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률과 자본주의
문맹률과 자본주의
  • 이강호
  • 승인 2011.12.06 15: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강호의 역사이야기]

‘뿌리 깊은 나무’라는 드라마가 꽤 인기다.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왜곡이 너무 심해 사극이라는 용어가 어울리기 힘들다. 하지만 그냥 픽션이려니 하고 보면 재미는 있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관계의 시비곡절이나 허구적 재미와는 별도로 생각해볼 대목이 좀 있다.

극에서 세종은 백성들과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문자 창제에 몰두하고 사대부들은 그것이 자신의 기득권을 해치는 것으로 보고 저지하려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대부의 힘은 근본적으로 문자를 읽고 구사하는 능력에 있다. 그런데 새로운 문자 덕분에 모든 백성이 글을 읽고 쓰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때도 사대부의 위치가 유지될 것인가?” 극중에서 한 사대부의 독백이다. 물론 타협적인 부류의 사대부들도 있다. “새로운 문자를 반포해본들 어차피 널리 쓰이지 못할 것이다.”

극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 역사의 결말은 이미 잘 알고 있다. 훈민정음은 세종 28년인 1446년 반포됐다. 그런데 훈민정음이 국문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그로부터 무려 450년 뒤인 갑오경장(1894~ 1896) 때였다.

한글은 실로 경이적인 문자임에 틀림없다. 인류 역사상 만든 사람과 창제 반포일이 명확한 문자는 한글이 유일하다. 존재하는 모든 문자 가운데 가장 과학적이고 사용하기 편리하다는 점에 아무도 이론을 달지 않는다. 너무나 배우기 쉬워 빠르면 한나절이면 깨칠 수 있다. 이렇게 과학적이고 쉽고 편리한 문자가 450년간이나 사장돼 있었다. 일제하에서도 모진 시기를 견뎌야 했으니 공백은 더 길다.

문맹률은 문자의 난이도 때문이 아니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78% (혹자에 따라선 90%)에 달했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말과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지만 한글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이다. 그런데 그렇게 문맹률이 높았다. 극중 예측을 빌자면 어차피 널리 쓰이지 못할 것이라는 게 결국 맞았던 셈인데 왜 그랬을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문맹률이 문자의 쉽고 어려운 정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한 판단이 아니다. 일본은 한자와 가나를 함께 쓰고 있지만 문맹률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대만은 여전히 번체자를 사용함에도 문맹률은 2%가 조금 넘을 뿐이지만 중국은 간체자를 쓰면서도 공식적으로도 문맹률이 20%선이다. (실제로는 훨씬 더 높다고도 한다.)

알파벳을 쓰는 서양의 경우를 보면 이 점은 더욱 확실해진다. 알파벳은 한글보다는 못하다 해도 결코 배우기 힘든 문자가 아니다. 그러나 알파벳은 그 역사가 로마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감에도 근대 이전까지는 서양도 대부분 문맹이었다.

고대 사회에서의 문자생활에 대한 윌리엄 해리스 콜럼비아대 교수의 연구가 있다. 그에 따르면 근대 이전 문맹률이 가장 낮았던 시기와 장소는 그리스 고전문학이 꽃피었던 BC 5세기의 아테네다. 그러나 당시 그곳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고작 10~15%에 불과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최상의 조건 속에서도 인구의 85~90%가 문맹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상황은 고대 로마와 중세 유럽을 거치는 내내 큰 변화가 없었으며 문맹률은 오히려 더 높아지기까지 했다. 중세 유럽 시기 문자생활은 거의 성직자 계급의 전유물이었으며 귀족과 기사 계급은 문자를 모르는 것을 전혀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농노들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구텐베르크에 의해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이러한 상황이 변화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다. 하지만 통념과는 달리 인쇄술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는 없었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의 입장에서 문자생활은 전혀 급한 문제가 아니었다.

문자해득률이 높아진 것은 자본주의 덕분

문자해득률이 본격적으로 높아진 것은 근대 자본주의에 의한 산업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직 산업화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그 사회의 자원을 다른 분야에 우선적으로 투자하는 것이 당연했으며 개인적으로도 굳이 문자를 익히는 게 시급한 과제는 아니었다.

국가가 문맹 퇴치에 적극 나서게 된 것은 모든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이 국가경제에 큰 이익이 된다는 점을 인식하면서부터였다. 개인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자능력이 자신의 경제생활상의 이익에 필수적임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사람들은 문자 습득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예외적이라면 상인 계층 정도였다. 상인은 근대 자본주의 이전에도 농민과 달리 계산능력과 장부작성 능력이 중요했다. 부르크(城) 내에 거주하며 때로 원격지 거래도 담당했던 이들 계층이 나중에 근대 부르주아지로 성장한다. 따지고 보면 이 또한 근대 자본주의와 무관치 않다. 막부시대 일본의 경우도 비슷하다. 도시에 거주한 상인 수공업자 계층인 조닌(町人정인)들에 있어 문자능력은 필수였다. 이들은 신분은 낮았지만 부를 축적했을 뿐 아니라 조닌 문화라는 세련된 도시문화를 구축하기도 했다.

세종의 바람이나 자신의 기득권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한 사대부들의 우려와는 상관없이 조선은 내내 백성 대부분이 문맹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농업 위주 경제였고  대다수 백성이 농민이었다. 이들에게 문자는 한자든 훈민정음이든 결코 중요하지 않았다. 문자생활의 가장 중요한 용도는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 사서삼경을 익혀 과거시험을 치는 데 있었다.

이때 필요한 것은 한문이었지 훈민정음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대다수 농민은 과거를 칠 자격도 없었다. 쉬운 글이라고 익혔다 해본들 달리 쓸 데가 없었다. 농사에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굳이 배울 동기가 없었다. 훈민정음은 근대가 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잊힌 글이 돼 있었다.

해방 직후 78%에 달했던 한국의 문맹률은 이승만 대통령 집권 기간 동안 극적으로 낮아져 10% 이하로 떨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산업화가 본격화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다. 하지만 문자해득률의 측면에선 이미 그 이전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충분히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더욱 낮아져 사실상 0%로 보아도 좋을 정도다.

다만 너무 한글 전용에 치우쳐 한자 문맹이 늘어난 게 문제다. 한자교육을 한다고 문맹률이 높아지지 않는다. 한자 문맹이 오히려 문제다. 한자를 모르면 개인도 손해고 나라도 문화적 토대도 약화된다. 정책을 바꿀 때가 됐다.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