脫北者 문제의 국제화, 그 뒤
脫北者 문제의 국제화, 그 뒤
  • 김범수
  • 승인 2012.03.1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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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미래한국 편집장 (2003년 1월 [월간조선] 기고문)

"이제 중국이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길은 탈북자 문제를 국제법상 적법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 최고위 지도층이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국제적 시대의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수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 정신이 중국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또한 시간이 간다고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거대한 조직은 외부의 압력 없이는 변화하지 않는다"


中國의 탈북자 정책과 탈북자 실태

2001년 12월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국제협약국 間 장관급 회담에서 中國 외교부 副부장 王光亞(왕광야)는 「난민 지위에 관한 유엔협약(1951)」의 意義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유엔 난민협약은 국제난민법의 大헌장(Magna Charta)이다. 이 협약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불행한 난민들에게는 희망의 촛불이며… 난민을 보호하고 도움을 제공하는 인도주의자들에게는 활동의 지침서다』

2000년 5월 제네바에서 열린 제24회 고문방지委(CAT) 회의에서 중국대표 宗淮(차오쫑회)는 국제법에 대한 중국 정부의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중국은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국제법상 원칙(pacta sunt servanda)을 존중한다. 국제협정은 중국의 법률제도 안에서 보장되며 중국에서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된다. 국제협정과 국내법이 충돌할 때는 국제협정 조항이 국내법에 선행한다』

2001년 6월11일 중국이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도 국제법이 중국 국내법의 상위개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하지만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을 볼 때 중국 정부가 과연 난민에 관한 국제협약을 존중할 의사가 있는지, 중국 정부가 내놓은 일련의 공식적 발언은 외교적 修辭(수사)가 아니었는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중국은 「중국 內 탈북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소수의 경제적 이주민이 있을 뿐」이라며 脫北 난민의 존재를 기본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탈북자에 대한 실태조사를 거부하고 있고, 송환되면 처벌될 것이 분명한 수만 명의 탈북자들을 체포해 북한으로 압송해 왔다.

탈북자 강제 송환은 중국이 1986년 북한과 체결한 「밀입국자 송환 협정」과 「국경지역 업무 협정」에 근거한 것인데 탈북자를 체포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탈북자에게는 최소 200위안(약 5만원), 탈북자를 보호하고 있는 단체나 개인에 대해서는 최고 7000위안(약 120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있다. 중국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이 700~1500위안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결코 적잖은 액수다.

이런 사실들은 2002년 5월16일 錢基琛(첸치천) 부총리가 일본 언론인 접견 자리에서 밝힌 내용, 즉 『중국의 탈북자 정책은 북한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중국 內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하는 것』, 『(중국은) 탈북자들을 강제로 북한에 돌려보내지 않고 있다』고 언급한 것과 극명하게 상반된다.

국제 탈북자 보호 단체 및 언론들은 중국 內 탈북자 수를 수만 명에서 수십 만 명까지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의 인권 단체인 「좋은 벗들」(이사장 法輪 스님)은 1998년 북한의 「식량 난민」이 30만 명이라고 발표했고, 2002년 9월 金夏中(김하중) 駐中 대사는 탈북자 수를 수만 명이라고 밝혔다.

1999년에 작성된 吉林省 사회과학원 東北亞 연구센터 보고서에 의하면, 매년 중국 정부에 의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는 탈북자 수는 1995년 이전에는 매년 200~300명, 1996년에는 589명, 1997년에는 5439명, 1998년에는 6300여 명이었다고 한다.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CNKR·본부장 金尙哲)는 최근 강제 송환자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는 점과 북한內 식량 사정이 1990년대 중반에 비해 다소 나아져 탈북자 수가 실질적으로 줄었다는 것을 근거로 현재 중국 內 탈북자 수를 5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탈북자는 국제법적 난민이다』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바 있던 탈북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그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처벌이 과거에 비해 다소 가벼워진 것으로 보인다. 수만 명이나 되는 탈북자들을 이미 포화상태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에서 더 이상 관리할 수 없다는 북한 당국의 통제능력 상실이 주요 이유다. 또한 국제사회의 이목을 우려하고 있는 중국이 탈북자 처우에 대한 우려를 북한 측에 전달한 것도 한몫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중국 거류 당시에 한국의 선교사 등과 접촉한 사실이 밝혀지는 탈북자들은 처형되거나 목숨이 보장되지 않는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되는 현실은 예전과 동일하다. 수 개월 만에 석방되는 탈북자들의 경우도 일체의 적법절차가 보장되지 않는 조사과정에서 구타와 강제투옥 등 가혹한 인권유린 상황을 겪게 된다.

