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정치 이념을 찾아서
기독교 정치 이념을 찾아서
  • 미래한국
  • 승인 2011.10.13 12: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성준의 BOOk & World] 웨인 그루뎀의 <성경에 따른 정치학>을 읽고

황성준 편집위원·전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제가 설교할 때마다 주무시는 것 같은데…”
2003년으로 기억한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목사님이 필자의 불성실한 예배 태도를 꾸짖었다. “다음부터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대답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갑자기 그런 엉뚱한 생각이 났는지…”

"세상풍파에 시달리다가 모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따뜻한 품안에 안기니 너무나 포근해서 그만 잠이...”라고 대답한 것이었다. 그때 목사님의 표정을 떠올리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지금도 웃음이 새어 나오곤 한다. 말씀 잘 하시기로 유명한 우리 목사님의 말문이 잠시 막힌 순간이었다.

기독학생들이 걸었던 세 가지 길

보수 기독교 집안에서 모태신앙으로 자란 필자는 고등학교 다닐 때 착한 기독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후반기에는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성실했으며, 이때 열심히 성경을 읽었다. 그러나 이러한 필자의 신앙심은 83년 대학 입학과 함께 도전을 받았으며, 또 너무나 쉽게 무너져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만,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너무도 많은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사회, 역사, 실존적 자아, 정치와 민주화 등등.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교회 선배들은 대답을 주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믿음이 좋던 대학 선배들은 대개 3가지 그룹으로 나뉘어 갔다. 첫째는 ‘적당한 세속주의’ 그룹이었다. 이들은 관성적으로 교회에 나가나, 대학에서는 기독교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알리지 않고 살아갔다. 아니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는 풍조마저 존재했다.

두 번째는 일반 대학세계와 담을 쌓고, 신앙인끼리 모여 신앙생활을 하는 ‘고립주의’ 그룹이었다. 이들은 대학 캠퍼스에 모여 함께 기도하고 신앙심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이들은 대학사회의 문제 제기를 애써 외면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갔다. 세 번째는 ‘교회 도구주의’ 그룹이었다. 이들은 이미 사실상 신앙심을 버렸다. 그러나 교회를 그들이 추구하는 사회 변혁의 도구로 삼기 위해 교회에 남아 활동을 계속한 부류이다.

당시 학생운동에서는 이른바 ‘CM논쟁’이 있었다. 기독교학생회에서의 활동이 ‘크리스천 운동’(Christian Movement)이냐, 아니면 ‘교회 운동’(Church Movement)이냐는 논쟁이었다. 이른바 ‘크리스천 운동’론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서 반정부 혹은 반체제 운동을 한다는 입장으로, ‘인간 예수’ 혹은 ‘혁명가 예수’를 기반으로 ‘해방신학’ 등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나갔다.

반면 ‘교회 운동’론은 ‘교회’라는 합법공간 활용론으로서, 애초부터 기독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위장 기독교 운동이었다. 이 양자의 대립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CM’은 당연히 ‘Church Movement’의 약자로 굳어갔다. 즉 ‘교회’와 ‘기독교학생회’는 대중 장악을 위한 공간이거나, 혹은 공안당국을 피하기 위한 ‘위장막’으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신론적 ‘교회 활동가’들이 ‘종로5가’(기독교단체들이 기독교회관 등 종로 5가에 밀집해 있는 것을 가리킴)로 침투해 들어갔다. 더 나아가 80년대 말 많은 주사파 조직들이 이른바 ‘신대원’팀을 조직해 조직원들을 신학대학원에 조직적으로 입학시키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교회 운동권들과 비주류가 된 캠퍼스 신앙

 

이러한 캠퍼스 분위기 속에서 대학 신입생이 올바른 신앙심을 지키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유물론과 문화적 상대주의, 그리고 정치적 유토피아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대학 캠퍼스에서 기독교 신앙이 설 땅은 없어 보였다. 물론 CCC(대학생기독교선교회)를 비롯한 여러 복음주의 대학생 조직이 신앙을 유지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헌신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한국사회의 중심세력이었던 한국 기독교가 대학 캠퍼스의 담론을 이끌어 내기는 커녕 그 주변부로 전락돼 버렸다는 사실이다.

 대학가의 중심 담론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대학가의 기독교는 ‘현실 도피주의’ 혹은 ‘지적 패배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 기독교는 대학가에서 ‘지적 권위’와 ‘도덕적 상징성’을 상실한 채 지적·도덕적 비주류로 전락돼 갔다.

