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민주당, ‘진보’ 아닌 ‘퇴보’의 이력서
[심층분석] 민주당, ‘진보’ 아닌 ‘퇴보’의 이력서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1.11.08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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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장면 총리
“이상하게 속이 불편하군, 뒤지(휴지) 좀 줘 보게.”
1955년 5월 5일 새벽, 제3대 대통령에 입후보한 민주당 신익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호남선 열차 화장실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그는 자유당에 맞서 대통령 선거유세를 위해 이리로 향하던 중이었고 한 잔의 홍차를 마신 직후였다. 수행원들이 긴급히 인공호흡을 했지만 그는 소생하지 못했다.

대통령 후보 사망을 정략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던 민주당 

민주당 제 3대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
당시 바로 옆에는 민주당 부통령에 출마한 장면이 함께 있었다. 시중에 정적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됐다. 선거를 앞둔 그의 장례식에서는 울분에 찬 지지자들이 경찰과 충돌했고 발포가 있었으며 10여명이 사상했고 700여명이 검거됐다. 하지만 장면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민주당에서도 그런 수법으로 해공 선생(신익희)의 사인을 전략적으로 선동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다시 말해 ‘암살의 혐의가 있어 조사 중이다’라고 했더라면, 그때 자유당의 타격은 어떠했을까? 민주당의 성격은 여기서도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장면은 선거 승리를 위해 ‘신익희의 독살설’을 제기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신익희의 사망을 지켜 본 장면과 그 핵심 인물들은 그의 사망이 홍차가 아닌 뇌일혈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록 이승만 정권과 정적의 위치에 있었지만 신익희, 조병옥, 윤보선, 유진산, 허정, 장면, 현석호, 박순천, 이철승, 정일형 등과 같은 민주당 인사들은 지사(志士)이자 사상가의 면모를 가진 위인들이었다. 이들은 야당인사들이었으나 한국 정치사에 빛나는 스승이자 별들이었고 지성(知性)이며 양심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들이 대한민국을 사랑한 애국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민주당은 정통야당 세력으로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그 역사가 시작되었고, 군사정권 시대에는 민주화의 시대를 열어왔지요. 김대중 정부 이후의 10년 간 집권 기간에는 IMF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벤처기업을 육성하고, FTA를 시작하는 등 대한민국의 경제체제를 개혁, 개방형 국가로 이끌어왔습니다. 이런 것들이 민주당의 자랑스러운 역사인 것이죠. 그런데 이명박 정권 들어서 민주당은 갑자기 좌파운동권단체로 전락해 버렸어요.” 민주당의 김경재 전 의원(순천)의 말이다.

지금의 민주당은 분명히 중병을 앓고 있다. 2008년 과학적으로 터무니없는 광우병 파동 와중에서 민주당은 ‘미국소는 미친 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는 손학규 대표가 “강압적으로 입장을 강요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했고 2007년 자신들이 추진한 한미 FTA에 그대로 있던 ISD(국가소송제)에 대해서는 ‘사법주권 상실’이라며 어처구니없는 반대 주장을 하고 있다.

2009년 6월 한나라당 윤상현 대변인이 민주당의 사과를 요구하며 주장한 6개 거짓 선동항목은 ▲사기꾼을 앞세운 병풍 ▲기양건설 10억 수수 ▲BBK ▲광우병 ▲휴전선 총풍 조작 ▲안기부 예산 한나라당 유용 조작 등이었다. 모두 법원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민주당의 주장처럼 한나라당이야 그 뿌리가 3·15부정선거와 차떼기에 이르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시대의 양심을 자처하는 민주당이 오늘 그 이름을 다시 쓰면서도 이토록 추하고 불명예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원인은 무엇일까?

‘한국 보수세력 연구’에 이어 얼마 전 ‘한국진보세력 연구’를 출간한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前 문화일보 사장)는 한마디로 ‘민주당 내 종북주의와 인물난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 민주당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볼 필요가 있다.