국제난민법의 기본법인 「난민에 관한 국제협약(1951)과 의정서(1967)」에 의하면 난민은 「인종, 종교, 국적, 사회적 계층,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본국으로부터 처벌받을 위험」에 처해 있고 그 같은 이유로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로 규정된다.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탈북자들은 국경을 넘는 순간 북한의 실정법을 어기게 되는 것이 되고, 이로 인해 본국에서 처벌받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2002년 7월 말부터 8월에 걸쳐 제네바에서 열린 제54차 유엔 인권小委에서 결의된 내용도 위 해석을 뒷받침했다. 소위원회의 결의문은 중국이 난민뿐이 아닌 「모든 사람」을 강제송환 하는 것을 중단하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탈북자들이 본래 국경을 넘는 이유와는 상관없이 이들이 압송되면 처벌의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 자체가 국제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1999년 실시된 CNKR의 탈북자 실태조사에 의하면 탈북자 中 90%가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응답했다.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하는 첫째 이유는 고문이나 구타로 인해 「불구가 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는데 응답자 中 60%는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느니 차라리 자살을 택하겠다고 응답했다.

중국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은 「처벌을 이유로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국제법상의 난민이 되는 것이다.

이 실태 보고서에 의하면 응답한 탈북자들의 67%가 함경도 출신이었다. 이는 물론 함경도가 중국 국경에 근접해 있다는 데도 기인하지만 함경도 주민 중 많은 숫자가 북한 사회의 계급 구조 안에서 최하 계층인 「적대세력」에 든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적대세력에게는 식량배급의 우선 순위가 뒤쳐진다. 그래서 다른 지방보다도 많은 수의 함경도 시민들이 배가 고파 북한을 탈출했다는 것은 이미 그들은 북한 內에서 「사회적 계층」 혹은 「정치적 견해」의 이유로 박해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180만 명의 서명

탈북자 문제가 처음으로 불거진 시점은 1992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가 이슈화되기 시작한 것은 북한이 국제사회에 식량지원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유엔개발계획(UNDP)과 세계식량계획(WFP)이 북한에서 활동을 시작한 1995년부터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무렵부터 「북한인권시민연합(이사장 尹玄 목사)」과 정토회의 「좋은벗들」 등 몇몇 단체들이 북한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이 탈북자 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문제의 해결 방안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 것은 1999년에 접어들면서부터다.

月刊朝鮮 2001년 7월號에도 자세히 보도된 바 있듯이 1999년 4월에 설립된 CNKR은 탈북자 문제를 국내외적으로 이슈화하는 데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특별기구인 CNKR은 1999년 4월부터 2001년 5월까지 2년여 동안 탈북자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고 난민들의 강제송환을 즉각 중단하라는 내용의 유엔청원 서명운동을 벌여 1180만 명이라는 경이적인 숫자의 서명을 받아냈다.

