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잰지앙시(鎭江市)를 둘러보고
중국 잰지앙시(鎭江市)를 둘러보고
  • 미래한국
  • 승인 2011.10.2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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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각 교수의 세상보기] / 황의각 편집고문·고려대 명예교수

 
지난 20여년 동안 매년 해온 것처럼 금년 가을에도 중국 남경이공대학 경제경영학원의 대학원 신입생들에게 매일 4시간씩 ‘거시경제학과 화폐이론’ 과목의 3주간 집중강의를 하고 있다.

9월 24일 토요일을 맞아 연속강의로 지쳐 숙소에서 쉴까 하다가 대학 국제교류처장의 주선에 따라 난징(南京) 동북방향 약 75km 지점에 유유히 흐르는 양자강을 끼고 신석기시대의 많은 유적을 간직한 채 성장해온 도심인구 60만 정도의 도시 잰지앙(鎭江)시를 찾았다.

3천년 역사의 세월이 양자강 물과 함께 흘러간 이 오랜 도시는 중국 1급 관광도시로서 해발 44미터의 진산(金山)과 난산(南山), 지아오산(?山), 마오산(芽山)등이 도심을 지나는 강을 끼고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아늑한 휴식처를 제공한다.

우육조(于六朝)시대에 처음 건설돼 당 송 원 명 청을 거쳐 아름다운 조각돌로 세월과 함께 쌓아올린 옛 건축물들이 옹기종기 연결돼 높고 낮은 문화센터를 이루며 모여 있는 고대 시진부두(西津古渡)가 도심의 서북쪽 양자강 변에 있다.

그곳에는 청대에 건축된 노면대지(路面大地)가 여기 저기 현재의 땅 표면 아래에 당시의 모습대로 유리 덮개로 보존돼 ‘한눈에 천년을 돌아 볼 수(一眼看千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문화유적관리에서 배울 점

중국은 자기네 역사 유적은 어느 시대 어느 정권 하의 것이든 비록 수치스러운 것일지라도  잘 보관 유지하려 하고 있다.

그 한 예로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당시 중국 수도였던 난징으로 침입해 중국인들의 저항의지를 꺾으려고 점령 직후 첫 6주 동안에 30만 명 이상의 양민과 중국 군인들을 대량 학살한 끔찍한 현장에 ‘난징대량학살박물관’을 1985년에 세워 당시 발견된 유골들을 보존해 보여주고 있다.

아마 대부분의 일본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이 범한 반인륜적 현장인 이런 유적지를 둘러보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요즘 의외로 많은 일본 관광객들이 이 기념관을 찾아 숙연한 모습으로 고개 숙이는 것을 본다. 인간의 양심은 정직해 얕은 생각으로 역사기록은 왜곡해도 양심은 왜곡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왜냐하면 양심은 영원히 감춰두고 싶은 비밀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가 간에 서로 얽힌 문제에도 단순한 애국심이나 국수주의적 감정보다는 참된 양심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의로운 사람들이 어느 나라에나 항상 있음을 안다.

창조주가 인간을 동물 중의 영장으로 만든 가장 중요한 에센스는 ‘양심과 사랑’을 심어줬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양심과 사랑’을 잃지 않는 한 정직하고 의로운 생명체일 수밖에 없다.

중국은 본래의 문화 유적뿐만 아니라 외국 침략자들이 남긴 건축물이나 군사시설 유적도 파괴하지 않고 보존해 역사의 귀감을 삼고 있다.

과거 나쁜 역사는 생각하기도 싫어, 예컨대 일제강점기 우리 땅에서 일본인들이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축물들은 모두 허물어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뒤틀린 속이 편해지는 우리 한국의 단편적 사고방식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큰 땅 덩어리에 버금가게 생각의 틀이 큰 탓일까 또는 매사에 느긋한 중국인들의 고유한 기질 탓일까?

국제관계에서나 남북한과의 관계에서 일본이나 중국이 국가로서 객관적이고 공정하다는 것을 뜻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모든 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편협하기 마련이며 중국이나 일본도 국가로서 제격에 맞는 위신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단순히 과거 자기 역사를 이해하는 관점에서 중국과 중국민이 공산주의 정치 체제 하에서도 상당히 신축적이고 개방적이며 미래지향적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려 한다.

물론 중국에서도 1960년대 모택동의 후처 강청 등이 무산노동자 계급을 선동해 일으 켰던 소위 공산주의 문화혁명은 기존 역사 가치와 유적을 파괴하는 광풍이 돼 중국의 역사 발전을 후퇴시킨 적이 있다.

그러나 등소평 집권 시기부터 중국은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면서 새로운 발전과 전통 문화 회복을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아직도 개인의 자유가 모든 면에서 다른 선진국에 비해 잘 보장되지 않아 미흡한 점이 많지만 말이다.

정치체제 넘어 역사 문화적 유산은 보존돼야

이번 나의 하루 여행에서 감명 받은 것은 잰지앙시에 있는 펄벅(Pearl S. Buck)이 유년 시절 살았던 주택이다. 미개발 상태인 중국을 무대로 쓴 대지(Good Earth, 1931년 출판)로 1938년 10월 10일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벅 여사가 부모인 선교사 부부를 따라 그곳으로 와서 무려 18년을 살고 자랐던 주택과 그녀의 기념관이 잘 보존 관리된 점에서 좋은 중국관을 가졌다.

1892년 6월 26일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출생해 1914년 John Lassing Buck과 결혼 (후에 이혼), 그리고 1973년 3월 6일 81세로 미국 고향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녀는 거의 평생을 중국을 배우고 사랑하고 품고 살았다.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의 빈곤과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헌신하며 작가로 또한 선교사(영어 교사)로 중국에서 일생을 보냈다.

그녀가 중국을 제2의 조국으로 여겨 중국 국민의 자유를 얼마나 애타게 갈구했던가는 그녀의 노벨상 수상 연설에 잘 반영돼 있다.

“내가 오랜 세월 나의 삶의 일부였던 중국 국민들과 그들의 삶에 대해 전적으로 사적이긴 하지만 언급하지 않는다면 나는 진실한 나일 수 없습니다. 나의 조국 미국과 나의 제2선택 조국인 중국인의 마음과 생각은 여러 면에서 같은데 그러나 무엇보다 자유에 대한 우리의 공동 사랑 추구에서 공통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무엇보다도 이제 중국인 모두가 가장 위대한 투쟁 즉, 자유 쟁취를 위한 투쟁에 모두 참여하는 데 있어서 미국과 중국이 닮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녀 부모의 거주지이자 그녀가 고등학교(崇實女高)를 마칠 때까지 그리고 미국에서 대학공부를 마친 후 다시 중국으로 와서 병약한 어머니를 간호하며 살았던 곳 댕윤언덕(登云山)에 자리 잡은 약 500평방미터의 주택과 기념박물관이 2008년 원형대로 수리 보수돼 펄벅 재단에 의해 관리 유지되고 있다.

해방 후 공산주의 국가로 지금까지 종교를 탄압해온 중국이지만 이런 기념비적 유적을 보존해온 것을 보면서 중국의 또 다른 문화적 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1988년 전까지 보편적으로 쓰던 한문마저 단견문화정책으로 어리석게도 버렸다. 그런 국수주의적 정책을 입안해 실행한 행정 관료와 정치지도자들의 실책은 그들의 실명과 함께 역사책에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국가, 이념과 사상 그리고 정치적 체제를 넘어 호불호 간에 역사적 유물과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고 지켜야 할 책임과 소명을 가져야 한다.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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