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한 이념이 근대적 선진집단을 탄압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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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2.02.16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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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실수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1492년은 스페인이나 유럽 모두에 특별한 해다. 우선 카스티야의 여왕이었던 이사벨라가 마침내 스페인 통일을 완수한 해였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장차 발견하게 될 신대륙을 향해 드디어 항해의 돛을 올린 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해가 특별한 것은 이 때문만은 아니다. 1492년은 스페인에서 유대인 추방이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스페인을 통일한 이사벨라 여왕은 통합 스페인의 종교적 통일성을 위해 유대인과 이슬람에 대한 종교적 관용정책을 폐기하고 개종을 하든지 아니면 스페인을 떠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그리고 악명 높은 종교재판소를 설립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심취했던 콜럼버스는 잘 봐야 몽상가요 나쁘게는 반은 건달 반은 사기꾼으로 보이기 꼭 알맞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스페인도 아닌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그런데 이사벨라는 자기 왕관의 보석을 빼서 팔아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원했다. 아시아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콜럼버스의 ‘신심’이 이사벨라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일조했을 것이라지만 어떻든 대담하고 진취적이라 평할 만하다. 그런데 이사벨라의 그 돈독한 신앙이 국내 정책으로 향할 때가 문제였다.

15세기 스페인은 기독교 왕국인 카스티야와 아라곤,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로 분열돼 있었다. 이사벨라는 원래 카스티야의 여왕이었다. 그녀는 이웃 기독교 왕국인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왕과 결혼해 두 왕국을 공동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공동 통치가 시작되면서 강력한 통일 스페인의 야망을 품은 이사벨라는 1480년부터 그라나다를 공격하기 시작해 13년간 이어진 전쟁 끝에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를 함락시켰다.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 발을 디딘 지 781년 만에 기독교 왕국으로 스페인 통일을 완수한 것이다.

이슬람을 몰아낸 이사벨라가 스페인의 종교적 통일을 시도한 것은 어떤 면에선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이사벨라의 신앙이 매우 돈독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정치적 필요가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 귀결이긴 했어도 현명한 것은 아니었다. 이사벨라의 이 조치는 스페인의 앞날을 위해서는 매우 불행한 선택이었다.

스페인의 무슬림은 711년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해 後 우마이야 왕조를 연 이래 이슬람 선진문명을 수입해 황금시대를 연 주역이었다. 한편 스페인의 유대인은 이슬람 세력의 유입과 함께 정착해 번영을 뒷받침한 또 다른 주역이었다. 세파르디라 불리는 이들 유대인은 이슬람의 이베리아 진출 때 함께 들어왔는데 이슬람의 관용 정책 아래서 특유의 자질을 맘껏 발휘해 금융에서부터 수공업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사벨라의 종교정책은 이 기반을 파괴했다.

유대인과 무슬림 추방의 여파

이사벨라의 칙령이 발표되자 이슬람교도와 유대인들은 대거 스페인을 떠나기 시작했다. 무슬림들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품으로 떠나고 유대인들은 더러는 개종도 했지만 대부분은 다시 유랑의 길에 올랐다. 유대인들이 새로운 정착지로 찾은 곳은 네덜란드였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선진적 집단이었던 이들의 이탈은 스페인이 그 강력한 국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근대의 주역이 될 수 없었던 한 원인이었다.

이사벨라 치하에서 스페인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대규모 해외 식민지를 거느리는 성과를 이룩했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대규모 은광을 잇달아 개발하면서 얻은 막대한 부는 16세기를 스페인의 시대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영광은 채 100년을 가지 못했다. 은 무역으로 손쉽게 얻은 부는 근대적 산업발전을 담당할 세력이 추방당하고 없었던 스페인이 더욱 더 공업 발전을 도외시하게 만들었다. 외형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미래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카를로스 1세에서 펠리프 2세에 이르는 16세기 말 스페인은 대서양을 지배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동시에 스페인이 내외의 도전에 봉착한 때이기도 했다. 대서양에 영국이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하면서 위기가 왔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면허를 받은 사략선(私掠船) 즉 해적들이 스페인의 상선과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를 거듭 공격했다. 거듭된 공격과 약탈로 식민지로부터의 부의 유입이 위협받자 스페인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스페인은 무슬림과 유대인이라는 선진집단을 추방한 이후 국내산업의 발전은 답보 상태에 있었다. 스페인 경제는 식민지에서 유입된 부에 주로 의존하는 일종의 약탈경제와 다름없었다. 때문에 영국 사략선의 공격이 식민지 부의 유입을 위협하자 가뜩이나 산업기반이 취약한 스페인에 경제 위기가 오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과의 일전이 불가피했다. 펠리페 2세는 영국 본토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대함대를 편성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무적함대다. 무적함대는 네덜란드 육군과 합류해 영국 본토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방어함대를 편성했다, 그런데 이 영국함대의 주력은 해적선이었다. 해적왕으로 후대에도 이름을 날린 드레이크 선장이 영국함대의 주력으로 배치돼 있었다. 영국함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해적질로 성가를 높일 만큼 기동력이 뛰어난 함선에 노련한 선원들이 있었다. 무적함대는 영국의 해적 출신 함대의 기동력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결국 스페인 함대는 1588년 8월 7일 칼레 연해에서 영국군의 화공에 의한 야습으로 결정타를 입은 데 이어 그라블리느(그레벨링건 Grevelingen) 해전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무적함대의 패배는 스페인이 해상무역권을 영국에 넘겨주고 스페인령이었던 네덜란드가 독립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이후 스페인은 다시는 유럽의 주역으로 등장하지 못했다. 근대에 서구의 힘이 全 세계를 아우르고 있을 때도 스페인은 결코 그 영광의 일원이 되지 못했으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내내 유럽의 변방이자 후진국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스페인의 이 같은 몰락은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이사벨라 여왕 시대에 잉태된 것이나 다름없다. 무슬림과 유대인이라는 선진집단을 추방한 스페인은 장차의 산업혁명의 주력이 없었다. 산업혁명을 할 동력이 없는 스페인은 식민지 수탈에만 경제를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그대로 부메랑이 돼 스페인의 숨통을 조였다. 해상 루트를 노략질 당하면서 초래된 경제위기는 스페인이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도록 했고 여기서 무너지자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근대적 선진집단을 탄압하고 추방한 대가

악명 높은 종교재판을 앞세운 가톨릭 원리주의 정책은 스페인 내부에서 근대적 정신이 성장하는 것을 원천봉쇄하고 있었다. 이사벨라의 유대인 추방은 결국 스페인에서 근대를 추방시킨 것이었고 그것은 스페인 자신이 근대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킨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원래 스페인의 속령이었던 네덜란드가 나중에 급성장한 것은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이 가져온 역설이었다. 스페인을 떠난 유대인 출신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로 대거 몰려들었고 이들은 네덜란드 발전에 큰 동력의 하나가 됐다. 유대인들은 또 영국으로도 향했는데 이들은 영국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나중에 대영제국 전성기에는 유대인이었던 디즈레일리가 총리에 오르기도 했다. 영국에는 유대인에 대한 관용이 있었고 영국은 그들의 힘을 활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한국의 기업 특히 대기업들은 누가 뭐래도 이 나라의 대표적인 선진 집단이다. 지금 모든 문제를 이들의 탓으로 돌리는 고함소리가 난무하고 있다. 과연 현명한 일인가?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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