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이 비상식적으로 쓰일 때
상식이 비상식적으로 쓰일 때
  • 김정래
  • 승인 2011.12.06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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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래 교수의 세설직론]

당연히 공부하러 온 학생들에게 강의 시간에 너무나 뻔한 내용을 가르치는 데서 스스로 적지 않은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내용은 대략 이런 것입니다. ‘선생은 가르치는 사람이다.’ 이 말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이른바 진보주의자들이 잘못 잡아놓은 설정 때문입니다.

교사는 교과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듀이의 주장에서 잘 알 수 있듯이, 교사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어울려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인성교육’을 들고 나와 교과학습을 경시하고 급기야 슬그머니 그릇되고 편향된 이념을 주입시킵니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딱딱한 공부 대신에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내용을 접하게 되지만, 은연중에 그릇된 역사관이나 이념을 주입 당하게 됩니다.

상식은 원만한 판단능력, 도덕적 인격을 갖춘 것을 의미

다른 한편 ‘학교는 공부하러 오는 전통이고 제도이다.’ ‘학생은 선생님과 사회계약을 하러 학교에 온 존재가 아니다. 공부하러 온 존재이다’와 같은 내용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처지는 다소 자괴감마저 느낍니다.

잘 아시다시피 좌파교육감이 주도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 체벌금지 지침 같은 것들이 아이들로 하여금 학교를 ‘이상한 곳’으로 인식하게 하고, 자신이 대등한 관계에서 교사와 학교당국과 ‘계약’을 할 수 있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상식적으로 습득한 민주주의 개념은 그릇되고 편향된 것으로 변질됩니다. ‘참여’를 명분으로 한 이른바 광장민주주의에 함몰해 거리로 나가 시위하는 것을 당위처럼 여기게 됩니다. 모든 것은 투표와 선거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발상은 이미 386세대가 만들어놓은 교육감 직선제에서 구체화됐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만연된 만민평등의 사상이 급기야 결과평등사상인 ‘레벨러(leveller)’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또 진보사상은 낭만주의의 문명퇴행사상을 가교로 해서 기존제도를 허물어버리는 문명파괴주의로 변질됩니다. 이 극단주의는 원시공산주의를 숭상하는 ‘디거(digger)’를 연상케 합니다. 주지하다시피 레벨러와 디거는 17세기 영국의 내란 시기에 잠시 나온 병폐입니다. 이 말은 우리 사회가 내란에 준하는 상태가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냅니다.

다시, 당연하고 뻔한 내용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왜 이런 내용을 굳이 강조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문제의 핵심은 ‘상식’에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존중해야 할 ‘상식’을 이상한 방향으로 전이시켜 비상식적인 결론으로 유도하기 때문에 비상식적으로 전이된 내용을 상식으로 돌려놓으려다 보니 위와 같은 뻔한 내용을 반복해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상식이 어떻게 변질되고 전이돼 해악을 미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상식(common sense)’은 그 말의 성립과정에서 알 수 있다시피 개인 내적(intra-personal) 의미를 갖습니다. 오늘날 통용되는 개인 간(inter-personal)의 의미는 나중에 생긴 것입니다.

전자는 라틴어 ‘sensus communis’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이 가진 감각의 공통적 요소가 상호 조화롭게 통합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식’은 원만한 판단 능력을 가진 사람, 나아가서 도덕적으로 인격을 갖춘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반면에 후자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지식이나 신념 따위(knowledge and belief shared by many)를 지칭합니다. 따라서 사람 상호간 공감하는 능력 또는 영역을 가리키기도 하고, 사람들의 공적 관심사에 대한 공통의 견해 등의 뜻을 지닙니다. 고대 로마 시대에 발달한 공화정의 어원인 ‘레스 푸브리카(res publica)’는 상식의 이러한 측면에 가장 부합하는 개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처럼 ‘상식’의 두 가지 의미는 모두 순기능을 합니다. 특히 개인 간의 의미는 상대방의 의견을 상호 존중해 합의를 도출하는 정신을 도출하는 민주주의의 정신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기능은 뒷전으로 빠지고 비상식적으로 전이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살펴보기 전에 상식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평범함에 기초할 때 천박해질 우려 있다

