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만도 못했던 나의 탈북 생활…
짐승만도 못했던 나의 탈북 생활…
  • 미래한국
  • 승인 2011.12.28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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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이야기]

지난달 북한민주화 운동본부가 개최한 ‘중국 내 탈북민 실태’기자 회견에서 발표된 3명의 탈북민 증언을 소개한다.

오선영(가명)
탈북 후 중국에서 돈을 벌어 북한의 가족에게 보내며 두 번 잡혀 북송당했다.

중국에 있을 때 12년만에 딸 사진을 받아봤다. 딸이 고생을 많이 해서 남자 여자인지 구분하지 못했고 27살인데 40대 넘은 것 같아 나도 못알아볼 정도였다. 북한에 있을 때 아이들과 사진을 찍은 적이 없어 중국에서 내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아들이 군인인데 군복을 입은 사진은 보내면 통관에 걸리기 때문에 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냈다.

북한에서는 내가 죽은 것으로 돼 있어서 가족들이 손녀에게 나를 할머니라 하지 않고 큰어머니라고 말한다고 한다.

딸이 생일선물로 북한의 강서 편직물공장에서 만든 옷을 선물로 보내왔다. 그동안 북한의 가족에게서 편지가 몇 십 장이 왔는데 종이 질이 나빠 보기 어려웠다. 이 편지는 중국의 장사꾼들 중 여자들이 생리대에 숨겨 왔다.

그동안 겪은 고통은 세월이 흘러도 흔적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어떤 증거를 보여줘도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북한에서 미용 기술을 배워 중국에서도 미용일을 하며 살았다. 중국에 있을 때 우리집에 와서 머물다 간 탈북민이 100명도 넘는다.

우리 집을 통해 탈출했던 한 사람은 “아저씨, 우리 엄마가 죽는데 돈을 3분의 1이라도 돌려 주세요. 아니면 엄마에게 보내주기라도 하세요”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보내주지 않았고 그 여자는 한족에 팔려갔다.

탈북한 후 우리집에서 은신했던 다른 한 사람은 잡혀간 다음 미친 것처럼 보이려고 사방에 대변을 쌌다고 한다. 그녀를 산 사람이 대변을 먹으라고 해서 먹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후 그집을 나와 이틀만에 도로 우리집을 찾아왔다.

중국에서 중국의 한족들보다 우리 교포(조선족)가 더 무서웠다. 인신매매를 하는 선자리에 안나간다는 그들의 협박에 못이겨 나갔다. 선자리에서 상대방에게 나는 남편이 있고 아이들도 있으니 힘들게 번 돈 쓰면서 사람을 사지 말라고 부탁해 빠져나왔다.

중국에서 10년 동안 숨도 크게 못쉬고 숨어 살았다. 공안 차량 소리만 나도 피하기 정신 없었다. 다시는 북한에 가지 않기로 다짐하고 죽으려 단식도 했다. 2005년 조선족이 내가 가진 돈을 뺏기 위해 북한사람들과 짜고 공안에 신고했다. 중국 공안이 신발 양말 다 벗기고 내복만 입게 하고 감방에 보냈다. 20일 후에 북한으로 넘어가 1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감방에 20명 정도 갇혔다. 절반은 안고 누울 때도 45도 각도로 잔다. 배고프고 힘드니까 그래도 잔다. 감방 감시원이 두 시간에 한 번씩 들볶았다. 1주일에 한 번씩 탈북자를 잡아오는 차가 오는데 석탄 한 차 또 왔다고 얘기한다.

나는 지금 위를 두 번 절단하는 수술을 했다. 간경화, 간복수로 약을 먹지 않고는 하루도 지낼 수 없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 자식들에게 부모의 도리를 다하고 싶다. 또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게 해준 대한민국에 감사한다.

