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영웅이 되는 사회를 기다리며
부자가 영웅이 되는 사회를 기다리며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1.11.16 15:3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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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기획 / 노블레스 오블리주1

그날 프랑스의 항구도시 칼레의 아침 공기는 차가웠다. 1374년 100년 전쟁 끝에 칼레를 정복한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3세는 영국에 끝까지 저항한 칼레시민 전체를 학살하기로 결심했다. 겁에 질린 시민들이 정복자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 광장에 모였다.“왕이시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탄원의 목소리는 젖먹이를 안은 여인네들과 노인들로부터 나왔고 젊은이들과 장년들은 고개를 떨궜다. 군중을 바라보던 에드워드3세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좋다. 그러면 너희를 대신해서 속죄할 6명의 시민을 지금 내 앞에서 결정하라. 그들을 처형하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왕의 말에 광장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할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다. 제비를 뽑자는 사람도 있었고 자식이 없는 노인이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때 칼레의 대부호 생 피에르가 군중들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잠시 후 그의 뒤를 이어 법률가와 고위 관료들이 걸어 나오자 군중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렀다고 연대기 작가 장 프와사르는 적었다.

에드워드3세가 이들을 처형하려 할 때 임신 중인 왕비 필리파가 전갈을 보내왔다.

이들을 처형하게 되면 태아에게 좋지 않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왕비의 말에 영국왕은 이들의 처형을 취소했다.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은 바로 최후를 기다리는 이 여섯 명의 시민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사회적 지도층의  헌신과 모범 사례로 종종 인용된다. 물론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에드워드3세는 처음부터 이들을 죽일 의사가 없었고 칼레의 전통에 죄를 참회하는 제의적 연극이 있었으며 에드워드3세 앞에서 그러한 연극이 공연됐다는 것이 팩트다. 하지만 칼레의 시민 이야기는 현대의 수많은 연극과 영화, 소설에 영감을 줘 오늘에 이르고 있다.

로마와 미국의 번영 이끈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 칼레의 시민이 픽션이라면 논픽션도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제국 이야기’에서 로마제국 2천년 역사를 지탱해온 힘이 다름 아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말한다. 로마의 귀족은 전쟁이 벌어지면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전장으로 나가 선봉에 섰다. 한니발과 치른 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의 최고 지도자에 속하는 집정관(콘술)의 전사자 수만 13명이었고 500년 동안 원로원의 수는 1/15로 줄었다. 귀족들이 전쟁에 참가해 대부분 전사했기 때문이다. 로마 귀족들은 국가의 대규모 공공사업이나 빈민 구제가 있을 경우에도 서로 나서서 자신의 재산을 희사했다. 로마는 그러한 귀족의 이름을 따서 공공건물에 이름을 붙였다. 고대 로마의 유명한 도로 아피아 가도(Via Appia)는 재무관 아피우스의 이름을 땄고 라티나 가도(Via Latina), 티부르티나 가도(Via Tiburtina) 등도 그랬다. 이러한 로마의 전통은 카네기홀이나 존스홉킨스 병원처럼 미국의 공공 건물에 희사자의 이름을 붙이는 관례로 이어져 왔다.

물론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뉴욕시민의 수돗물은 록펠러家가 무상으로 공급한다. 1년에 뉴욕시로 들어가는 돈이 무려 우리 돈으로 12조원(1998년 기준). 현재까지 50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카네기가 젊은 시절 ‘부의 축적은 가장 나쁜 우상숭배’라고 스스로 각서에 쓰고 그의 나이 65세에‘부자로 죽는 것은 수치스럽다’며 5억 달러를 사회에 환원한 이래로 미국의 부호들은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명예로 여겨왔다.

