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기적을 전하는 이민아 목사
일상에서 기적을 전하는 이민아 목사
  • 미래한국
  • 승인 2011.10.10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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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가 띈다 / <땅끝의 아이들> 저자

 
요즘 종교서적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책은 이민아 목사가 쓴 <땅끝의 아이들>이다. 열편의 간증으로 구성된 이 책은 실제 간증을 듣는 것처럼 생생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첫 번째 간증은 ‘아무개 씨의 딸 아무개 씨의 아들이라는 말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서 동생들과 저는 그 사실이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딸답게 살려고 애쓰다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필자도 그녀의 아버지가 문화부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라는 사실을 먼저 밝혀야 할 것 같다. 

<땅끝의 아이들>은 종교서적으로는 이례적으로 주요 일간지를 비롯한 각종매체에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신간안내가 아니라 인물 인터뷰를 대문짝만하게 실은 것은 그녀가 무신론자였던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 이어령 장관을 기독교로 인도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난타’를 당하고 있지만 차가운 이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인정했을까, 세상이 관심을 가진 것이다.

이어령 장관을 기독교로 인도한 딸

이민아 목사의 기사가 많이 나면서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그녀의 스토리를 알 정도가 됐다. 그녀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 만에 조기졸업하고 미국 해스팅스 로스쿨에서 학위를 취득한 후 1989년부터 13년간 미국 LA지역 주무검사로 근무했다. 2002년에 형사 전문 변호사로 전업했고, 2009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현재 ‘마지막 추수의 소리’팀과 함께 청년교회 치유·부흥사역을 하고 있다.

대단한 이력의 그녀는 갑상선암을 극복한 데 이어 잃었던 시력을 되찾았고 자폐였던 둘째아들이 회복됐으나 아버지 이어령 장관이 세례 받은 지 3주 만에 첫째 아들을 잃는, 너무나 극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이민아 목사는 지난 6월 건강검진 차 귀국했다가 7월에 <땅끝의 아이들> 출간과 함께 이어지는 간증집회와 인터뷰 일정을 소화하면서 현재 국내에 머무르고 있다. 그녀와 접촉하려면 홈페이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카페지기에게 문자를 보내 인터뷰 일정을 잡으면서 ‘상당히 까다로운 분’일 거라 짐작했으나 큰 고난을 겪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밝은 에너지가 넘쳤다. 구어체로 쓴 <땅끝의 아이들>의 어투 그대로 말하며 진솔한 인터뷰를 해주었다.

오늘날 이민아 목사의 사역은 예민한 감수성과 분방한 성격으로 갈등을 겪던 사춘기 소녀시절과 맞닿아 있다. 유명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학업에 열중하면서 바쁜 부모님의 사랑을 갈구했던 그녀. 독한 양주로 불면증을 달래며 우등생으로 살았으나 대학에 들어가면서 자유를 추구했고 졸업하던 해 결혼하여 미국 유학을 떠났다. 부모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치열하게 살았건만 결국 1986년에 이혼했다.
1992년 그녀는 세례를 받았고, 둘째아들 진성이를 낳았고, 갑상선 암이 발병했다. 교회에서 다양한 훈련을 받고 새벽기도를 다니며 열심을 냈지만 1996년에 암이 재발됐다. 게다가 산만한 진성이가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 자폐증(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증상)이라는 걸 알게 됐다.

“울지 않고 잠든 적이 거의 없었어요. 걱정으로 자고 걱정으로 시작하는 힘든 시간을 보냈죠. 제가 아픈 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으로 겨우 달랬는데, 아이가 아픈 건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구요.”

더욱 뜨겁게 매달리고 교우들도 중보기도를 해주었지만 암은 또 재발됐고, 아이는 더 심해졌다.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 아이를 데리고 가라는 사인이 떠요. 학교마다 아이를 못 데리고 있겠다고 해서 계속 옮겨 다니는 것만 해도 괴로운데 교회 선데이스쿨에서도 아이가 내몰리니 정말 힘들었죠.”

결국 2002년에 아이에게 좀 더 나을까해서 미국인교회로 옮기게 됐고, 그때 신앙생활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내 안에 있는 어둠과 내 인생 안의 어둠이 사라지지 않아 예수 믿기 전보다 더 평강이 없을 때였어요. 그해 2월 22일, 아이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혼자 교회에 갔는데 목사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과 부활하셨음을 믿어도 여러분은 반 밖에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이자 나의 주님이라고 입으로 시인할 때에 온전한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하셨어요. 그제서야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닌 주님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까지 모든 결정은 자신이 내리고, 자신의 방식대로 신앙생활을 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기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 자리에서 강하게 회개하고 ‘오늘부터 제 인생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 주님인 것으로 알고 전권이양을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어요. 그날부터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시작된 거지요.”

절망과 흑암이 부흥의 시작

하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의 절름발이에게 “일어나 걸어라”라고 외칠 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씀을 읽으며 “우리 아이가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절절하게 기도했다.

“정말 절망적인 심정으로 매달렸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나는 살 수 없다는 절박감이 몰려왔어요. 저는 그게 부흥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죽어 있다는 것, 내가 흑암이라는 걸 깨닫는 것, 거기에서 빛에 대한 목마름이 생기는 것 같아요.”

얼마 후 후배 변호사가 소개해준 에릭 목사의 한인교회 집회 통역을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사역을 시작하게 됐다.

“후배 변호사의 아들이 그 목사님께 기도받고 자폐증이 나았어요. 에릭 목사님을 도와드리면 우리 아이도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시작했는데 목사님 말씀을 통역하면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고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나도 만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어요.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때는 바로 변화가 오지 않기 때문에 인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2005년 9월 아이는 점점 더 나빠졌고, 받아준다는 학교가 없었다. 답답한 심정으로 기도하는데 불현듯 ‘하와이로 가라’는 마음이 들었다. 하와이에서 좋은 목사님을 만나 아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자 마음은 안정됐지만 또 다른 고생이 시작됐다.

