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대국의 길
통상대국의 길
  • 미래한국
  • 승인 2011.12.21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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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2011년 12월 5일 대한민국이 무역 1조 달러 국가군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에 앞서 이를 달성한 나라는 미국, 독일, 일본, 중국,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모두 8개국뿐이다. 수출만 놓고 보면 순위는 더 올라가 중국, 독일, 미국, 일본, 네덜란드, 프랑스에 이어 7위다.

물론 이렇게 말하고 싶은 이들도 있겠다. “그래본들 대졸 실업은 여전하고 2040세대 모두가 힘들어 하는데,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넘어설 지혜를 얻기 위해서도 우리는 한국이 이룩한 성취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60여 년 전 식민지에서 해방돼 겨우 나라를 세우자마자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지나갔다. 남겨진 것은 오직 폐허! 미래를 꿈꾼다는 건 발상부터가 사치였으며 허락된 것이라곤 생존을 위한 발버둥뿐이었다. 순위를 매길 필요도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1962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던 무렵에도 1인당 국민소득은 겨우 87달러! 그렇게 시작한 대한민국이 반세기만에 세계 9위의 무역 대국이 됐다.

한국은 2009년 이미 역사적 기록 하나를 세운 바 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탈바꿈한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들 가운데 최초 유일의 기록이다. 기적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내 생애에 대한민국의 성취를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감동적인 일이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말이다.

유교 사회주의 나라 조선

무역 1조 달러 클럽 국가들은 한국을 제외하면 모두가 원래 잘 살던 나라였다. 서구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청나라 말부터 개혁개방 이전까지의 공백을 제외하면 역사적으로 세계 최대 부국의 반열에서 빠진 적이 없었다. 일본도 메이지 유신 이전 도쿠가와 막부 시절 이미 에도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할 만큼 내적인 번영의 토대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그 이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기반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본주의 맹아? 조선에 그런 것은 없었다.

조선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경제관과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질서를 양대 기둥으로 한 일종의 유교 사회주의 국가였다. 조선은 마치 후대의 구 소련을 빼다 박은 듯 닮아 있었다. 천하대본으로 이상화된 농민층은 마르크스주의에서의 노동자 계급과도 같은 위상이었다. 관념적으로는 이상화돼 있었으면서도 실제로는 아무 힘도 권리도 없었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한편 사대부는 역성혁명을 추진할 때는 전위정당의 당원 같았으며 권력을 잡은 뒤에는 구 소련의 노멘클라투라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공산당원들이 사상투쟁 이론투쟁을 앞세워 정치적 경쟁자들을 숙청했듯이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은 성리학의 해석과 적용을 둘러싸고 당쟁을 벌이고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기치로 상대 당파를 숙청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업을 경멸하고 시장의 성장과 발전을 위험시 했다는 점에서 양자의 정신적 DNA는 완전히 동일했다. 당연히 결말도 비슷했다. 구 소련이 결국에는 경제적으로 파산해 무너졌듯이 조선도 일본의 침략 이전에 이미 경제적으로 붕괴해 있었다.

무역 1조 달러 국가군들 가운데 한국과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가진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우선 조선은 같은 동양권 국가인 중국, 일본에 비해서도 예외적이었다. 근대 이전 한중일 동양 3국은 각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크게 볼 때는 유교 문화적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그중에서도 유독 극심한 성리학 원리주의의 나라였으며 3국 가운데 상인층의 성장이 가장 미약했다.

서구국가들의 상업 전통

서구국가들과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네덜란드는 농민 이전에 청어잡이 어부가, 국가 이전에 상인이 먼저 존재했었던 나라였다. 영국은 대항해시대 초기부터 바다로 눈을 돌렸던 해양강국이자 일찌감치 네덜란드의 모범을 따라간 나라였다. 미국이 바로 그들의 후예임은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다.

프랑스 독일은 내륙 농업국가적 특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중세 봉건제 시대 대륙 유럽에서도 상업이 위축된 적은 결코 없었으며 오히려 막강한 힘을 갖기까지 했다. 12~13세기부터 유럽에는 한자(Hansa)라 불리는 무역상인 집단들이 있었는데 14세기 중반에는 군사적 동맹의 수준으로까지 성장하기도 했다. 한자동맹은 후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해외에서 독자적인 조약 체결권과 군사 행동 권한을 갖고 국가와 마찬가지의 대우를 받았는데 이 점은 한자동맹도 비슷했다. 마치 영토를 갖지 않은 국가였다. 이런 문화적 배경에 더해 프랑스와 독일에겐 앞서가는 영국을 어떻게든 따라잡으려는 치열한 경쟁 심리가 있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프랑스 독일 두 나라도 결국 영국에 뒤이어 산업혁명을 하고 부국의 대열로 들어서게 됐다.

한국은 역사적 문화적 배경으로만 보면 ‘1조 달러 무역대국’이라는 성취가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깊게 따져 보면 조선의 경우가 매우 예외적이었음이 드러난다. 신라와 고려 두 나라는 모두 활발한 통상 국가였다. 신라는 일찍부터 실크로드를 통한 대외교역이 있었으며 해상무역을 장악한 장보고가 있었다.

이슬람 상인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8~9세기 무렵 경주는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에 이은 세계 4대 도시라고 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전성기 경주는 17만 8936호로 인구가 거의 100만에 육박한다. 고려도 창업자 왕건부터가 송악의 상인집단을 배경으로 했으며 건국 초부터 매우 활발한 대외교역을 행했다. 팔관회는 고려판 무역박람회였으며 개경에는 이슬람권에서 온 회회아비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조선의 등장은 이러한 전통에서의 전면적 이탈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으로 보면 일종의 돌연변이 현상에 가깝다. 한반도는 한편으로는 대륙의 끝자락에 또 한편으로는 대양으로 나가는 출발점에 위치한다. 이런 위치에선 대륙과 해양을 잇는 대외교역이 활발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한반도는 땅은 좁고 그나마도 산악지대가 7할을 차지한다. 이런 곳에서 농업만으로 인구를 부양하고 나라를 지탱한다는 것은 안이함을 넘어선 한심함이다. 그런데 조선은 그런 세상을 꿈꾸었다. 당연히 미몽이었다.

한국의 두 가지 숙명

한반도에 존재하는 국가는 두 가지 숙명을 안고 있다. 첫째 대륙과 해양 양대 세력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단층선이라는 위치의 문제다. 둘째 대외통상을 통한 부가 아니면 인구부양도 국가의 안전보장비용 마련도 쉽지 않다는 자연조건상의 근원적 제약요인 문제다. 고위험 지대이면서도 자체 내에서는 생존비용 조달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에겐 통상국가란 가능한 경우의 수 중 하나가 아니라 불가피함이다. 만약 이 길에서 이탈하면 지금까지 이룩한 모든 성취는 무위가 된다. 자존심 접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며 명맥 유지에만 만족해야 하는 건 그에 뒤따르는 옵션이 될 것이다.(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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