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혁명과 영국의 보수
프랑스의 혁명과 영국의 보수
  • 미래한국
  • 승인 2012.01.1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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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

이강호 한국국가전략 포럼 연구위원
프랑스 혁명의 연대기는 단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789년 혁명이 일어나 1793년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고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혁명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 자신도 마찬가지로 목이 잘린다. 타도 대상의 목을 친 뒤 그 일을 주도한 자신도 그렇게 삶을 마감한 것이다. 그동안의 시기를 프랑스 역사는 ‘공포정치’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보수의 시조 버크의 反혁명론

영국의 정치가이자 문필가 에드먼드 버크는 혁명 발발 이듬해인 1790년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을 썼다. 버크는 이 저서에서 프랑스 혁명의 파괴적 속성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한다. 혁명 발생 이후 일련의 사태를 지켜본 지 딱 1년여 만에 ‘反革命’적 성향을 유감없이 드러낸 셈이다. 혁명을 찬양하는 쪽의 입장에선 보수반동의 전형으로 보이겠다. 하지만 버크는 원래 ‘보수적인’ 토리당이 아닌 ‘진보적인’ 휘그당 소속이었다. 버크는 거의 30여년을 휘그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을 지냈다. 그랬던 그가 ‘성찰’ 이후 토리당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가 근대 보수주의 정치사상의 시조가 되고 그의 저서 ‘성찰’이 보수주의 정치사상의 고전이 된 사연이다. 무엇이 버크를 변하게 했을까?

한자어 革命의 어원은 이렇다. 갓 벗겨낸 가죽이 皮인데 그 털을 없애고 무두질해 다듬은 것이 革이다. 가죽 革이 무엇의 면모를 일신해 바꾼다는 의미를 갖게 된 유래다. 殷에서 周로의 왕조 교체를 殷周革命이라 하는데 天命을 革한 것이라 해서 그렇게 칭했다.

revolution은 좀 다르다.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 본래 회전, 순환, 반복 등의 뜻을 가진 단어였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저서에서 회전이 바로 revolution이다. 천체의 회전처럼 정치사회적 변화도 어떤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반복되는 일로 보고 revolution이라는 용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한 게 정치적 용례의 시작이었다.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을 묘사하고 평가하면서 사용된 경우가 대표적이다. 한 예로 로크는 “명예혁명이 revolution인 것은 그것을 통해 영국 고래의 진정한 헌법으로 되돌아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프랑스 혁명 때 루이 16세가 “이것은 revolt(반란)이다”라고 하자 한 신하가 “아닙니다. 이것은 revolution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두 경우 모두 순환 혹은 복원의 의미로 사용됐다. 그런데 반복 사용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미묘한 차이를 드러냈다. 영국에서 revolution은 여전히 ‘정상 상태로의 복귀’라는 뉘앙스가 강했던 반면 프랑스에서는 점차 ‘혁신’의 의미를 강하게 띠기 시작했다.

revolution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무관치 않다. 현재 revolution이라는 단어는 중대한 변화를 의미 있게 평가할 때 사용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래 모든 정치적 변혁 운동은 혁명이라는 용어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프랑스와 영국의 차이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혁명의 시대’라 칭했는데 그럴 만하다. 이 나라 저 나라의, 이러저러한 갖은 혁명이 줄을 이었다. 과연 그러한 혁명이 긍정적 성과와 ‘진보’를 가져 왔을까? 프랑스 혁명은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명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신화다.

프랑스는 한때 대륙 유럽의 최대 강국이었으나 혁명 이후에는 나폴레옹 시대를 제외하고는 다시는 그 같은 위상을 갖지 못했다. 1940년 최종적으로 나치스에 당할 때까지 끊임없이 독일의 침공에 시달렸다. 혁명 이후 하나의 정치적 습관이 돼버린 끝없는 좌우 격돌의 진통으로 국력을 효과적으로 결집시키지 못한 탓이 크다. 2차 대전 후 드골이 ‘프랑스의 영광’을 외치며 국력 회복에 나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뒀으나 따지고 보면 미국 덕이었다. 미국이 소련의 서진을 막고 독일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 프랑스의 국익과 정확히 일치했을 뿐이었다.