민주당의 뿌리는 애국보수 한민당

민주당의 거두 송진우
민주당의 시작을 어디서부터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이견이 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민주당이 다름 아닌 대한민국 건국세력의 한 축이었다는 사실이다. ‘동지여, 모이라! 한국민주당의 깃발 아래로!’ 이 캐치프레이즈는 다름 아닌 1945년 9월, 오늘의 민주당을 있게 한 송진우, 조병옥, 윤보선, 윤치영 등이 중심이 돼 창당한 한민당의 것이었다.

개화당의 후예와 민족주의 우파를 모태로 한 이 한민당의 강령을 살펴보면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 완성 ▲민주주의의 정체 수립 ▲근로대중의 복리증진 ▲민족문화를 앙양하여 세계문화에 공헌 ▲국제헌장을 준수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 등이었다. 현재 민주당의 복지와 문화 세계평화의 이념은 바로 이 한민당의 강령으로부터 시작됐다는 평가다. 또 정책에서는 ▲국민 기본생활의 확보 ▲호혜평등의 외교정책 수립▲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신앙의 자유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등을 골자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었다. 이러한 한민당은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고 여운형 등의 건준과 박헌영의 인공 등에 반대했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정읍에서 처음 언급한 ‘단독정부론’에 대해 한민당은 신속한 지지 의사를 밝히며 “일부에서는 무슨 역적질이나 한 것 같이 선전하니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공식 논평을 냈던 일은 당시 한민당의 노선이 어떠했는지 보여준다.

문제는 단독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이 이 한민당 민족주의 세력을 내쳤으며 그로 말미암아 한민당이 비로소 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정통 야당의 길을 걷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후 민주당은 4·19 직후 제2공화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고 5·16 혁명으로 인해 다시 반독재투쟁의 야당의 길을 가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제2공화국의 민주당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대단했다는 사실이다.

4·19 직후 제5대 총선 민의원 의원 선거 결과를 보면 정당·단체별 당선자는 민주당이 의원정수의 75.1%에 해당하는 175명이 당선돼 과반수를 훨씬 넘었다. 무소속도 49명이 당선됐는데, 민주당의 신·구파 공천연합에서 낙천된 후보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민주당이 사실상 의석을 석권한 선거였으며, 자유당은 단 2석을 차지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혁신계 정당들도 한국사회당에서 1석을 차지한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멸한 것이어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민주당에 큰 호응을 보냈다. 참의원 의원 선거 결과 역시 정당·단체별 당선자는 민주당이 의원 정수 58명에 31명이 당선돼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무소속은 20명 당선됐으며 자유당은 단 4석을 얻는 데 그쳐 민의원 의원선거 결과와 마찬가지로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선자를 낸 정당.단체는 민주당을 포함해 6개에 달했다. 하지만 이 민주당 정권은 다시 신.구파로 갈려 권력투쟁에 휩쓸렸고 5·16을 맞았다.

AP와 인터뷰하는 한민당 김성수, 민주당의 창당 주역이다.

          거룩한 계보, 민주당은 누구인가?
 
민주당 장면 정권은 신구파간의 갈등와중에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은 자유당의 부패인사들을 5천명 가까이 처벌하고 제1공화국에서 진보당 사건으로 1959년부터 금지된 사회주의 정당 결성의 불법화도 풀어주면서 폭력혁명을 기도하지 않고 제도권 내의 야당을 지향한다는 조건부로 허용했던 점은 주목된다. 하지만 안보를 저해할 수 있는 공무원노조와 교사 노동조합 설립 추진운동은 불법으로 규정하고 관련자들을 파면, 해임시키기도 했다.

아울러 당시 민주당의 외교노선은 여전히 미국과의 공조를 튼튼히 하면서도 일본과 적절한 관계를 모색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민주당의 전통은 3김(三金)으로 대표되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지역감정을 동력으로 한 정치대결 구도로 말미암아 희석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노무현 정권의 종북주의 등장과 함께 뿌리째 뽑혀나갔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우리 의원들이 호남당 소리 듣는 방법으로 총선거를 치러서는 백전백패다. 18대 총선에서 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큰 이유 중하나는 우리 유권자들이 아직도 민주당을 판단하는 데 가장 큰 요소가 호남지역이라는 점이다.”