CNKR 사절단은 2001년 5월16일 뉴욕 유엔본부를 방문해 길리안 소렌슨 유엔 사무총장보에게 청원서(2차분)를 전달했고, 워싱턴에서는 크리스토퍼 콕스 하원 정책위원장 등 美 의회 지도자 및 국무부의 주요 정책 결정자들을 만나 탈북자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국제사회의 협력을 요청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이 1999년 이래 주최해 온 세 차례의 국제회의도 탈북자 문제를 국제적으로 이슈화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해외 언론도 심도 있는 탈북자 문제 기사를 다루기 시작했다. 2001년 3월5일자 뉴스위크 국제版은 「지옥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제목의 탈북자 관련 기사를 커버 스토리로 실었고, 같은 달 22일 LA 타임스는 몽골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탈북자들을 소개했다. 2002년 6월에는 ABC 방송의 인기 프로그램 「나이트라인」에서 「숨겨진 삶」이라는 제목으로 탈북자의 실상을 3회에 걸쳐 全美에 보도했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방영된 이 프로그램은 일반 미국인들이 탈북자의 실태를 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랑스 시라크 대통령, 1999년 江澤民에 탈북자 문제 제기

미국과 프랑스 등 세계 주요 국가들은 정부 차원에서 탈북자 문제의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1999년 10월,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이 自國을 방문한 중국의 江澤民(강택민) 주석에게 탈북자 송환 문제 등 북한의 인권유린 상황에 대해 답변해 줄 것을 요구해 중국 정부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2002년 6월 美 상·하원에서 채택된 결의문은 북한의 인권유린 상황을 토론하고 중국이 탈북자들의 실태 파악을 위한 UNHCR(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의 조사활동 허용 등 적절한 국제법적 절차를 통해 탈북자 문제를 처리 할 것과 강제송환을 즉시 중지할 것을 강력한 언어로 명시했다. 결의案을 주도했던 공화당의 샘 브라운 상원의원과 헨리 하이드 하원 국제관계위원장은 10월17일과 18일 美 이민귀화법 207조에 의거 탈북자들에게 국제난민 지위를 부여하고 이들의 미국 망명을 허용하기 위한 「북한난민 구호법안」을 상·하원에 각각 제출했다.

2002년 9월30일 美 샌디에이고 이민 법정은 이상남, 이성철氏에 이어 세 번째로 탈북자 김순희氏의 망명 지위를 인정하고 미국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바 있다.

현재 美 상원은 탈북자들의 해외 정착을 위한 임시수용소 건립과 탈북자 보호단체의 지원을 위한 해외지원 지출금 8000만 달러를 상정해 놓고 예산을 심사중이다.

美 국무부 副장관 리처드 아미티지는 2002년 8월 말 중국을 방문했을 때 탈북 난민들을 돕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수감된 千璂元 전도사의 석방과 탈북자들의 강제 송환 중지, 국제 기준을 충족시키는 탈북자들의 처우를 중국 측에 요구했다. 千璂元 전도사는 9개월여 억류 생활을 마치고 2002년 9월5일 석방됐다.

일본 정부도 최근 들어 탈북자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2002년 10월 말 북조선구호기금의 대표 카토 히로시氏가 중국에서 탈북자 지원활동을 벌이다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본 외무성은 즉각 중국 측에 카토氏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해 7일 만에 카토氏의 신변을 인도받았다. 고이즈미 총리는 한 발 더 나아가 비슷한 사건의 발생을 사전에 예방하고 김희태 전도사 등 아직도 중국에 억류돼 있는 한국인 인권운동가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駐日 중국 대사를 불러 항의의 뜻을 전달했다.

의회 차원으로는 나카가와 의원과 도이 류니치 의원을 중심으로 「북한 난민과 인도 문제에 관한 민주당 의원연맹」이 결성되어 있으며, 2002년 8월16일에는 국회인권포럼 대표 黃祐呂 의원과 국회조찬기도회 대표 金泳鎭 의원 등 한국 의원들이 일본 의원들과 모임을 갖고 「북한 탈북자와 인권 문제를 위한 국제의원연맹」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2003년 2월 서울에서 열리기로 예정된 국제의원연맹 총회에는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표명해 온 미국의 샘 브라운백, 자비아 바세라, 마크 커크 의원 등이 참석하며 덴마크의 마그렛 샌드백, 독일의 마이클 갤러, 이탈리아의 올리비에 듀포이, 네덜란드의 베스찬 벨더 유럽의회 의원들과, 몽골의 오윤 의원 등이 참가할 예정이다.

