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셰비키와 민노당, 그들의 공통점
볼셰비키와 민노당, 그들의 공통점
  • 미래한국
  • 승인 2011.11.24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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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정당정치가 위기라고 한다. 한나라, 민주 양당의 상황을 보면 달리 보아야 할 이유가 없다. 2040세대는 불문곡직하고 ‘한나라’라는 이름만 들어도 알레르기를 일으킨다. 50대 이상에서 그나마 나오는 지지도 적극적이기보다는 대안이 없다는 분위기가 짙다. 게다가 그마저도 당 자체보다는 다분히 박근혜 개인에 대한 일말 기대 덕분이다. 한나라당은 이미 국민적 왕따다. 그 자신만 이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민주당이라 해서 별 달리 나은 처지가 아니다. 서울시장 보선에서 한나라당을 꺾었다지만 그 승리는 자신들의 것이 아니다. 한나라당은 그래도 후보라도 냈지만 민주당은 후보도 내지 못했다. 위기가 아니라 지리멸렬이라 해도 반론의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런데 이 같은 위기와 전혀 무관한 당이 하나 있다. 민노당이다.

좌익 혁명에서 의석수는 숫자에 불과

국회의석 정수는 299석, 이중 한나라당이 169석으로 과반수이고 민주당이 87석이다. 민노당의 의석수는 6석, 비교가 될 숫자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숫자에 불과한 건 나이뿐이 아니다. 이 나라 정치판에서 의석수는 이미 정치적으로는 아무 의미 없는 그냥 숫자에 불과하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판을 쥐고 흔드는 당은 다수당이 아니라 이 6석짜리 정당이다. 민노당이 FTA를 반대하면 민주당도 그래야 한다. 6석 민노당이 87석 민주당의 고삐를 쥐고 있고 다시 한나라당은 이들 패거리 연합에 의해 계속 왼쪽으로 끌려가는 게 작금 한국정치의 기본 구도다. 한국의 헤게모니 정당은 단연 민노당이다.

 다수결의 원칙은 선거제도와 의회정치의 최소한의 기반이다. 이게 무너지면 굳이 투표를 해서 다수 소수를 가릴 이유도 사라진다. 이쯤 되면 대의제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다. 당혹스러운 상황이라고? 하지만 민노당 같은 좌익 정당에게는 이게 결코 낯선 상황이 아니다. 좌익 혁명운동에는 의석수나 다수 소수 문제 따위는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전통이 있다.

볼셰비키는 다수파라는 뜻이다.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대회에서 마르토프와 레닌의 노선 대립이 있었는데 다수의 지지를 받은 레닌파를 볼셰비키라 부르면서 유래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다수파였던 때는 당시 잠깐 뿐이었고 실제로는 언제나 소수파였다.

소수 볼셰비키의 집권 과정

볼셰비키는 1912년 독립한 당이 될 때까지 다시는 당내 다수파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1917년 10월혁명으로 권력을 잡을 때까지 러시아의 혁명운동 세력 전체에서도 볼셰비키는 언제나 소수파였다. 1917년 2월혁명 당시 볼셰비키는 상황 주도는 고사하고 레닌이 러시아 국내에 있지도 못했다. 당시 주도권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에 있었다. 1917년 6월 열린 제1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 833명 중 사회혁명당이 285명, 멘셰비키가 248명이었다. 반면 볼셰비키는 105명에 불과했다.

볼셰비키의 기회는 짜르파 코르닐로프의 군사 반란 기도 덕이 컸다. 반동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자 강경파 볼셰비키의 영향력이 확대된 것이다. 자신감을 얻은 볼셰비키는 드디어 1917년 10월 25일 무장봉기로 케렌스키 정부를 전복,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때에도 전체 소비에트 차원에선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세력이 여전히 강력했다. 그런데 볼셰비키는 곧 멘셰비키보다는 우위가 확고해졌다. 10월 25일 밤 페트로그라드에서 전 러시아 소비에트 제2차 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멘셰비키 등이 볼셰비키의 봉기에 의한 권력 장악을 맹렬히 비난하고 철수한 것이다. 레닌은 내심 만족해했다.