영국은 프랑스와는 다른 길을 갔다. 영국에는 프랑스적 기준으로 보자면 혁명다운 혁명이 없었다.

1640~1660년 크롬웰 주도의 청교도 혁명이 무력혁명으로 왕을 처형했다는 점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의 경우와 유사하지만 영국적 기준으로는 이것이 예외적인 사태였다. 영국적 정치혁명의 전형은 1688년 명예혁명이다. 명예라는 호칭이 붙은 것은 유혈이 전혀 없었기 때문인데 프랑스적 기준으로 보자면 혁명이라기에는 매우 싱겁다. 영국은 이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를 물러나게 하고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 公 윌리엄(오레아나 公 빌렘)을 새로운 왕으로 ‘수입’했다. 네덜란드의 선진적인 경제 시스템이 이와 함께 영국으로 옮아왔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영광을 이은 대영제국의 시대의 본격적 개막은 이때부터다.

혁명이라는 단어에 막연한 낭만적 환상을 갖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의 혁명은 유혈과 독재와 퇴행으로 귀결되기 다반사다. 특히 화려한 구호를 내걸고 격렬한 계급투쟁을 통해 진행된 것일수록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혁명은 명예혁명처럼 혁명답지 않게 싱겁게 진행되거나 미국독립혁명처럼 계급투쟁의 전형성과는 거리가 멀수록 더욱 유의미한 성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혁명적 진보라는 낭만적 환상

진보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확신은 반드시 실망을 가져오기 마련이며 격렬한 계급투쟁의 선동은 증오와 분열을 유산으로 남기기 마련이다. 그 부담을 수습하는 가장 일반적인 행태가 바로 독재요 공포정치다.

로베스피에르는 죽으면서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지옥을 벗어난 셈이었다. 살아생전 프랑스를 이미 유혈지옥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게 프랑스 혁명이었다. 러시아 혁명도 그러했다. 그를 흉내 낸 다른 모든 혁명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덧붙여 히틀러의 나치스도 혁명을 운운했다.

급진적 변화로 과거와의 전면적 단절을 추구하는 것은 이어져 내려온 것들이 보존하고 지켜야 가치가 없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혁명 당시 프랑스가 자신의 앙시앙 레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그랬다. 그러나 영국은 급진적 변화는 항상 거부해왔으며 큰 정치적 변화의 시기에도 전통적 유산을 ‘보존’하며 점진적 변화를 추구한다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한 책 제목을 빌자면 영국은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였다. 그리고 보수적 영국은 대영제국의 영광을 구가했으나 급진적 변화 문화의 프랑스는 가장 강력했던 나폴레옹 시대에도 결국 영국에는 패했다.

지금 우리 한국은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과연 한국은 보존하고 지켜야 할 것이 없는 나라인가? 당연히 아니다. 대한민국 현대사는 기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위대한 성취의 역사이며 지켜나가야 할 것이 많은 나라다. 모든 것 이전에 대한민국이라는 존재가 이미 ‘保守’의 핵심 가치 자체다. 이 나라는 그런 자격이 충분하다. 그런데 종북좌파들이 대한민국을 폄훼하더니 급기야 한나라당도 ‘保守’를 삭제하겠다고 나섰다. 어디로 가자는 것인가?

보수는 원래 인기가 없다. 하지만 인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 보수의 가장 큰 설득력은 책임 있는 자세다. 경륜 있는 연예인들은 인기란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에는 진정성과 무르익은 연기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정치도 다르지 않다.

팁 하나! 5·16은 한때 혁명으로 칭해졌지만 지금의 공식용어는 쿠데타다. 쿠데타는 한국에서는 특히 불명예스러운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예전 프랑스에서는 쿠데타가 혁명과 같은 의미로 사용됐다. 그런데 5·16은 혁명일까 아닐까? 유혈이 없어 매우 싱거운 일이었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영국의 경우와 닮았다. 그 이후의 성과도 비슷했다.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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