국제화된 脫北者 문제에서 주도귄을 놓친 金大中 정부

탈북자 문제의 당사국인 한국 정부는 탈북 난민 문제에 대해 「조용한 외교」를 표방해 왔다. 외교통상부는 탈북자의 난민 지위에 관하여 중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회의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국내에서는 국제적 수준에 걸맞은 국제난민법에 대한 시각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이에 따라 탈북자 문제 해결의 주도권은 미국과 일본 등 다른 나라로 넘어갔다. 自國의 문제를 다른 나라에게 떠맡기게 된 한국 외교는 국제무대에서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2년 10월29일 駐韓 프랑스 대사가 한국의 북한 인권 관련 인사들을 대사관저로 초청하여 오찬을 함께 했다. 프랑수아 데스쿠에 대사는 『한국에서는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여섯 명의 한국 측 참석자들은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2000년 3월 北京에서 亞太인권포럼이 열렸을 때 CNKR의 金尙哲 본부장은 한국 외교부 관계자에게 탈북자 강제송환 문제를 거론해 달라는 뜻을 전했고, 1999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 NGO 대회에 참석한 메리 로빈슨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으로부터 2000년 北京 인권포럼에서 탈북자 문제를 거론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北京 포럼에서는 탈북자 문제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메리 로빈슨 고등판무관은 후에 『한국 정부가 거론하지 않는데 국제사회가 거론할 이유가 있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국회에서는 2001년 7월 「북한 이탈 주민의 난민지위인정 촉구 결의案」이 발의돼 수정을 거쳐 11월에 채택됐다. 하지만 이 결의안은 탈북자들을 국제법적 개념이 아닌 「새로운 개념」의 난민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이미 탈북자들을 국제법상 원칙적인 난민으로 인정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는 주장이었다.
2002년 7월 黃祐呂, 李柱榮 의원 등 한나라당 의원을 중심으로 재차 상정된 「탈북자 인권보호를 위한 국회결의案」은 보다 앞선 내용을 담고 있어 고무적이긴 하지만, 2002년 6월 美 상·하원에서 채택된 결의안보다 시기적으로 뒤진 것이다.

NOG 및 개인 들의 국제활동

탈북자 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부각되는 데는 국내외 탈북자 보호 단체 및 개인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탈북자 보호를 위해 국내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고 있는 대표적인 단체로는 「북한인권시민연합」, 「좋은벗들」, 「CNKR」 등이 있다. 이들 외에도 탈북자들을 위한 선교단체인 「모퉁이돌 선교회」와 「두리하나 선교회」, 그리고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등이 있다. 안보통일포럼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등 관련 기관은 세미나와 공청회 등을 통해 탈북자 문제의 해결점을 점차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해외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단체로는 한국, 독일, 프랑스, 일본, 미국, 벨기에, 영국 등 세계 10여 개국 인권운동가들이 모여 기획 망명 등 국제 공조 프로그램을 추진해 왔다. 1987년 영국에서 설립된 인권단체 「주빌리캠페인(JC)」, 브뤼셀에 본부를 두고 있는 인권단체 「국경없는인권(HRF)」, 영국의 「세계기독인연대(CSW)」, 在美교포 젊은이들이 만드는 북한 인권 인터넷 뉴스레터 「조선저널」, 일본의 「긴급행동네트워크(RENK)」 등이 있다. 이 밖에 국제사면위원회, 아시안 ♥치, 美 국무부 인권보고서 및 국가보고서 등은 북한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인권 상황을 정기적으로 보고하고 있다.

