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스포츠 강국 대한민국의 위업
[이슈] 스포츠 강국 대한민국의 위업
  • 미래한국
  • 승인 2011.09.21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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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동계올림픽·월드컵·세계육상대회 개최 그랜드슬램 달성… 경기력도 정상급

9일간의 경기를 끝마치고 지난 9월 4일 폐막한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한국 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을 쾌거였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번 대회는 46만4381장의 입장권 판매로 2007년 오사카 대회와 2009년 베를린 대회를 압도했다. 좌석 점유율도 90.77%에 달했다.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우사인 볼트(자메이카)는 200미터 달리기와 400미터 계주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월드스타임을 입증했다. 세계 육상팬들의 시선이 대구로 집중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 선수들이 메달 획득에 실패한 부분은 아쉬웠지만 아직 육상 부문에서 세계의 벽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망보다는 많은 과제를 남겨준 대회였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하계올림픽, 동계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세계 4대 스포츠대회로 손꼽힌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도 이번 대회를 계기로 육상 중흥의 기반을 다졌다고 볼 수 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2전 3기의 영광

 

앞서 7월에는 숙원이었던 동계올림픽 유치 성공이 있었다. 2010년 7월 6일 밤 12시 20분(이하 한국시각)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진행된 제123회 IOC총회에서 평창은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됐다.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은 개최지 결정 발표용지에 적힌 '평창 2018(PYEONGCHANG 2018)'을 펴보이며 '피옹창'을 외쳤다. 세 번에 걸친 힘겨웠던 도전이 성공으로 끝난 것이다.

결과는 1차 투표에서 끝났다. 평창은 95명 IOC위원 중 63표를 획득해 25표를 얻는 데 그친 뮌헨과 7표를 얻은 프랑스 안시를 여유 있게 제쳤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아시안게임(1986년, 2002년), 하계올림픽(1988년), 월드컵(2002년)에 이어 동계올림픽까지 개최하는 영광을 누렸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이은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최는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한 대한민국의 위상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사례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올림픽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전쟁과 가난으로만 알려졌던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세계만방에 알린 기회였다.

특히 냉전 시절 치러졌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LA 올림픽에서 서로 참석하지 않았던 자유-공산진영 국가들이 88 서울올림픽에는 모두 참석해 더욱 의미가 컸다. 서울올림픽의 공식 주제가인 ‘손에 손 잡고’(Hand in Hand)가 당시 세계인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시 올림픽 개최지였던 서울을 지켜본 세계인들은 그동안 발전된 한국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이후 소련, 동유럽 등 동구권의 공산국가들이 붕괴했다는 점에서도 서울올림픽은 냉전을 종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기력에서도 세계 정상급 수준

88년 서울올림픽이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의 선두로 올라선 대한민국의 위상을 보여준 대회였다면, 2002년 월드컵은 선진국 문턱에 도달한 대한민국을 자랑할 수 있는 계기였다. 제17회 2002년 월드컵은 아시아의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총 31일간 치러졌다. 이 대회는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두 나라의 공동 개최 형태로 치러졌으며, 유럽과 아메리카 이외의 대륙에서 개최된 첫 번째 대회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붉은 악마’의 열정적인 길거리 응원으로 전세계 축구팬들의 이목을 끌었을 뿐 아니라 아시아 국가로는 사상 최초로 4강에 진입,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은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회마다 세계 정상급의 성적을 거두며 국위 선양에 기여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양궁, 레슬링, 유도, 탁구, 복싱 등에서 금메달 12개를 획득하며 소련-동독-미국에 이어 종합순위 4위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이 같은 성적을 ‘홈 어드밴티지에 의한 것’이라고 폄하했지만 한국 선수단은 4년 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12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종합순위 7위에 올라 스포츠 강국으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첫 번째 금메달인 사격 공기소총(여갑순)과 마지막 금메달인 마라톤(황영조)을 모두 획득하며 더욱 눈길을 끌었다. 특히 스페인의 여름 폭염 속에서 일본의 모리시타를 꺾고 막판 기적의 스퍼트를 한 황영조 선수의 금메달은 국민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또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사상 최대인 13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단순 메달 갯수가 아닌 ‘인구 대비 메달수’를 감안하면 한국 선수단의 업적은 더욱 두드러진다. 인구 4,800만명의 대한민국은 370만명에 한개 꼴로 금메달을 땄다. 2008년 올림픽 종합 10위권 이내 국가들 중에서 한국보다 인구 대비 금메달 수에서 우월한 국가는 호주와 영국 뿐이었다.

하계올림픽 뿐 아니라 동계올림픽에서도 한국의 선전은 눈부시다. 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과 98년 나가노 올림픽,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에서는 쇼트트랙에서만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그쳤으나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는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금메달 3개를 기록해 오히려 쇼트트랙(2개)보다 더 많은 금메달을 땄다. 이어 ‘동계올림픽의 꽃’인 피겨스케이팅에서는 피겨 여왕 김연아가 올림픽 사상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하며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밴쿠버 올림픽에서 한국은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로 종합순위 5위에 올랐는데, 이는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가장 높은 순위였다. 중국은 금메달 5개에 그쳤다. 

