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종북좌파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기고] 종북좌파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 미래한국
  • 승인 2011.11.03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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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석 기독교사회책임·선진화시민행동 대표

서경석 기독교사회책임ㆍ선진화시민행동 대표 (서울대 공대 졸업. 전 경제정의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총장)
한국에서는 요즈음 종북(從北)좌파라고 통칭되는 김정일 추종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 이유를 알아보려면 과거 민주화 운동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87년 6월 민주화 대항쟁 당시 민주화를 이루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학생세력이 대부분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세력이었다. 

  왜 그런가? 혹독한 군사독재 치하에서 당시 민주화세력은 스스로를 흑백논리로 무장해야 했다. 그래야 강고한 투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상황에 맞는 흑백논리가 없었기 때문에 운동권은 이 논리를 외부에서 빌려와야 했다. 그래서 한국 내에서 맑스 레닌주의, 김일성 주체사상, 마오이즘 등이 이념적인 각축을 하게 되었다. 기독교운동 안에서는 민중신학이라는 흑백논리가 등장했다.

나도 친북좌파였다

그런데 김일성 주체사상론(NL)이 맑스레닌주의(PD)보다 훨씬 더 유연했고 그 결과 NL파가 학생운동의 주류가 되었다. 나아가 이 세력은 한국을 민주화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민주화 대항쟁 때 한국을 민주화시킨 세력이 바로 從北좌파였다는 점은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살 떨리는 일이다. 그러나 이 점이 사실이다. 이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아직도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셈이다.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나도 젊은 시절에 친북좌파였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 2학년 때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었다. CCC에 갔다가 경제복지회에 가입했는데 그곳에서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인 박성준 씨를 만나 그의 지도하에 사회주의 공부를 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사회주의를 신봉하게 되었다. 그런데 통혁당 사건이 터지면서 박성준 선배는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았고 나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훈계방면 되었다. 그렇지만 훈계방면 된 후에도 대학 시절 내내 이념적인 문제로 번민했다.

다행히 나는 82년에서 88년까지 미국에 유학 가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88년 초에 귀국해서는 당시 운동권의 연구기관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원장서리가 되었다. 그런데 연구원에서 파악해보니 일반 학생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학생운동 후배들도 대부분 김일성 주체사상파가 되어 있었다. 기독교 운동의 성명서들도 분석해 보면 전부 북한방송을 베낀 것이었다.

한번은 후배를 몰래 불러 사회주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이 화근이 되어 후배들이 나를 개량주의자라고 비판하면서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직에서 내쫓는 운동을 했다. 그 결과 결국은 진보 기독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나는 보수 기독교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갈 데라고는 일반 사회운동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새로 시작한 운동이 경실련이었다.

89년에 경실련이 창립되었는데 5년이 지난 94년에는 경실련이 한국 사회운동의 주류가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94년에는 남아 있던 재야운동이 시민운동으로 전환했다. 그렇게 해서 출범한 단체가 박원순 변호사가 주축이 된 참여연대이다. 그 후부터 시민운동 안에서는 경실련과 참여연대의 각축이 시작되었다.

박원순의 낙선운동은 좌파시민운동과 포퓰리즘의 시작

그러다가 2000년 낙선낙천운동을 고비로 참여연대가 시민운동을 장악했다. 그런데 박원순 변호사가 주도한 낙선낙천운동은 경실련의 시민운동의 철학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그들은 낙선낙천운동은 국민의 지지가 높으니 이 운동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했다. 과거 운동권이 민주집중제라 하여 민중이 투표로 한 결정은 전부 옳다고 주장했는데 낙선낙천운동 역시 같은 사고방식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경실련式 시민운동은 낙선낙천운동 이후 포퓰리즘 운동으로 대치되었다.

한국사회에서 포퓰리즘이란 말이 낙선낙천운동 이후부터 나오게 된 것도 전혀 우연이 아니다.
또 낙선낙천운동은 잘못된 선거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당장에는 인기가 컸지만 사실은 중대한 실수였다. 한 방에 시민운동이 국민을 향해 법과 질서를 호소할 수 있는 도덕적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낙선낙천운동의 독선(獨善)이었다. 시민운동은 겸손해야 하고 국민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진리도 자기가 결정하지 않는다. 정보를 국민에게 공개해서 국민이 결정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낙선낙천운동은 법 위에 군림하고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정의의 잣대를 마음대로 휘둘렀고 자기들이 정한 낙선자 명단은 무오(無誤)하다고 하여 일체의 변경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낙선낙천운동은 편향적인 특정정당 지지운동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시민운동은 그 후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시민운동이 권력화되고 내부의 언로(言路)가 막혀 낙선낙천운동에 대한 비판이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이 운동 이후 시민운동은 완전히 좌편향으로 가고 말았고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되었다. 박원순 변호사는 이 운동의 최대의 수혜자이지만 사실은 시민운동의 몰락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

역사를 뒤로 돌린 광우병 촛불시위

이명박 정권이 출범한 이후 진보진영은 종북좌파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으면 앞으로 진보는 영원히 정권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변화를 보인 곳이 민노당이었다.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같은 이들이 민노당 주류를 從北주의라고 비판하고 더 이상 그들과 당을 같이 할 수 없다며 뛰쳐나와 진보신당을 만들었다. 만일 그때의 분위기가 계속되었더라면 우리 역사 속에서 종북좌파가 청산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광우병 촛불시위가 터졌다. 이 촛불시위는 종북좌파들의 작품이다. 강기갑, 천영세, 박석운, 오종렬, 한상렬 등 맥아더 동상 철거사건을 주동한 사람들이 광우병 촛불시위를 주동했다. 그리고 월드컵 붉은악마 축제와 같은 분위기를 만드는 데 성공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끌어들였다. 이 촛불시위가 성공하는 바람에 코너에 몰렸던 종북좌파 세력이 다시 진보진영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좌파 시민단체들이 다시 그 쪽으로 몰려가서 들러리를 서게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는 청산되어야 할 세력이 있다. 사람은 그대로 있더라도 세력으로서의 친일파는 청산되었다. 세력으로서의 군사독재세력도 청산되었다. 세번째로 청산되어야 할 세력이 바로 종북좌파세력이다. 가장 대표적인 종북좌파세력이 민노당과 전교조이다. 이들은 맥아더 동상 철거시도사건을 주도하고 광우병 촛불시위를 주도했다. 민노당이 김정일 추종세력이었기 때문에 민노당 핵심당원들이 일심회, 왕재산사건과 같은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도 민노당은 관련자 출당이나 대국민 사과와 같은 조치를 일체 취하지 않았다.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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