1917년 11월, 레닌은 케렌스키 정부 시절부터 예정된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이미 장악한 상태였지만 선거 결과는 이를 무색케 했다. 총 707석 중 사회혁명당이 410석을 차지해 과반으로 제1당이 됐는데 정작 볼셰비키 의석은 175석으로 4분의 1에 미치지 못했다. 레닌은 이 딜레마를 간단히 해결했다. 선거 결과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다.

1918년 1월 5일 제헌의회가 개회됐으나 볼셰비키는 그 다음날로 강제 해산했다. 레닌이 내세운 이유는 “노동자 권력에 어울리지 않는 부르주아 의회에 시간 낭비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수수께끼는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던 사회혁명당 태도다. 그들은 왜 그토록 순순히 모든 것을 볼셰비키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강온파 분열에 있었다. 레닌에 의해 타도된 케렌스키도 사실은 사회혁명당 소속, 어떤 의미에선 임시정부는 사회혁명당 정권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사회혁명당의 강경파들이 레닌과 볼셰비키의 입장으로 계속 기울어져 갔다는 것이었다.

볼셰비키는 어떤 경우에도 러시아 전 인민을 대표한 적이 없었다. 당시 러시아 인민의 절대 다수는 농민인데 볼셰비키는 자처한 바 그대로 노동자 계급의 전위 정당일 뿐이었다. 토지 문제와 관련한 볼셰비키의 강령도 원칙적으로는 국유화였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농민에게 즉각적 토지분배를 약속했다. 즉각적 평화도 약속했다. 병사들은 또 다른 면에서 농민이기도 했다. 10월혁명 슬로건 “토지, 빵, 평화!” 농민층에 대한 겨냥이 가장 큰 비중인데, 그 구체적인 정치적 과녁은 그에 기반을 둔 사회혁명당을 분열시키고 회유하는 것이었다.

레닌의 의도는 잘 적중했다. 사회혁명당 강경좌파들은 토지분배는 늦추면서도 전쟁은 계속하는 케렌스키에 큰 불만을 품었다. 그런데 볼셰비키는 “즉각적 토지분배, 즉각적 평화”를 약속하고 사회혁명당의 동지임을 자처했다. 이들이 케렌스키의 몰락을 방관한 것은 당연했다. 볼셰비키는 농민층에 큰 기반을 가진 사회혁명당을 선거에서는 결코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10월혁명으로 사회혁명당의 온건파 즉 反볼셰비키 파는 몰락했다.

이후 사회혁명당 좌파들은 볼셰비키 정권에 참여했다. 그러나 사회혁명당은 결국 완전 몰락했다. 잠시 분배됐던 토지는 모두 다시 국유화되고 잔존 사회혁명당원들은 이에 반발, 싸우다 죽거나 외국으로 망명하거나 혹은 볼셰비키로 전향하기도 했다.

다수당의 패배 이유…강온파의 분열

볼셰비키의 승리는 자신들의 이름처럼 다수파라서가 아니라 소수였지만 잘 조직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화뇌동하고 우왕좌왕하는 무리는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조직된 소수에 이기지 못한다. 눈앞의 정치적 계산에만 몰두해 대중에 아부하기만 급급해 하는 부류들은 애초에 상대가 아니다.

민노당을 비롯한 한국의 종북좌익세력들은 민노총 전교조에다 학계 문화계 언론계 등 사회 거의 전 분야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공무원 심지어 검사 판사 군 장교에까지 직간접적 동조세력이 있다. 바로 이것이 6석 밖에 안 되는 의석으로도 국회를 휘젓고 서울역, 시청 앞, 광화문 등을 난장판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민노당 참여당 진보신당 등에도 야권 통합을 제안하고 있다. 자신감인지 뭘 모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실제 실력을 감안하면 이건 민주당이 민노당 등에 흡수 통합되는 것이다. 이미 내부적으로 종북좌익에 너무 깊게 침식된 탓인지 모르겠지만 민주당의 원뿌리를 잊지 않는 세력이 있다면 그냥 두고 보아선 안 된다. 좌익의 본질적 속성 중 하나는 숙청이다. 자기들끼리도 그런데 하물며 뿌리가 다르다면! 씹다 버린 껌이 되지 않으려면 이제라도 제정신을 차려야 한다.(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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