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가 러시아를 만났을 때
한반도가 러시아를 만났을 때
  • 미래한국
  • 승인 2012.03.1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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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고대녀’라는 별칭으로 인구에 제법 회자됐던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한 명이 제주도 해군기지를 두고 ‘해적기지’라고 매도했다. 식견과 소양은 부족하면서도 튀고는 싶은 한 정치 초년생의 경솔한 언동일 수 있겠다. 하지만 그의 이른바 ‘해명’을 좀 더 들여다보면 이것은 한 개인의 나이나 경륜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 해양 지배를 하려 하는데, 제주 해군기지가 미국의 이런 합법적 해적질을 돕게 된다는 점에서도 해적기지라 한 것이다.”

이 언급은 국제정세와 역사에 대한 좌파적 인식체계 자체가 문제의 본질임을 드러낸다. 심각한 것은 이런 비뚤어진 인식이 이 나라 국민 일반에 널리 펴져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와 조선

한반도의 역사를 서술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대목이 주변 강국들에 의한 침탈의 역사다. 중국 일본은 우리 역사에서 고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적대적 조우가 늘 끊이지 않았던 국가였다. 그런데 근대부터 이 명단에 추가된 나라가 러시아다.

조선조말 한반도의 운명은 국제적으로는 두 개의 전쟁에 의해 결정됐다. 첫째 1894년 청일전쟁, 둘째 1905년 러일전쟁이다. 특히 조선의 국권상실과 일본 식민지로의 전락을 최종 확증한 것은 러일전쟁이었다.

조선조말 시기 이전 러시아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에 등장한 적은 없었다. 2천여 년 간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주요 외부세력은 늘 대륙의 중국과 바다 건너 일본이었다. 러시아는 동유럽에서 극동까지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친 대국이었지만 국제정치적으로 주된 활동 공간은 언제나 유럽 쪽이었다. 청나라 강희제 때 표트르 대제 시대 러시아가 청과 국경분쟁을 벌이고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극동 무대는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주요한 정치무대는 아니었다.

이런 러시아가 한반도라는 동아시아 최고의 전략 요충에 마침내 고개를 들이밀게 된 것은 고종의 덕분이었다. 조선은 청일전쟁으로 우위가 확실해진 이후 일본의 위협을 본격적으로 느끼기 시작하면서 일본을 견제할 새로운 국제정치적 지렛대를 찾기 시작했다. 고종의 결론이 바로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일본을 견제할 세력으로 미국을 주목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왕정체제를 고수하고자 하는 고종으로서는 민주공화정의 미국은 아무래도 정치문화적으로 부담스러운 나라였다. 반면 러시아는 차르 체제라는 절대왕정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익숙한 나라였다. 고종의 이 같은 인식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1896년)으로 행동화됐다.

약 1년간에 걸친 아관파천 시기는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국제정치적 셈법에 최종 결론이 내려지는 시기였다. 영국과 미국은 청나라를 꺾은 일본의 힘을 인정하면서도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지나치게 독주하는 것을 견제하고자 했다. 하지만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의 품에 안겨 한반도의 주요 이권을 차례로 러시아에 넘겨주는 상황을 맞게 되자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급성장을 했다 해도 여전히 극동의 부분적 세력에 지나지 않았으며 대영제국의 세계전략 차원에선 전혀 위협이 아니었다. 더욱이 일본은 1854년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한 이래 영미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취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달랐다.

조선이 아관파천을 계기로 러시아로 급격히 기울어간 것은 러시아를 견제해야 할 영국과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러시아에 이권이 넘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한반도 전체가 러시아의 군사적 전초기지가 될 조짐까지 보이자 더 이상 일본의 대두를 걱정할 단계가 아니었다.

러일전쟁은 일본의 입장에선 국력의 전부와 미래의 운명 모두를 건 승부였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크게 성장하고 청나라를 꺾었다 해도 여전히 러시아와 맞장승부를 벌일 수준은 아니었다. 실제로 러일전쟁의 막바지 일본은 내부적으로는 탄약 비축이 고갈돼갈 만큼 핀치에 몰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러일전쟁에 이긴 것은 영일동맹의 성공으로 영국이 러시아 발틱 함대의 극동 출병을 강력히 견제한 것에 힘입은 바 컸다. 러시아 발틱 함대는 바다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의 견제와 사보타주에 걸려 극동으로 오는 도중 이미 지친 상태였으며 일본의 도고 제독은 바로 이 기진맥진한 함대를 공격해 궤멸시켰던 것이다.

러일전쟁의 최종 마무리에서 일본을 도운 나라는 미국이었다.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무너뜨렸지만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도 당시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만약 러시아가 전쟁을 더 끌고 나갔다면 양상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막바지 상황에서 미국의 국무장관 태프트와 일본의 외무대신 카스라 사이에 밀약이 이루어지고 미국이 러시아와 일본의 휴전협상을 중재했다. 이렇게 해서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한반도의 운명은 결정됐다.

소련과 한국, 그리고 다시 러시아

일본이 당시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확립한 것은 자신의 단독의 힘만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만약 일본이 영일동맹과 미일협약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다시 말해 일본이 영국과 미국을 적으로 돌렸다면 성공은 불가능했다. 일본은 이후 2차 대전 때 영국과 미국의 반대편에 서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사실은 러일전쟁 당시의 反러시아 영일 미일 동맹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재증명한다.

조선조말 고종은 국제 정세를 잘못 읽고 손잡지 않아야 할 세력과 손을 잡았고 일본은 당시 세계의 주류 세력과 손을 잡았다. 한 쪽은 식민지로 다른 쪽은 그 지배자가 된 갈림길이었다.

이렇게 근대 시기 함께 한반도에 등장했던 러시아는 일본의 패망과 함께 소련이라는 모습으로 다시 등장했다. 북한은 소련과 함께 했다. 반대로 남한은 미국과 함께 했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한반도 일대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 야심을 보이며 우리의 운명을 옥죄었던 세력은 역사적으로 볼 때 셋이었다. 중국 일본 러시아다. 일본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에 의해 군사적으로 국제정치적으로 무력화된 상태다. 하지만 중국은 6·25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강한 모습으로 우리에 대한 현실적 위협으로 대두했다. 중국은 이미 수명이 다한 북한을 지원하면서 한반도와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하고 있다.

중국은 서해에 드디어 첫 항공모함을 진주시킬 예정이다. 지금까지 동아시아의 바다의 안전과 자유 항행을 지켜온 힘은 미국이었으며 지금 이를 위협하는 제국주의적 세력은 중국이다. 여기에 다시 러시아가 돌아오고 있다. 푸틴은 강한 러시아를 내세우며 대통령에 다시 당선됐다. 그는 주로 미국에 각을 세우며 한반도 주변 국제정치적 게임에서 러시아도 영향력을 발휘하려 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세계사의 대사건과 인물들은 다른 모습으로 다시 출현한다”고 한 헤겔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첨언했다.

“그는 하나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처음엔 비극으로, 다음엔 희극(farce)으로” 되풀이되는 역사를 보면서 생각한다. 근대 시기 우리의 판단 착오가 다시 되풀이되면 이번에는 동정의 여지없는 역사적 비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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