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의 탐욕,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가의 탐욕, 그럼에도 불구하고…
  • 미래한국
  • 승인 2011.10.26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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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 /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뉴욕은 옛 이름 뉴암스테르담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네덜란드인들이 개척한 도시다. 네덜란드는 1626년 인디언으로부터 지금의 맨해튼을 사들였다. 매입가격은 60달러 상당의 천과 장식품 등! 대단한 장사수완이라 하겠지만 당시에는 황무지였다. 그 황무지에 도시를 건설하면서 인디언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북부 접경을 따라 방벽을 세웠다.

뉴암스테르담은 천부적 장사꾼이었던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얼마 지나지 않아 북미 최대의 상품무역시장으로 성장했다. 그러자 역시 북미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한 영국과 네덜란드 간에 대서양 무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 1664년 맨해튼을 점령하면서 뉴암스테르담을 뉴욕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방어벽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는 도로를 건설했다. 월스트리트라는 이름은 거기서 유래했다.

탐욕을 통해 재정위기를 해결한 해밀턴

17세기가 네덜란드의 시대라면 18세기부터는 영국의 시대였다.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깨뜨린 데 이어 네덜란드마저 제치고 해양패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수도 런던이 국제적 무역 금융의 중심이 된 것은 선진 네덜란드의 노하우가 전수된 덕분이었다. 1688년 명예혁명의 결과 메리 2세의 남편이었던 네덜란드 총독 오레아나 공작 빌렘(오렌지 공작 윌리엄)이 윌리엄 3세로 영국 왕으로 즉위하게 됐다. 왕을 외국에서 수입한 셈인데 이를 계기로 네덜란드의 해상무역 문화와 근대적 금융 시스템도 영국으로 함께 건너갔던 것이다.

미국은 영국과 싸워서 독립했지만 경제 제도의 측면에선 바로 그 선진 영국의 경우를 철저히 따라갔다. 미국은 독립전쟁의 결과 막대한 전쟁 채무를 안게 됐는데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이어지며 발달한 새로운 금융기법으로 이를 수습했다. 뉴욕과 월스트리트의 진짜 역사의 시작이었다. 1789년 33세의 나이로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을 맡은 알렉산더 해밀턴이 그 길을 열었다.

미국의 독립을 이룩한 ‘파운딩 파더’들은 대체로 농장주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전쟁 채무 변제를 위해 단순히 화폐를 더 찍으려 했다. 그러나 빈민가 사생아 출신 해밀턴의 생각은 달랐다. 화폐 발행 확대는 통화가치를 떨어뜨리고 과도한 인플레를 불러와 갓 탄생한 정부에 큰 부담을 줄 것이었다. 그리고 구 채권을 휴지로 만들어 신생국가 미국의 경제적 신인도에 더욱 큰 타격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해밀턴은 전쟁 중 발행된 각종 구 채권과 차용증서를 모두 새로운 단일한 연방 채권으로 액면대로 교환해주되 신 채권은 구 화폐와 1대 1 교환가치로 발행한 신 화폐로만 매입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해밀턴의 발상은 국가의 채무를 단지 부담스러운 것으로만 보던 당시의 통념에 비추어 볼 때 대단히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 구상은 책임 있는 연방정부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反연방주의자들의 반대는 당연했다. 그러나 연방주의자 해밀턴은 “과도하지 않은 채무라면 그건 국가적 축복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비는 결과가 증명했다. 미국의 국채는 국내에서 뿐 아니라 유럽 시장에서도 높은 가치를 누리며 거래됐다.