지난 5월 3일 민주당 김진표 의원은 당 원대대표에 도전하며 호남과 충청권 연합의 중요성을 그렇게 역설했다. 국민들의 눈에 비친 민주당은 여전히 호남당이기에 거대 여당인 한나라당을 지역구도로 이기기 어렵다는 주장이었다.

그러한 민주당의 주장은 2000년 총선에서도 등장했다. 당시 구원투수는 다름 아닌 97년 대선 독자 출마 후 민주당에 합류한 이인제였고 민주당은 그를 총선 사령관으로 임명해 처음으로 경기와 충청, 강원 등에서 후보를 내 전국정당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후 김대중 민주당 정권은 국정주도의 모멘텀을 쥐었고 영남후보론으로 탄력을 받은 노무현의 정권 재창출로 이어졌다.

따라서 신익희, 조봉암, 윤보선의 전국정당 민주당을 호남정당으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동시에 김대중의 카리스마는 민주당 내 인물이 자라나지 못하는 토양을 만들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결국 민주당은 자신의 외연을 호남에서 비호남으로 넓혀야 하는 숙명을 갖게 됐지만 동시에 그것은 민주당 내 호남 기득권의 약화라는 또 다른 권력투쟁을 수반해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민주당의 약점을 파고 든 것이 종북이념과 친노그룹의 영남주의 패권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바로 민주당의 큰 정신적 축인 민족주의를 민노당 계열이 ‘우리민족끼리’라는 김정일의 유혹에 팔아넘겼고 친노 주사파 386의 선동세력이 이를 다시 부산 영남권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민주당 전체가 종북주의라는 늪으로 견인돼 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 민주당은 제1야당의 입장에서 이번 10·26 서울시장 후보를 내지 못하고 종북계열이 주도하는 야권연대에 의지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나 당내에서 이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금기시되고 있다.

“좌파운동권단체는 민주당의 노선을 민주노동당 수준의 종북좌파노선으로 끌고 가려 할 것입니다. 반면 친노세력은 민주당의 호남 이미지를 버리고, 어떻게 해서든 부산경남 공략을 위한 이미지로 바꾸려 하겠지요. 문제는 남아 있는 정통 민주당 세력입니다” 김경재 전 의원의 분석이다.

한국정당의 계보 *출처:위키피아

민주당의 약점 파고든 종북주의

결국 민주당이 제도권 정당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민주당은 내년 총선과 대선 전에 그 수명이 다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떤 점에서는 이러한 민주당의 해체가 한국 정치 발전을 위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보수의 정체성을 잃은 한나라당 역시 제도권 밖의 야권연대에 패배하면서 새로운 분화를 겪을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정통 민주당을 떠올려 본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이뤄진 지금 우리는 어떤 정치지형을 탐색해야 할까. 이제 새로운 보수의 지형은 더 이상 지역주의와도 관계없고 권위주의와도 거리가 먼 그러한 것이 돼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보수는 과거 민정당이나 민자당과 같은 권위주의 영남 정당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민주당이 지역을 떠나 이념과 세력으로 분화된다면 한나라당도 그렇게 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권위주의와 중도실용이라는 회색노선으로 한나라당이 더 이상 존속하기 어렵다면 민주당의 해체와 분화는 한나라당과 보수진영에 한국 정치가 이제까지 걸어보지 못한 새로운 지형을 제시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안보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아닌 색다른 가치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전세계적으로 불어닥치고 있는 불평등(Inequality)의 문제가 본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보수진영에게 과거 안보주의로는 대답할 수 없는 새로운 질문이 될 것이다.

 그 대답이 복지일지, 아니면 성장일지 보수진영은 반공과 종북 비판을 넘어 토론의 장을 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유와 평등간의 의제를 논해야 한다는 이야기이고 원조 자유 보수였던 정통 민주당의 가치를 수용해서 호남의 자유보수 인사들을 해방하고 동참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다. (미래한국)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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