필자가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이른바 ‘분쟁지역’ 취재 과정을 통해서이다. 체첸, 다게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여러 분쟁 지역에서의 경험은 필자의 ‘지적 교만’을 근저로부터 흔들어 놓았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지옥의 현장에서 인간 본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인간이 얼마나 흉포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인간 이성 만능주의’에 입각한 ‘인본주의’의 한계에 대해서도 통렬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과 인간관 때문에 필자는 요즘 보수우익 진영에서 유행(?)하는 ‘자유주의자’라는 용어보다는 ‘보수주의자’라는 용어를 더욱 선호한다. 한국에서는 ‘보수주의’라는 단어가 다소 부정적 어감을 주기 때문에, 전술적으로 이 용어보다는 다른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실제로 보수주의자가 아닌 ‘리버테리안’(libertarian)들이 보수주의자로 오인(?)받는 경우도 많다.

인원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한 보수 기독교

 물론 ‘자유 시장경제주의자’ 혹은 ‘고전적 자유주의자’(classical liberal)들이 제기하는 ‘자유 시장경제’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필자의 보수주의는 ‘비(非)시장적 전통주의’와는 다르다. 그러나 ‘절대적 진리’와 ‘절대적 도덕’의 존재를 믿으며, 또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철저히 인식한다는 면에서는 필자는 ‘리버테리안’이 되기에는 많은 결격사항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비록 설교시간에 졸기도 하지만, 성수주일을 지키는 기독교인인 것이다.

현재 한국 보수우익 운동의 양대 축은 안보단체와 보수 기독교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 운동이 아카데미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아직 대중기반 기반은 취약하다. 따라서 ‘안보 보수주의’와 ‘기독교 보수주의’가 현재 한국 보수우익 운동의 주요 동력이라는 사실에 대해 부인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안보 이념을 기반으로 한 안보단체들과 달리, 기독교 보수주의는 자신의 고유 이념과 동력을 상실한 채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되는 경향성이 없지 않다는 점이다. 심지어 보수단체 회의에 참석해 보면, 교회를 그저 ‘동원 역량’ 정도로 바라보는 보수인사도 없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약 기독교가 그저 동원이나 해 주는 집단이 돼 버린다면, 결국 그 동원력마저 상실하는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오히려 기독교는 기독교 본연의 복음주의 정신에서 사회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성경’은 내세의 문제만을 다룬 책이 아니다. 인간 사회 모든 문제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는 진리의 복음서이다.(이러한 사실을 안 믿는다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성경 구절이 이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해 축자적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기독교와 성경의 정신에 입각해 세상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기독교인이라면 의당 갖춰야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웨인 그루뎀(Wayne Grudem)의 <성경에 따른 정치학>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 준다. 그루뎀은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대해 잘못된 5가지 관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째, 정부가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다. 정치를 통해 이 세상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태도는 비성경적이다. 또 정부가 신학적 해석의 독점자가 될 경우, 신정정치에서 보이는 많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따라서 정부와 교회는 분리돼야 한다.

둘째, 그렇다고 정부가 종교를 배제시켜서도 안 된다. 정교분리의 원칙을 교회의 완전한 정치 불간섭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하늘나라의 일을 선포하는 기관이지만, 이 세상의 문제와도 완전 분리될 수는 없다.

셋째, 모든 정부가 사악하고 악마적인 것은 아니다. 일부 교인들은 모든 세속권력과 정치를 사악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와 거리를 두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정치와 종교에 대한 5가지 원칙

넷째, 복음이 우선이지만, 정치를 배제할 수도 없다. 많은 선지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현실의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는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그렇다고 복음을 배제한 채 정치에 몰두해서는 안 된다. 이는 교회의 본질을 망각한 것이다.

그루뎀은 이상과 같은 5가지 원칙 하에서 기독교인들이 복음주의를 유지하면서 사회와 정치 영역에서 ‘크리스천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특히 ‘절대적 도덕 기준이 존재하며’, 이를 부정하는 ‘문화적 상대주의’와 맞서는 것이 ‘신본주의 입장’에 선 기독교인들의 자세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제1부는 기독교 교리와 정치와의 관계에 대해 잘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제2부에서는 생명, 결혼, 가족, 경제, 환경, 국방, 외교 등 여러 현안들을 성경적 입장에서 해설해 주고 있다. 물론 이 책의 내용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닐 것이다. 또 지나치게(?) 미국적이며, 필자도 부분적으로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더 이상 피해만 갈 수는 없다. 바로 이러한 ‘현실 도피주의’로 말미암아 한국교회는 지적 권위와 도덕적 정당성을 무신론적 좌익들에게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이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지적·신학적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 2부는 기독교인이 아닌 보수주의자들이 읽어 보아도 좋을 것이다. 비기독교인들에게도 훌륭한 보수주의 교과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