록펠러(3억5천만 달러. 1913년), 포드(5억 달러. 1936년)에 이어 빌 게이츠, 테드 터너, 워렌 버핏 등이 그랬고 미국에는 5만6천개의 재단이 사회적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 부호들의 기부와 자선은 그동안 미국의 높은 불평등 사회를 통합하고 갈등을 방지하는 사회적 기능을 해왔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어느 정도일까. 우선 부자들의 기부문제는 둘째 치고 가장 지탄받는 부분이 바로 사회 지도층의 병역의무 논란이다. 지난 천안함 사건 때 청와대 안보 벙커에 모인 주요 인사들 중 국방부 장관을 제외하고는 군필자가 전무했다는 점이 시중에 화제가 됐다.

임영호 자유선진당 의원은 지난해 국감에서 “현재 현역 복무 비율은 89.8%인 반면 면제자는 2.4%에 불과하다”며 “하지만 현 총리와 장관들의 군 면제 비율은 24.1%에 달해 일반 국민의 10배가 넘는다”고 질타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김황식 총리까지 합해 당·정·청 수뇌부 모두 군 면제를 받은 셈이 됐다. 김유정 민주당 의원이 이를 두고 “한 마디로 ‘병역면제 삼총사’”라고 비난했을 때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꿀먹은 벙어리였다. 무엇보다 국민들을 실망시키는 것은 재벌가의 병역회피 문제였다.

실제로 재벌가 자녀 중에는 병역면제자가 눈에 띄게 많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은 허리디스크로,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과체중(신검 당시 104kg, 면제 기준은 103kg)으로 면제 받았고, 이재현 CJ그룹 회장, 조정호 메리츠증권 회장 등도 질병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정의선 기아차 사장은 담낭 절제로 면제를 받았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과체중으로, 최재원 SK E&S 부회장은 근시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과 신동주 일본 롯데 부사장은 일본 국적으로 병역면제를 받았다. 신 부회장은 지난 1955년 2월 일본에서 재일교포로 태어나 같은 해 4월 한국 호적에 이어 10월에는 일본 호적에 올렸다. 이후 국적문제가 불거지자 41세가 된 1996년 8월에야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신동주 부사장도 1996년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2008년 한 방송사의 재벌가 친인척 147명의 병역실태를 조사한 결과 면제자 비중은 33%였다. 전체 병역 면제율이 2.4%라는 점과 비교해보면 확실하게 높은 수치다.

100리안에 굶는 사람 없게 하라던 최부자

영국의 전통 학교 이튼 칼리지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해 전사한 학생들의 기념비를 제작한 사실과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1945년 조국을 위해 또래 소녀들이 봉사하고 있는 영국 여자 국방군의 구호품 전달 서비스부서에서 군복무했던 사례들은 유럽 지식인들과 귀족들이 사회적 의무인 병역의무를 실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사회 지도층의 병역과 관련해 6·25 때 전사한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毛岸英)의 이야기는 좌파들 사이에서 일종의 교양과목처럼 회자된다. 아들을 잃은 모택동은 ‘내가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아들들을 전쟁에 나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며 오열했다는 이야기는 우명하다. 모택동은 모안영의 시신을 중국으로 가져오지 않고 북한에 있는 지원군 열사능에 묻었다. 중국과 북한 간에 혈맹의 징표로 삼은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은 있다. 조선 정조 당시 흉년으로 인한 기근으로 식량난에 허덕이던 제주도 사람들을 위해 전 재산으로 쌀을 사서 분배한 거상 김만덕, 군수업으로 번 막대한 재산을 독립운동에 대부분 사용한 최재형,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고 민족적 자립을 위해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을 뿐만 아니라 국가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도 활발히 펼친 김좌진, 백리 안에 굶는 이가 없게 하라는 신념을 사회복지로 실천해 민중들의 생존권 투쟁이 치열했던 19세기에도 화를 입지 않은 경주 최부잣집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미국에서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 회사를 운영할 당시, 녹두를 공급하던 중국 상인이 탈세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주식회사로 설립하면서 도덕적 해이를 경계했고 정경유착, 탈세, 마약생산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번 돈으로 유한공고를 설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 지도층의 전통은 수시로 언론에 등장하는 재벌가들의 추문과 도덕성에 그 빛을 바랜 지 오래다. 2008년 검찰조사 결과 드러난 재벌 2,3세 주가조작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외제차 딜러 출신 조영훈 씨 주도 아래 두산가(家) 박중원 씨, 노신영 전 총리의 아들 노동수 씨, 선병석 전 서울시테니스협회 회장이 속칭 ‘바지 사장’으로 나서 649억원의 횡령·배임을 저지르고 437억원대 분식회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해외로 돈을 빼돌려 외국인이 자기 회사 주식을 사는 것처럼 위장하고 일반 투자자의 유상증자 대금으로 개인별장을 짓기도 했다. 지난 9월 재벌(家) 3세 구본현 전 엑사이엔씨 대표(43)가 회사의 추정 매출액을 거짓으로 꾸미고 사채업자들과 함께 주가를 조작하는 수법으로 시세차익 253억 원을 챙긴 혐의로 구속 기소된 사건은 불황에 허덕이는 국민들에게 실망을 넘어 분노를 선사했다.

