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의 삶을 회고하다
향기의 삶을 회고하다
  • 조진명
  • 승인 2011.12.0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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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대모 이연옥

 
한국 교계 여성들의 대모로 불리는 이연옥 예장통합 여전도회전국연합회 명예회장(85)은 전통적인 여성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혈혈단신 처녀의 몸으로 떠난 6·25 피난길과 눈물겨운 고생으로 버텨낸 미국 유학, 정신여중·여고 교장과 여전도회 및 사회의 리더로 섬기며 이룩한 성과들. 그녀의 도전이 성공할 때마다 여성들의 지위는 조금씩 향상됐고 사람들은 이 회장에게 ‘옥은’이라는 호를 선사했다.

얼마 전에는 이연옥 회장의 생애를 조명한 저서가 발간돼 화제를 모르기도 했다. <미래한국>이 지난 11월 29일 여전도회관에서 열린 옥은(玉恩) 이연옥 회장의 자서전 ‘향유 가득한 옥합’ 출판감사예배에서 이 회장을 만났다.

출판감사예배가 열린 여전도회관은 한국 기독교계의 역사적인 건물이 즐비한 종로 5가에 위치해 있었다. 과거 초창기 선교사들의 선교거점지역으로서 장로교회의 요람이 됐고 현재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이 인근에 위치해 있는 여전도회관 건물은 이연옥 회장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여전도회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단독 건물을 가지고 있는 교계 여성단체일 뿐 아니라 80억 규모의 예산이 투입됐지만 대단위 건축이 이루어질 때마다 발생하는 말썽 하나 없이 이뤄냈기 때문이다. 건축 계획이 추진되던 1980년대 당시만 해도 본래 이 부지는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돌아갈 몫이었다고 한다. 터의 소유자인 미국 장로교 총회(PCUSA)의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가 부지를 처분해 한국기독교장로회 측에 넘겨주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여전도회에서도 처음에는 당시 헐값이었던 압구정동에 회관을 건립할 계획이었어요. 땅을 매입하려는 단계까지 갔지만 딱 한 분의 위원이 반대하셨습니다. 평소에 저는 ‘위원들 중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그 자리에서 멈추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라 계약 체결을 보류 시키고 다시 기도하게 되었죠. 회원들과 함께 한 주에 한 번씩 철야기도하며 부지를 찾던 중 미국 장로교가 소유한 부지 소식을 듣고 계약 체결을 위해 미국을 세 번이나 다녀 왔습니다.”

20년 만에 달성한 여성 안수 법제화

완강히 거절하는 미국 장로회의마음을 돌린 것은 세 번째 만남에서 이연옥 회장이 제안한 ‘평생교육’ 아이디어였다.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유행처럼 번지던 ‘평생교육’ 열풍이 문득 떠오른 이 회장은 즉석에서 “계속교육원을 설립하고 여성들의 교육 향상에 이바지하겠다”는 계획을 제안했고 계약이 성사됐다고 한다. 이후 설립된 계속교육원은 현재까지 수많은 세미나와 강좌가 개설돼 교회 내 여성 지도력의 확산을 이끌어냈다는 평을 받았으며 여성 안수 문제의 도화선이 됐다.

여성 안수 법제화는 이연옥 회장이 20년 동안 줄기차게 주장해 이뤄낸 성과다. 법제화가 이뤄진 현재도 여성 목사가 매우 드문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인 만큼, 당시 이 회장이 장로교회 교단 총회에 청원한 여성 안수 문제는 <조선일보>에 대서특필 될 정도로 파격적인 사건이었다고 한다.

“<조선일보>에서도 여성 법제화 문제를 긍정적으로 다뤘던 것처럼 80년대 사회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민주화 열기를 접하면서 ‘사회를 이끌어가야 할 교회가 오히려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여성 안수 청원을 생각하게 됐지요. 반발은 말도 못했습니다. 오죽하면 20년을 끌었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은 저에게 ‘시위대보다 더 과격하게 시위 한다’고 비꼬듯이 말씀하시기도 했죠. 하지만 저는 성경의 원리가 남녀평등을 말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오히려 극단적인 진보주의자들은 성서를 여성 해방의 자원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경이 ‘남성적 하나님을 표상으로 하고 족장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적 범주의 종교를 말한다’는 것이죠. 물론 잘못된 해석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여선지자 드보라와 홀다가 등장하고 신약성경에도 여선지자 안나, 뵈뵈, 브리스길라가 나옵니다. 여성 안수는 성경에서도 지지하고 있는 내용인 것이죠. 한편으로는 제3세계 국가의 모델로 떠오르고 있는 한국 교회가 세계의 흐름에 뒤처져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게 될까봐 걱정이 많았습니다. 이미 일본과 대만은 물론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처럼 여성의 지위가 한국보다 낮게 인식되는 나라에서도 여성 안수 제도를 인정하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1994년 장로교 교단 총회에서 여성 안수를 허락했다. 정작 이 회장 본인은 연령 제한 때문에 장로 안수를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영암교회 당회에서 한국여성교육과 여전도회 운동에 앞장 선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이 회장을 ‘명예장로’로 추대했다.

인생의 멘토, 김필례 선생

당일 출판기념예배에 참석해 축사를 전한 새문안교회의 이수영 목사는 이 회장을 “적재적소에 필요한 일을 찾아 끈질기게 해내는 분”이라고 평했다. 예배가 열린 김마리아기념관을 가득 메운 참석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모습이었다.

