟁이자 치열한 비즈니스였다. 각 나라에서 각종 지원과 특혜를 약속하며 달려드는 상황에서 자원국의 입장은 아쉬울 게 없는 이른바 ‘갑’의 위치였고 이상득 의원은 옷차림부터 단어 하나하나까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야 하는 ‘을’의 위치였다. 동생 이명박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대기업 CEO 출신으로서 그의 경험과 노하우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요인이기도 했다.
형님 외교’ 오해받으며 12개국 정상 만나 외교 난제 해결
“제 성격이 꼼꼼한 편이라 치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았어요. 기내에서까지 자료를 붙들고 씨름하고는 했지요. 기본적인 브리핑 자료 외에도 협상할 상대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함께 떠난 팀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원하는 것과 그의 스타일을 안 뒤 맞춰줘야 저희 쪽에서 원하는 제안을 수용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죠.
예를 들어 남아공의 주마 대통령은 카리스마가 뛰어나고 호탕한 스타일이라 세부적인 안건을 얘기하기보다는 거시적으로 접근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세세한 언급을 피하고 주마 대통령이 성과를 올렸던 코펜하겐 기후변화협약 사례를 칭찬하며 치켜줬고 그 다음에 저희가 원하는 원전 이야기를 꺼내자 흔쾌히 협력해줬습니다.”
외교문제에서는 한 순간의 순발력도 중요하지만 세 번, 네 번 씩 찾아가며 ‘삼고초려’의 공을 들여야 할 때도 있다고 한다. 전 세계 리튬 매장량의 1/3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볼리비아의 우유니 호수 개발권을 따내기 위해 모랄레스 대통령을 세 번씩 찾아가며 설득한 경우다. 당시 볼리비아는 대선 정국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은 선거 유세로 정신이 없었고 자원문제를 협상할 여유가 없어 보였다고 한다.
이 의원은 상황을 역이용했다. 국제협력 분야의 실적 부재로 야당에게 공격 받는 대통령을 위해 모자보건소 건립을 추진하고 이를 대통령의 대외관계 홍보용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바쁜 일정에 짬을 내기 어려운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몇 시간이고 기다리다 퇴짜 맞기를 거듭한 결과, 협상에 성공해 일본, 프랑스 등을 제치고 세계 최초로 우유니 호수의 염수 샘플을 받아냈다. 리튬 공동개발 체결을 기념하는 우유니 호수의 샘플 소량은 지금도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다고 한다.
치밀한 사전답사와 끈질긴 노력조차 통하지 않는 나라도 있었다.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의 오해가 쌓인 브라질의 경우, 화려한 프리젠테이션과 끈질긴 설득에도 냉랭한 반응만 돌아왔다고 한다.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 우리나라 기술의 우수성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관리들은 형식적으로만 긍정할 뿐 표정과 속내가 달라 보이는 거에요. 내 태도가 불손했던 건 아닌지, 요점을 잘못 짚은 것은 아닌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왔는데 한 가지 이야기를 듣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10년 전 브라질에서 한 교포 사업가가 크게 사기를 치고 달아났다고 해요. 오래 전 사건이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서구 열강들의 지배와 수탈을 당하며 자원을 빼앗겼기 때문에 외국에 대한 배타적인 인식까지 겹쳐 저희를 불신했던 것이죠.”
결국 브라질에서 큰 소득이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 경험을 이후 페루에서는 한국도 오랫동안 식민 지배를 겪은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는 전략을 펼칠 수 있었다.
“동병상련의 실수요자라는 것과 대한민국이 투기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가가 아니라 건전한 소비국가임을 피력했지요. 사실 페루는 자원이 넉넉함에도 불구하고 가스액화시설을 갖추지 못해 아까운 천연가스를 공중에 날려 보내고 있었어요. 이를 고려해 에틸렌 공장을 짓겠다는 조건도 내걸었습니다. 그러자 페루의 가르시아 대통령은 마음을 열고 호의를 내비치며 파격적인 접대를 해줬습니다. 상호주의 원칙이 통한 것이죠.”