2002년 월드컵의 4강 신화 역시 유쾌한 기억이다. 예선에서 예상을 깨고 폴란드와 포르투갈을 격파한 한국의 상승세는 16강 이후에도 이어졌다.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16강에서 이탈리아를 격침시킨 대한민국은 8강에서도 스페인과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를 거두며 4강에 올랐다. 이는 유럽 및 아메리카 이외의 국가로는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4강에 오른 유일무이한 사례다. 공동개최국인 일본이 16강 진출에 그쳤기에 한국 대표팀의 선전은 더욱 빛났다. 이후 한국 대표팀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원정 16강’ 진출에 성공하며 다시 한번 축구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재확인한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월드컵, 하계올림픽, 동계올림픽에서 모두 세계 정상급의 성적을 올리는 흔치 않은 국가가 됐다.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TV를 켤 때마다 세계인들이 애국가와 함께 태극기가 올라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게 된 셈이다.

 

메달밭 다각화…  내실도 튼튼해지는 추세

과거 한국이 금메달을 획득한 종목은 양궁과 핸드볼, 탁구 등을 제외하면 유도-레슬링 등 투기종목에 한정돼 있었다. 동계올림픽에서는 쇼트트랙을 제외하고는 메달 획득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국내에서 인기가 높은 종목들은 국제대회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비인기종목들만이 ‘효자노릇’을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2008년 올림픽에서 한국이 획득한 13개의 금메달 중에는 야구 금메달이 포함돼 있었다. 이 메달은 다른 금메달보다 더 값지다고 할 수 있다. 프로야구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스포츠이며,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스포츠 선수들 역시 프로야구 선수들이다. 이 프로야구 선수들이 올림픽이라는 국제대회에 나가기 위해 리그를 중단한 후 연합팀을 구성해 출전, 금메달을 획득했다는 것은 최고의 인기종목이 국제대회에서도 국위를 선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한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는 사상 최초로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모태범, 이상화, 이승훈이 금메달 3개를 합작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아사다 마오를 꺾은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 금메달은 밴쿠버 올림픽의 대미를 장식한 하이라이트였다. 더 이상 쇼트트랙에서만 금메달을 획득하는 대한민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특히 김연아는 올림픽 금메달 이후 세계 피겨스케이팅 역사에서 ‘전설’의 반열에 올랐고, 2018년 평창올림픽 유치에서도 국제적인 인기와 카리스마를 앞세워 IOC 위원들을 사로잡으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한국 야구대표팀은 예선에서부터 미국-캐나다-일본-대만-쿠바 등 강팀들을 연파하고 전승으로 4강에 오른 뒤 숙적 일본에 6-2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 이어 결승에서는 국제대회 최강으로 손꼽히는 쿠바를 상대로 류현진의 역투와 이승엽의 홈런에 힘입어 3-2 승리를 거뒀다. 더 이상 올림픽이 ‘비인기종목들만의 향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 쾌거였다.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또한 한국 프로야구의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한 기회였다. 2006년 열린 1회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메이저리거들이 포함된 미국을 상대로 압승을 거뒀고, 우승팀 일본을 두 번이나 꺾었다. 2009년 2회 대회에서도 봉중근(LG)의 역투로 일본을 두 차례나 꺾고, 본선에서 멕시코를 격파했다. 이어 준결승에서는 메이저리거들이 가득한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윤석민의 호투와 추신수의 3점 홈런 등에 힘입어 베네수엘라를 완파했다. 결승에서 일본과의 연장혈투 끝에 패하기는 했지만 국민들은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올림픽과 WBC에서의 선전에 힘입어 한국 프로야구는 2009년 이후 한때의 침체를 딛고 폭발적인 관중 증가 효과를 누리며 다시 일어서고 있는 중이다. 뿐만 아니라 선동렬, 박찬호, 임창용, 이승엽, 구대성, 서재응 등의 스타들은 미국 및 일본 프로리그에 진출해 팀의 주축으로 맹활약하며 한국 야구의 위상을 더욱 높였다.

축구와 야구가 공존하는 흔치 않은 나라

또한 축구와 야구가 동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야구 종주국인 미국에서 축구는 비인기종목이다. 반면 축구가 인기 있는 브라질-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들과 유럽 국가들에서는 야구를 즐기지 않는다. 한국은 월드컵 축구대회에서도 4강에 진출했으며, 올림픽 야구와 WBC에서도 매번 상위권의 성적을 올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축구팬들과 야구팬들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이는 국내 리그에서도 마찬가지다. 1983년 출범한 프로축구는 2011년 현재 16팀으로 성장했으며, 각 구단들은 열성적인 ‘서포터즈’(응원단)와 지역연고제에 힘입어 열기 넘치는 리그를 운영하고 있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도 초창기 6개구단에서 현재 8개구단으로 늘어났으며, 중견기업 NC소프트가 2013년 1군리그 참가를 목표로 9구단을 창단한 상태다. 이어 전북을 지역기반으로 한 10구단이 창단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획득한 대회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이었다. 당시는 중화학공업 육성 등 체계적인 경제개발 계획에 힘입어 한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상장하던 시기였다. 이어 한국은 경제성장을 거듭해 세계 10대 무역대국에 등극함과 동시에 올림픽에서 종합순위 10위 내에 단골로 진입하는 스포츠 강국이 된 것이다.

결국 한국 스포츠의 성장은 ‘한강의 기적’으로 평가되는 대한민국의 성공적인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세계를 호령하고, 세계가 대한민국을 뒤쫓는 시대다.

김주년 객원기자  anubis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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