조효민(가명)
2001년 북한을 탈출해서 중국 길림성에 거주했다. 북한에서 빚을 져 이를 갚으려고 중국에 팔려가 살다가 2006년 북한으로 잡혀갔다. 북한에서는 어머니 아버지도 군인가족 출신이라 성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중국에 있을 때 말이 안통해 힘들었다. 1년 지나 아이를 낳으면 돈을 주겠다고 해서 아이를 낳은 후 돈을 받아 보내기도 했다. 중국에서 한번도 해보지 않던 돼지, 병아리, 개를 키워 팔아서 우리도 살고 북한 가족에 돈도 보내려고 일했다. 중국으로 간 탈북 여성 치고 편안하게 산 사람이 없을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이 잘 적응해서 사는 것 같으면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중국 사람이 나를 중국 공안에 신고해서 아이를 이웃집에 맡긴 채 잡혀 갔다. 도문에서 한 달 간 있다가 북송돼 감옥에서 보낸 후 집이 있는 회령으로 갔고 그후 개천교화소에 들어갔다. 거기서는 목숨이 붙어 있을 정도로 밥을 먹이고 일을 시켰다. 그곳에서 한 달 동안 교화소 수칙 등을 배웠다. 암송한 후 검사하고 통과하면 잠을 자게 했다. 수용소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한 달 후 작업반에 배치됐다. 작업장에서 일당량을 못하면 밤늦게까지 일을 시키고 처벌한다. 옛날에는 단체복도 있었다는데 자기가 가지고 간 옷만 입는다. 그곳에서 가진 것도 없는데 내라는 것이 많아 고생했다.

일이 끝나면 당의 유일사상 10대원칙, 신년사를 외우게 해 외워야 잠자게 했다. 몸도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이곳에서는 갇혀 있는 사람들이 서로 고발한 실적대로 형기를 줄여준다. 여기서 풀려난 후 아이를 찾아 중국으로 다시 갔다.

남편에게 간 후 다시 잡힐지 모르니까 한국으로 가겠다고 얘기하니 처음에는 말렸지만 얼마 있으니 자기 생각에도 불안했는지 허락해 브로커 통해 돈을 주고 한국에 왔다. 한국에 온 후 남편에게 아이를 보내라고 전화해 데려왔다. 지금도 고생하던 생각을 하면 잠자다가도 깬다. 지금은 마음이 편하다. 한국에서 집도 주고 생활보조금도 줘 나름대로 아르바이트도 하고 열심히 산다.

이민선(가명)
2003년 2008년까지 흑룡강성에 살았다. 아들과 함께 중국에 왔는데 아이를 데리고 일을 할 수 없어 시집을 갔다. 정신이 조금 이상한 사람 만나 딸을 하나 낳았다. 가족이 호적이 없어 아들을 유치원에 보낼 수 없었다. 마침 이웃에 교사가 있어 알아보니 그 사람이 다니는 학교에 호적이 없을 경우 벌금 한 사람 당 100원을 내면 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남편은 일을 안했다. 내가 아이들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돈을 벌면 남편은 돈을 빼앗았다.

어디 가서 도움을 받을까 해서 한국 목사들이 있는 교회로 갔다. 거기서 지원을 받아 유치원에 보낼 수 있었다. 평소 남편이 정신 나가 나를 막 때렸다. 한번은 자살하려고 생각했지만 아이들이 불쌍해 못죽었다.

그러다가 중국 공안에 붙잡혀 중국 돈으로 2000원을 주고 풀려나오기도 했다. 조선족과 다투면 중국사람들이 공안에 신고한다.

풀려나온 후 남편과 싸우다 여기서 살기 불안하니 차라리 신고하라고 했더니 정말 신고해 다시 붙들려가 삽으로 맞는 등 고문을 받았다. 촌장이 내가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며 공안 책임자에게 얘기해서 풀려나게 됐다. 중국에서 더 이상 못살겠다고 생각해 한국에 가기로 결심했다.

2008년 고아원 원장에게 브로커를 소개해달라고 얘기해 2008년 9월 6일 출발해서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 왔다. 한국에 와보니 따뜻하다 이런 나라도 있구나 생각했다. 앞으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겠다. (미래한국)
정리 /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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