이 의원은 기업의 CEO 시절 익힌 비즈니스 철칙에 따라 주고 받는 관계의 상호주의 원칙에 따랐기에 더 많은 협상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각국을 방문할 때 가장 앞세운 것이 상대의 이익을 찾는 것입니다. 협상의 성공 여부는 상대의 이익을 간파했느냐 못 했느냐에 달려 있죠. 실리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멕시코에는 ‘삼성을 이용하라’고 충고하듯 제의했습니다. 당시 멕시코 방문 목적은 FTA 협상 재개였는데 멕시코 측에서는 한국과의 자유 무역 시 적자폭이 커진다는 이유로 FTA에 소극적이었죠.”
FTA 협상 재개 소극적이던 멕시코 설득
이 의원은 이 자리에서 “두 나라간의 무역 불균형이 문제가 아니다”고 강조하며 국제 입찰 참여를 제한 받고 있는 삼성엔지니어링을 언급했다.
“그러자 인프라 프로젝트의 결정권자 중 한 명인 멕시코의 장관은 ‘본색을 드러내는구나’하는 표정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삼성이 입찰할 경우 멕시코가 얻는 이익을 설명했습니다. ‘삼성이 낙찰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기간도 어긴 적이 없고 공사 품질과 사후관리도 세계 최고 수준이며 자타가 공인하는 일류기업 삼성이 사업에 응찰한다면 외국 기업도 경쟁심이 생겨 가격을 낮출 것이다. 공사 수주에 있어 외국 기업은 어느 나라보다 한국 기업을 가장 두려워한다. 우리나라 기업이 참여하면 아마 10% 정도 다운된 가격을 제시할 것이다. 5%만 내려도 9억 달러는 절약할 수 있다’고 조목조목 합리적으로 얘기하자 장관의 표정이 달라지면서 수용하는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외교 사절단이나 겪기 마련인 ‘문화적 차이’로 인한 난관도 많았다. 특히 이 의원이 방문한 나라는 주로 사회주의 국가로 국민성과 정치 상황이 우리와 다르고 특이한 곳이 많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국가 간의 뛰어넘기 힘든 간극이었다.
“저에게는 자원외교 특사로서 경제활동에 관한 책임도 있지만 국가 간의 틀어진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 임무도 있었습니다. 국가 간에 벌어진 정치 문제는 보복성 조치로 인해 피해가 크기 때문에 경제적인 자원 문제보다 더 중요했지요. 그런 점에서 투르크메니스탄을 방문한 것은 시의적절했습니다.
이때 쌓아둔 경험이 이후 리비아 사태를 해결하는 바탕이 됐고 2010년 방문 당시 투르크메니스탄의 한국에 대한 감정이 굉장히 안 좋았으니까요. 발단은 2008년 당시 우리나라 국무총리가 기업인들과 함께 투르크메니스탄을 방문해 자원 개발과 경제협력에 대한 합의 체결이 잘 되지 않았던 것이죠. 당시 국내 언론에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도 대통령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여러 가지 오해가 쌓여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중앙아시아 국가 위신 세워줘 가스·석유 도입 원활하게 추진
투르크메니스탄은 ‘가스 위의 제국’이라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가 100년은 쓰고도 남을 자원이 매장돼 있는 나라다. 웃돈을 얻어주면서도 온갖 눈치를 보며 중동국가에서 원유를 수입하는 우리나라로서는 기회의 땅 그 자체였던 것이다.
“특사인 저로서는 국가의 위신과 직결된 문제라 함부로 사과할 수도 없는 한편 상대의 마음도 풀어줘야 했습니다. 절묘한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지요. 다행히 생각보다 우호적으로 대해줘 저는 상대의 위신을 세워주는 정도로 마음을 풀어주고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호텔방에서 본 외국 휴지통을 떠올리고 원유 수출에만 제한하지 말고 다른 산업을 시작해보라고 권유하며 도움을 주겠다고 얘기했지요. 다행히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일정은 아제르바이잔이었다. 이 의원 일행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겨 별다른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한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과거 한국의 재벌기업과 MOU를 맺었지만 몇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 실망하다 못해 다들 화가 나 있는 상태였습니다. 한국기업으로서는 생각보다 수익성이 낮아 사업성이 떨어지고 MOU가 법적인 조항도 아니라 추진을 하지 않은 것인데 여기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사항이자 약속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특히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상 정부가 관련돼 있으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라고 여기는데 당시 MOU 체결 당시 한국 정부 인사도 배석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기대가 컸던 것이죠. 더욱이 이슬람 국가라 의리와 믿음을 굉장히 소중히 여깁니다. 배신행위에 대해 용서치 않고 특히 자존심을 건드리면 용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친한파’로 불리던 사람조차 한국과의 관계를 끊겠다고 하는 지경이었죠.”