한편 개인 자격으로 활발한 국제 활동을 벌이고 있는 人士로는 독일인 의사 노베르트 폴러첸氏가 있고 그와 함께 최근 외교공관 진입을 통한 탈북자들의 망명을 기획한 바 있는 피랍탈북시민연대의 李犀(이서) 목사와 朴 某 장로, 美 연방기관인 국제종교자유위원회 위원장 마이클 영, 2002년 9월4일 탈북자 장길수 군을 초청하여 美 상원의회 별관에서 탈북자들의 실상이 담긴 그림 전시회를 주최한 샘 브라운백과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디펜스 포럼의 이사장 수잔 솔트 등이 있다.

일찍이 프랑스 지식인 24人과 함께 북한 인권 문제에 관한 호소문을 발표한 바 있는 프랑스 북한주민돕기 위원회 대표 피에르 리굴로, 美 전역에서 북한 주민과 탈북자들의 비참한 인권실태를 알리고 있는 허드슨 연구소의 마이클 호로비츠, 美 정치평론가 척 다운스,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팀 피터스, 그리고 최근 탈북자 구호활동 中 체포돼 중국에 억류된 바 있던 북조선구호기금의 카토 히로시氏도 활발하게 국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대표적 人士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2001년 6월26일 길수 가족이 UNHCR 北京 사무실을 통해 한국에 오게 된 데 이어 2002년 3월에는 25人의 탈북자가 스페인 대사관에 진입해 전원 한국으로 입국했다. 이후에도 외교공관 진입을 통한 대규모 망명이 줄을 이었다. 이는 탈북자 보호 단체의 치밀한 계획下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이와 맞물려 탈북자 문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첫째, 당초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탈북자에 대한 국제법상 난민 지위 부여가 여러 국제 관련 단체와 개인의 활약을 통해 현실적으로 가능한 사실이 됐다.

둘째, 앞서 錢基琛 중국 부총리 등 중국정부가 국제무대에서 한 발언에서도 보았듯이 중국은 이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국제법을 존중해야 한다는 국제적 대세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이는 근래 발생한 탈북자들의 외교공관 진입 사건을 처리하는 중국 당국의 방침에도 잘 드러났다.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는 탈북자 외교공관 진입 사건이 발생했을 때마다 중국 정부는 탈북자들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제3국으로 추방하는 모양새를 통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면하고 문제를 극소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도 드러나지 않는 대부분의 탈북자들에 대해서 중국 정부는 오히려 색출과 강제송환 방침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데 이러한 중국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셋째, 이제 중국이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길은 탈북자 문제를 국제법상 적법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 최고위 지도층이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국제적 시대의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수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 정신이 중국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또한 시간이 간다고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거대한 조직은 외부의 압력 없이는 변화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탈북자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002년 7월12일, 10월12일, 11월23일 세 차례에 걸쳐 CNKR, 주빌리캠페인 미국지부(대표 앤 부왈다 변호사), 한동大 로스쿨 난민문제센터(원장 린 버자드) 등 북한 인권단체와 폴러첸, 팀 피터스, 李相冕 교수(서울大 법대) 등 인권문제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탈북자 문제 해결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지속적인 협력을 위해 국제 탈북난민국제연합(ICNKR)을 만든다는 데 합의 했다. 실무회의에서 논의된 사항들은 중국에 외교적 압력을 넣기 위해 北京 올림픽 참관 보이콧 캠페인, 업무 불이행에 대한 UNHCR을 상대로 한 문제 제기, 중국 변호사를 통한 중국 內 소송 등이었다.

최근 일부 인권단체의 기획에 의해 이루어진 외국 공관이나 UNHCR 사무실 진입을 통한 탈북자들의 망명은 일시적으로는 더 많은 탈북자가 중국 당국에 의해 색출되고 북한으로 압송된다는 희생적 면이 있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의미 있는 일이다. 지금은 행동하는 人權운동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인간 존엄성의 명백한 훼손 사례 앞에서 현실론을 내세우는 소극론을 펼치기 보다는 인간 존중의 명분을 붙들고 끊임없이 국제인권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특히 중국 같은 大國(대국)을 상대로 하는 문제에서 더욱 효과적인 전략이 될 것이다. ●  (김범수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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