“하와이에서는 변호사 활동을 할 수 없어 수입이 형편없었죠. 모든 걸 내려놓는 그런 시간이었어요.”

그런 데다 망막이 찢어져서 거의 보이지 않았다. 미국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집안일을 제대로 못하는 모습을 본 이어령 장관이 딸을 데리고 귀국했다. 그런데 서울대학병원에서 “망막이 찢어진 적이 없다”며 “미국에서 의사가 영어를 너무 빨리해서 못 알아들은 거 아니냐”고 되물었다.

둘째 아들의 자폐증도 완전히 나았다. 2002년 당시 에릭 목사가 아들이 완치돼 또래보다 훨씬 성숙한 아이가 될 거라고 예언했던 대로 된 것이다. 그때의 기적을 본 이어령 장관이 ‘지성에서 영성으로’ 옮긴 것이다. 2007년 이어령 장관이 일본에서 하용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을 때 모든 언론이 보도할 정도로 이슈가 됐다.

그로부터 3주일 후, 그녀의 첫째 아들 유진이가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19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그녀의 가슴이 타들어갔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은 아들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을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때 남가주사랑의교회 교인들이 유진이가 16세 때 세례받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세상 떠난 큰 아들과 함께 시작한 청소년 사역

“처음 예수믿고 10년 동안 그냥 아들이 세상적으로 잘되라는 기도를 했지만 몸부림치면서 드린 기도를 하나님은 다 들어주셨어요. 청소년 때 고비를 잘 넘기고 제가 기도했던 대로 버클리에 들어가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우등상까지 받았어요. 기도는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확인시켜주셨어요.”

아들이 천국에 간 것을 말씀과 환상으로 본 뒤 안심을 했지만, 스물다섯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유진이 생각에 무시로 가슴이 저몄다. 그녀가 사역자로 변신한 것은 유진이 계기가 됐다. 10대 때 집을 나갔다가 사흘 만에 돌아온 적이 있는 유진이가 그 후 부모와 갈등이 있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 왔다. 아들 등쌀에 거의 1년 동안 울며 겨자먹기로 ‘홈리스 사역’을 한 것이다.

그에 앞서 2002년에 친구 아들이 갱단에 연루돼 총을 맞고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장례식에 갔다가 청소년 사역을 하는 김기웅 목사를 만나게 됐다. 그때 불현듯 김 목사를 돕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 전화번호를 남겼고 얼마 후 “크리스천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당시 암이 완전히 치유돼 복직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마치 자석에 끌린 듯 돕겠다고 나섰다. 안정적인 검사직을 버리고 청소년들을 돌보기 시작한 것이다.

아들 유진이가 어려운 친구들을 돌본 걸 떠올리며 지금 그녀는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한국, 미국, 아프리카, 푸에르토리코, 오스트리아, 중국 등 세계 각지의 청년들을 만나면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땅끝의 아이들>은 아버지 이어령 장관의 권유로 출간하게 됐다.
“2월에 귀국했을 때 아버지께서 ‘간증하는 것도 좋지만 책을 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다’며 일단 녹음을 하라고 하셔서 순종했는데 어떻게 책이 나왔어요.”

<땅끝의 아이들>은 성경 말씀을 여성 특유의 감성으로 섬세하게 분석해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에로스적 하나님’ 같은 독특하고도 실감나는 해석을 접하면서 독자들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된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도착한 예수님을 대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태도를 통해 독자들은 삶의 좌표를 어떻게 정할지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걸 다시는 의심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이 ‘순교’이고, 치유에 따르는 메시지가 ‘복음’이라는 매력적인 해석들이 책 곳곳에 숨어 있다. 아울러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하면서도 인간적으로 약해질 때의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아 신앙이 깊지 않은 독자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준다.
책을 내고 집회를 하면서 한국교회 교인들을 만나는 이민아 목사는 한국 기독교의 힘든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신앙은 선택, 취재기자도 인터뷰 이후 눈물로 영접

“미국에서 신앙생활 할 때 오정현 목사님과 하용조 목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미국교회 다닐 때 사람들이 ‘용기 조 나라 사람이냐’며 부러워할 때 조용기 목사님이 자랑스럽고 고마웠어요.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기름부음 받은 종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하지요. 큰 역사를 이룬 노아도 포도주를 먹고 하반신을 내놓고 잤을 정도니까요. 그때 아버지를 흉본 함의 자손들이 나중에 어떻게 됐습니까. 한국교회가 힘든 상황이라고들 하는데 오히려 좋은 기회입니다. 1세대 목사님들이 세운 다윗의 장막을 2세대 목사님들이 튼튼하게 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시끄러운 건 그만큼 기도하라는 뜻이고, 고난을 이기면 한국교회가 더 부흥하고 탄탄해질 겁니다.

세 시간 넘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이민아 목사는 함께 간 사진기자에게 영접기도를 하자고 제안했다. 타종교를 믿는 사진기자가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영접했고, 이민아 목사는 “오늘 이 자리는 바로 이 분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2월 그녀는 다시 눈이 안 보이는 지경까지 갔고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수술하기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좋은 의사를 만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번 건강검진 때도 몸 상태가 안 좋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나는 나았다!”고 선포해 끄떡없다며 웃었다. 이민아 목사는 거듭난 후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본인의 선택임을 강조했다.

“자신이 뜨겁게 갈망하는 가운데 길을 찾아야 합니다. 저도 갈급한 심령으로 미국 교회 집회에 갔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중보자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으로 힘차게 달려야 합니다.”

글 /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 / 이 경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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