이연옥 회장은 본인 스스로 ‘만남의 축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인생의 멘토 김필례 선생은 오늘날의 은옥을 있게 한 최고의 스승이었다고 말했다.

“김필례 선생님은 저의 전임으로 계셨던 정신학교 교장이셨습니다. 일본의 동경대학과 미국 콜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하신 엘리트이면서도 학생들의 체벌을 무조건 금지하시며 학생들이 먹는 보리차 물까지 매일 아침 점검하시던 사랑 많으신 분이셨지요. 당시 저는 고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6·25로 인해 고향 황해도를 떠나 정신학교에서 선생으로 근무할 때였는데 가족이라고는 동생 하나뿐이었으니까요. 김필례 선생님은 부모님이 없는 저에게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주셨죠. 교사생활을 잠시 접고 미국에서 리치먼드 유니온장로교신학교 기독교교육대학원을 죽을 힘을 다해 마치고 나자 김필례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자신의 후임으로 저를 세울 작정이니 교육대학원을 마치고 오라는 애기였죠. 당시 저는 교장이고 뭐고 유학생활이 너무 고단해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던 차라 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 교육대학원을 다녔죠. 다시 한번 더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웃음)”

고국으로 돌아온 이 회장은 김필례 전임 교장의 전폭적인 지지로 정신여중 교장을 맡게 됐다. 여전도회와의 인연도 김필례 교장의 권유로 시작됐다고 한다.

“여전도회는 장로교 교단에 속한 여성단체이고 정신학원은 그 교단에 속한 유일한 여자 중등학교라며 끈질기게 권유하시니 마지못해 나가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시간 낭비만 하는 것 같아 영 불편했습니다. 여전도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만 들어 모임이 끝나기만 하면 재빨리 나와 버리고는 했으니까요. 여전도회 부회장도 주위의 권유에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한 격이었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몸치장은 아끼면서 선교와 교회 일에는 아낌없이 헌신하는 여전도회 회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일명 ‘무늬만 회원’이었던 이 회장은 사모함이 생기자 특유의 성실함과 추진력으로 여전도회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이 ‘여전도회 역사 기록화 작업’이었다.

“회장이 되어 살펴보니 여전도회 회원들의 헌신으로 빚어진 아름다운 활동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습니다. YMCA만 해도 행사에 참석하면 자료가 한 보따리였는데 저희는 종이 한 장 없었어요. 위기 의식이 들어 ‘장로교여성사’와 ‘여전도회운영지침’, ‘여전도회학’, ‘대한예수교여전도회 100년사’ 등을 집필, 발간하고 1982년에는 여전도회 내에 출판사업회를 조직했습니다.”

이후 이 회장은 한국교회여성연합회를 창설해 초교파 여성단체 활동을 이끌었고 한국장로교여성협의회를 통해 분열된 한국 교회의 통합에 기여했다.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여전도회 역사상 최초로 명예회장이라는 직분을 수여받았으며 미국장로교교회 여성지도자상, 제1회 김마리아상, 국민훈장 동백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제1회 한국교회여성상 지도자상 등을 수상했다. 경민학원 이사장, 장로회신학대학교 이사 및 건축위원장, 기독교 세진회 이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 이사, 군선교연합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하는 한편 논산입소대 교회, 육군3사관학교 충성대교회 건축과 중국 심양 조선족 서탑교회 양로원 건축을 후원했으며 CTS 기독교 TV 등 기독교 방송 후원에도 힘 쓰고 있다.

현대 여성의 필수, 모성애 리더십

여성 지도자로서 펼친 눈부신 업적만 보면 시대를 이끈 여장군의 카리스마가 대단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이 회장은 매우 겸손하고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설명했고 신학계에서 이 회장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 바로 ‘모성애 신학’이다. 부드러운 여성의 힘으로 영적인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故 임옥 목사의 사모로서 20여년 간을 말없이 뒷바라지하며 섬긴 모습도 포함된 해석인 듯 싶다. 영암교회 담임목사이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한 故 임옥 목사와의 만남은 이 회장의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 이루어졌다.

“평생 인자하고 조용한 분이셨어요. 사모인 저에게도 교회에서 함부로 많은 말을 하지 말라고 늘 당부하셨죠. 다만 오랫동안 지도해온 성경공부는 영암교회에서도 제가 맡길 원하셔서 20여년간 성경공부를 지도하게 됐어요. 덕분에 성도들에게 좀 더 개인적으로 다가가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그래도 손님 초대 좋아하는 목사님 덕에 손수 만든 음식을 대접했던 일은 큰 보람으로 남네요.”

이 회장은 사회의 여성 리더로서 수많은 일을 감당하면서도 임 목사의 식사만큼은 직접 만들어 섬겼다며 미소 지었다. 현대 여성이 추구하는 성공의 롤 모델이면서도 아내의 의무를 다한 이 회장에게 그 비결을 물었다.

이 회장은 현재 차세대 여성 지도자 양성을 위해 여전도회 계속교육원에서 여전도회학에 대해 강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녀의 뒤를 이어 모성애와 리더십을 겸비한 지도자가 탄생하기를 기대해 본다. (인터뷰 / 조진명 기자  jadujo@naver.com
사진/ 이승재 기자  fotolsj@futurekorea.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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