상식 형성의 조건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상식이 형성되는 공간인 도시가 발달돼야 합니다. 도시는 물적인 교류와 함께 다양한 의견과 가치관의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즉 ‘시장’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상식 형성의 근원은 고대 희랍의 도시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둘째, 상식이 전달되는 매체가 있어야 합니다. 근대사회의 형성과 함께 인쇄술이 발달, 보급됐다는 사실은 상식의 형성과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실제로 18세기 말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은 팜플렛 인쇄전문가였습니다. 그의 <상식>이 상식이 돼 전파된 것은 인쇄술 덕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트위터나 인터넷 등 SNS의 매체 발달로 상식이 해괴하게 전이되는 계기를 가져다줍니다. 셋째, 상식은 그것을 공유하는 건전한 개인, 즉 합리적인 개인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개인이 실종되고 레벨러의 평등민주주의는 개인들로 하여금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흑백논리의 이분법으로 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상식’이 어떻게 비상식적인 것으로 전이되는지를 좀 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상식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지닌 지식이라는 의미에서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의미로 변화합니다. 이는 나중에 관념론과 결합해 상식이 아닌 이상적인 관념으로 변질하는 단초를 제공합니다.

둘째, 이와는 반대로 상식은 지극히 평범하거나 당연해 마치 ‘자명한 것’처럼 여겨지는 지식, 신념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경우입니다. 이를테면, 내적 의미 차원에서 감각의 통합과 원만한 판단능력은 오늘날 요구하는 융합의 정신으로 승화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화와 감각적 편리함으로 퇴색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원만한 사고와 결합된 폭넓은 사고는 피상적 수준의 사고로 격하되고, 심사숙고해야 할 가치판단 능력은 편집광적 태도나 편협한 사고 패턴으로 변질됩니다.

셋째, 상식이 평범함에 기초한다는 사실은 경우에 따라서 천박함으로 치닫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상식은 세속적 평범함(secularism)에 기반을 둔 것이지만, 이것이 천박함(vulgarity)으로 전이가 됩니다.

예컨대, 상당수 젊은이들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몰입하면서 습득한 지식은 대개 피상적이고 감각적이기 일쑤입니다. 댓글달기처럼 토론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 실상을 파보면 심도 있는 대화와 사고가 아니라 욕설이나 감성을 자극하는 선동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상식의 전이’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심성 도야에 요구되는 언어능력이나 사고능력 배양은 게을리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고능력의 토양이 되는 상용한자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적 기능이 왜곡되면 법치를 부정하게 돼

넷째, 평범한 것을 수용하는 능력은 대부분 감성에 호소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상식은 감성에 기초한 대중의 심리에 기댑니다. 윤리학에서 이에 대한 논란이 많지만, 감성은 가치판단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흄의 도덕감정론(moral sentiments)은 동감(同感, sympathy)에 따라서 가치판단이 일어난다는 이론을 제기한 바 있지만, 작금의 상식은 흄의 이론과 멀어 보입니다. 오히려 상식은 포퓰리즘의 인식론적 토대를 제공해 주는 듯합니다.

다섯째, 상식은 기존 제도에 도전해 진보를 향한 ‘투쟁동력’을 제공합니다. 기존 제도와 권위에 대한 비판은 토마스 페인이 미국 독립혁명 당시 영국의 그릇된 정치 제도와 관행의 개혁에 불을 지핀 것을 보면 ‘상식’의 일차적 기능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반작용으로 개인 간의 차원에서 ‘상식’이 당초 의도한 ‘대중의 지혜’는 기존 제도와 권위를 허무는 도구로 전락을 했습니다. 특히 기존 제도에 대한 도전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훼손하는 데 맞춰져 있는 듯합니다.

여섯째, 상식의 비판적 기능이 왜곡돼 현 상황에서 벌어지는 양상은 상식의 오용 양상을 드러냅니다. 상식의 오용이란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해서 ‘직접 참여’를 내세우면서 급기야 법치를 부정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을 지칭합니다.