남북전쟁과 월스트리트의 역할

아직은 미미했지만 월스트리트는 이 과정에서 해밀턴의 구상에 적극 부응함으로써 장차의 맹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애국적 열정? 하지만 역시 이익이라는 동기가 역할을 했다. 월스트리트의 금융업자들은 화폐가치가 떨어진 구 화폐를 갖은 방법으로 끌어 모으고 액면 이하로 거래되던 구 채권을 적극 매입해 신 채권과 교환함으로써 큰 이익을 보았다. 탐욕과 술수! 그러나 그 탐욕이 전쟁 채무 문제를 긍정적 방향으로 해결되게 만들었다. 해밀턴은 이 점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월스트리트 금융의 역사에 또 다른 한 장은 남북전쟁이었다. 북부가 결국 승리한 배경에 관련해선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빠뜨릴 수 없는 요인이 하나 있다. 바로 돈 문제다.

전쟁 초기에는 남부가 연일 승승장구했다. 남군 사령관 리 장군의 능력도 있었겠지만 돈 문제가 컸다. 남부는 거대 농장을 배경으로 기왕에 막강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북부에는 그에 필적할 산업자본가형 재력가가 없었다. 전비 압박에 시달린 북부는 급기야 300달러를 내면 징병을 면제하는 법안을 시행하기도 했다. 때문에 1863년 7월 13일 뉴욕 맨해튼에서 사상자가 2,000명이 넘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만약 이런 식으로 계속됐다면 북부는 남부와의 전쟁 이전에 내부 문제로 주저앉을 수도 있었다.

월스트리트가 바로 이때 맹활약을 했다. 북부는 월스트리트의 금융 브로커 제이 쿡에게 5,000만 달러에 달하는 전쟁채권 판매를 의뢰했는데 그는 이를 모두 팔아치우는 수완을 발휘, 링컨 정부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그의 수법은 채권을 소액으로 쪼개 부유층이 아닌 일반인들에도 판매하는 것이었다. 당시로선 쉬운 발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북부에선 이렇게 월스트리트를 통해 끊임없이 자금을 조달한 반면 남부에서는 대형 농장주들의 파산이 속출했다. 현대적인 전쟁자금 조달 방법을 수립하지 못한 채 쌓아둔 돈을 소모해가는 식이었으니 당연했다. “우리는 북측의 병사들에 패한 게 아니라 북측의 금융에 패했다”고 말한 남측 어느 장군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북부의 승리 배경에 현대적 금융기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데 미국은 이 현대적 금융기법 덕분에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뉴욕 월스트리트가 런던에 버금가는 금융의 중심지로 부상하는 가외의 소득도 얻게 됐다. 소홀히 볼 대목이 아니다.

모든 금융상품의 동기는 인간의 탐욕

전쟁은 다른 조건이 비슷하다면 결국 돈이 문제다. 그런데 그 비용을 쌓아둔 쌈짓돈만으로 조달하려다간 쌈지만 거덜 난다. 결국 정답은 금융이다. 좋든 싫든, 금융자본가들이 탐욕스럽든 어떻든 그렇다. 다른 모든 국가적 프로젝트도 마찬가지다.

물론 방만한 재정 운영은 그 자체로 언제나 문제다. 하지만 이 경우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출을 늘리기 위해 세금을 더 거두려는 것이다. 채권이든 주식이든 또 다른 어떤 것이든 그 모든 금융 상품은 기대이익의 실현, 노골적으로 말해 인간의 탐욕이라는 동기를 매개로 재원을 조달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세금은 언제나 일단은 불이익의 감수다. 거둬 좋은 목적으로 쓴다 해본들 선한 의도가 좋은 결과를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금융과정은 시장에서 진행되며 그 시장은 때로 심히 요동을 친다. 하지만 정부가 세금을 거둬 언제나 잘 운영할 것이라는 믿음은 시장원리주의적 믿음보다 더 순진하다. 방만한 복지 포퓰리즘으로 재정을 파탄시킨 나라들을 보라!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금융자본 규탄 분위기가 세계적 현상이다. 지난 10월 15일에는 세계 80여 개국 1500여 개 도시에서 시위가 있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反월스트리트 시위라는 촉매가 아니라도 한국에서는 이미 금융권에 대한 시선이 탐탁할 여지가 없다. 딱히 좌파적 지식인이 아니라도 금융자본의 탐욕을 규탄하는 데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하다간 욕먹기 알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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