이상득 의원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준비하지 않았던 외교통상부 담당자에게 화가 났지만 당장은 분위기 전환이 우선이었다.
“상대에게 정식으로 사과하고 한국의 신용을 회복하는 방법 뿐이 없었죠. 저는 아제르바이잔의 담당자들을 만나며 사과한 후 현 대통령의 아버지이자 이 나라의 국부로 불리는 전 대통령의 묘소와 어머니의 묘소를 참배하는 등 성의를 보였습니다.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마음을 나누며 운을 띄우자 마음이 많이 열린 듯했죠. 한국에서는 아제르바이잔과는 달리 기업과 정부가 수평관계라는 것도 설명해 주고 오해를 풀도록 노력했습니다. 결국 대통령은 ‘양국 관계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는 생각지 않는다’며 국영 석유회사 사장을 소개시켜 줬고 그간의 섭섭함을 푸는 눈치였습니다.”
지난해 6월 발생한 한·리비아 갈등 사건으로 그의 외교특사 임무는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주리비아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던 국가정보원 소속 직원이 스파이 혐의로 추방 당한 뒤 한국인 2명이 불법 선교 혐의로 억류되자 문제가 심각해졌다. 비자 발급 등 영사 업무가 중단돼 현지 진출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게 됐고 이 의원이 긴급히 특사로 파견됐지만 당시 최고지도자였던 카다피를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카다피를 만날 기회를 얻었지만 카다피는 외국 정상이라고 해서 전혀 개의치 않는 걸로 유명합니다. 강대국의 정상에게도 약속 장소나 시간을 미리 알려주는 법이 없고 심하면 서너 시간씩 기다리게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의원 일생은 언제 연락이 올지 몰라 사전 준비를 다각도로 진행하고 있었다. 카다피에 대한 호칭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최고의 호칭인 ‘왕 중 왕’이라고 부르기로 정하고 억류된 한국인에 대해 언급할 때도 카다피를 자극할 수 있는 억류, 구속, 감극 같은 뉘앙스의 단어를 피하기로 했다.
카다피와 만날 때 예민한 용어 사용 자제
“카다피 측 사람을 따라가 보니 황량한 벌판에 세워진 엄청난 크기의 텐트였습니다. 다행히 카다피를 10분 안에 만날 수 있었고 준비된 시나리오대로 진행해 나갔습니다. 저뿐 아니라 그 또한 이번 만남을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듯 자신의 요구를 펼쳐나가더군요. 그는 리비아의 핵 포기 문제에 대해 우리가 미국과 가까운 점을 이용해 보상을 대신 요구해 달라고 했습니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함부로 말할 수도 없는 사안이라 완곡하게 거절하자 이번에는 리비아 원유를 구매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습니다. 상대가 당황할 정도로 불시에 요구를 꺼내는 그가 무서울 정도로 냉철해 보였지만 ‘호랑이 굴에 잡혀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을 떠올리며 귀국 후 검토해 보겠다고 에둘러 대답했습니다. 그는 제 말이 끝나 때마다 ‘슈크란!(고맙습니다)’이라고 가슴을 치는 동작과 함께 답했습니다.”
이 의원은 대사의 본국 ‘송환’을 ‘휴가’라고 돌려 말해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썼고 한국 국민 ‘구속’을 ‘구금’이라고 바꿔 말해 법적인 문제로 끌고 가지 않도록 표현했다. 결국 그는 모든 일에 합의했지만 ‘한국은 불교인이 가장 많다면서요?’라는 이 의원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저에게는 그 말이 ‘불교인이 대다수인 한국으로서는 기독교인을 풀어준다 해서 국민들이 감사하겠느냐’는 반문으로 들렸습니다. 때문에 ‘불교인도 많지만 기독교와 가톨릭 인구도 많으니 선처를 베풀어주시면 종교를 넘어 전 국민이 감사해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결국 협상이 타결돼 한국인 2명이 석방되고 리비아 영사 업무도 재개됐다. 일부 언론에서는 ‘형님 외교’라고 비꼬며 대우건설과 현대건설 등 리비아에 진출한 민간회사가 신문광고를 통해 이상득 의원에게 감사를 표한 일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 의원이 외교특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는 평가였다.
조진명 기자 jaduj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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