이렇게 되면 상식은 ‘대중의 지혜’가 아니라 대표성 없는 군중심리가 됩니다. 일부 군중의 광장민주주의는 ‘대중 참여’라는 미명으로 사회질서의 교란과 파괴를 일삼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파동입니다. 현재 그 ‘미친 소’ 때문에 광우병에 걸린 사람이 과연 있는지 확실하게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엄연히 헌법에 명기된 국회비준 사항을 거리로 나가 ‘호소’하는 야당의 정치적 작태나 국민투표에 묻자는 야당대표의 반(反)헌법적 발상으로 이어지는 것도 대표적인 예입니다. 지금도 일부 소수세력이 한.미 FTA 반대를 선동하는 것이 그나마 먹혀들어가는 것은 상식의 그릇된 전이 때문입니다. 

일곱째, 앞서 상식이 포퓰리즘으로 전이되는 것을 지적했는데 이는 다시 포퓰리즘이 사회에서 존중해야 할 전문성을 허무는 상식의 남용으로 작용하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상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는 중지(衆智)가 평범함에 머물지 않고, 변질돼 전문성을 폄하하고 아예 무시하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를테면 ‘의사표현의 자유’, ‘직접참여’가 민주주의 가치를 상식적으로 수긍한 가치인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심층적으로 보면 비상식에 함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로 선출이라는 민주적 상식이 교육감을 포함한 전문직도 선출해야 한다는 발상으로 이어집니다.

여덟째, 전문성을 무시하고 직접참여만을 강조하면서 ‘상식’은 급기야 보편성을 넘어서 절대적 가치 판단의 기준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다수의 민중이 공유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중의 지혜’가 추상적인 집합의 개념으로 변질됩니다.

이제 상식에 기초한 지혜는 사라지고, 이윽고 구체적인 개인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복리를 억압하고 강제하는 절대적이고 추상적인 규범만이 남게 됩니다. 여러 번 말씀드리는 것 같습니다만, 루소의 일반의지는 여기에도 큰 몫을 담당합니다. 이쯤 되면 ‘인민’이라는 추상명사가 도덕적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앞서 열거한 권위, 제도, 전문성은 모두 사라지고 전체주의 전조가 드러나게 됩니다. ‘인민재판’이나 ‘홍위병’이 출현하는 것은 이와 같은 상식의 전이 때문입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인터넷 재판’은 전문성도 객관성도 없는 신판 인민재판입니다.

전략적 투쟁도구로 전락

글 초두에 상식이 순기능을 한다는 것을 적시한 바 있습니다. 그 예로 상대방의 의견을 상호 존중해 합의를 도출하는 정신을 도출하는 민주주의의 정신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민주주의 정신의 구현이라는 순기능 이외에도 상식은 자유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자유를 행사하고 향유하는 데 상식은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됩니다. 즉 개인의 사상, 양심, 표현의 자유를 신장하는 수단이 상식입니다. 사람들이 상호 공유하는 지식이나 신념이 없으면, 이러한 중요한 자유의 가치들은 전파되거나 실현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이 특권층을 부정하는 ‘전략적 투쟁도구’로 전락합니다. 여기서 ‘특권층’이란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부류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식의 비상식적 전이를 모사(謀事)하는 사람들에게 특권층이란 전문가, 헌법 기관과 그 종사자, 그리고 법치질서 유지하는 사람들을 싸잡아 이르는 말입니다. 물론 이 때 동원되는 말이 ‘인민’, ‘생존’, ‘투쟁’과 같이 ‘상식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자극적인 용어들입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인민, 인민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법치질서이고, 자유민주주의 정신입니다. 아니면 이들이 지향하는 것은 폐쇄적인 국수주의가 됩니다. 상식적으로도 통용되지 않는 괴담을 퍼트려서 한·미 FTA가 체결되면 미국의 식민지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논법이라면 이미 발효된 한·EU FTA로 인해 우리나라가 유럽의 속국이거나 식민지가 돼야 합니다. 그러면 유독 한·미 FTA만을 반대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 대목에 이르면 다시 뻔한 내용을 학생들에게 다시 가르쳐야 한다는 당위성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도시(city)’와 ‘문명(civilization)’은 같은 어원에서 나온 것이며, 개방과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할 때 우리는 번성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도 학생들이, 또 우리 젊은이들이 상식의 비상식적인 전이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입이 부르트더라도 뻔한 내용을 백 번, 천 번, 아니 만 번이라도 되뇔 수 있습니다.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다.’ ‘선생은 공부 가르치는 사람이다.’  (김정래 편집위원·부산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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