재벌가들의 인권 유린도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지적됐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유흥주점 직원들과 시비가 붙은 아들의 복수를 한다며 사조직을 동원해 그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고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사촌동생이자 물류업체 M&M의 전 대표 최철원 씨는 재벌가 2세의 고용승계 문제로 마찰을 빚은 탱크로리 기사를 야구방망이로 때리고 속칭‘맷값’으로 돈을 준 것으로 알려져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이러한 재벌 2, 3세의 탐욕과 약자에 대한 무시는 좌파진영의 체제부정 논리와 운동에 적지 않은 동력을 제공한다. 자유보수진영이 제 아무리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운동과 논리를 전개하더라도 이러한 기득권층들의 타락과 오만은 그 많은 시민들의 노력을 한 순간에 물거품을 만드는 파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 사회에 오블레스 노블리주는 이제 새로운 차원에서‘가진 자와 쥔 자의 도덕 재무장’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탄력을 받고 있다. 

“강요가 아니라 기부자를 영웅으로 대하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미국에서 조지 소로스의 기부는 테드 터너에게 영향을 줬고 테드 터너는 빌 게이츠에게, 빌 게이츠는 워렌 버핏에게 영향을 줬죠. 그들은 서로 경쟁적인 기부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존경받는 부자의 명예를 추구했던 것이죠.”

예종석 한양대 경영학 교수의 주장이다. 우리 사회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비난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권력의 눈치를 보기 위한 그런 식의 기부가 아니라 부자들이 명예를 위해 경쟁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기부하는 부자를 영웅으로 만들자

실제로 지난 2006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8천억을 출연해 장학재단을 만든 것이나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사재를 털어 사회에 기부한 것은 지난 과거의 불법행위에 대한 사죄였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런 까닭에 천문학적인 재산의 사회적 환원에도 국민들의 반응이 심드렁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부자들도 마인드를 바꿔야 할 때다. 동시에 언론들도 부자들의 자선을 보다 많이 소개할 필요가 있다.

지난 2000년 10억 원의 출연금으로부터 시작해 현재 5000억에 달하는 장학재단을 만든 관정 이종환 교육재단은 한국의 록펠러라고 불린다. 하지만 그를 아는 국민은 드물다. 관정 이종환은 평생을‘전쟁하듯’기업을 일구며 재산을 모았지만 그것을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했다. 이런 부호들이 우리 사회에 영웅이 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본지 <미래한국>은 한국의 부호들과 기업들의 자선과 기부활동을 앞으로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에도 카네기와 록펠러, 테드 터너와 빌 게이츠 같은 부호들이 탄생하려면 자유시장경제의 발전 못지 않게 부자들을 존경하는 사회문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부호들이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날을 기대해 본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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