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와 잡스러움을 눈치 보는 사회
젊은이와 잡스러움을 눈치 보는 사회
  • 미래한국
  • 승인 2012.03.27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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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그런 상황에서는 선생이 학생들을 무서워하여 이들한테 아첨을 할 것이며, 학생들은 선생에게서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을 걸세.”

마치 곽노현이 학생인권조례를 강행한 이후의 일선 학교 상황을 묘사한 듯하다. 이 사람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또한 전반적으로 젊은이들은… 언행에서 전혀 삼감이 없게 될 걸세. 반면 노인들은 젊은이들의 눈치를 보고 덩달아 채신없이 굴면서 기지와 재치를 과시하려 할 걸세. 불쾌하고 권위적이라는 오명을 쓸까 두려워하는 게지.”

SNS니 ‘나꼼수’니 등의 마구잡이 배설에 휩쓸리는 젊은 세대, 그럼에도 그런 잡스러움을 꾸짖기는 커녕 아부하기에나 바쁜 정치판의 행태! 거의 그 정곡을 찌르고 있다.

2000년전 플라톤이 꼬집은 현 세태

그런데 위의 언급은 한국인도 오늘날 인물의 말도 아니다. 위 구절들은 24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한 철학자에게서 인용한 것인데, 그의 이름은 플라톤이고 저서는 <국가>다.

주지하듯이 플라톤은 민주정체를 옹호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소수 엘리트에 의한 철인정치를 이상적인 정체로 내세웠다. 칼 포퍼는 그런 플라톤을 두고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우리 세기에 새로운 야만을 불러온 전체주의의 정신적 시조”라고 비판했다.

포퍼의 지적이 일리가 있다. 그에겐 공산주의와 나치즘이라는 20세기의 좌우 양대 전체주의의 혹독한 경험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과 철인정치가 어디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증명이었다. 그런데 그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2400여 년 전 플라톤의 지적이 작금의 한국 정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처럼 들리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제도 또는 그런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 민주주의의 사전적 정의다. 간단히 주권재민(主權在民)이다. 우리 헌법은 제1조 2항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당연한 원칙 하나가 너무 자주 잊히고 있다. 권리에 따르는 책임이다.

주권(主權)은 원래 매우 무거운 개념이다. 지금은 주로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뜻으로만 사용되지만 그 본래 함의는 그 차원을 넘어선다. 주기도문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한 언명에서 알 수 있듯이 적어도 서구 기독교 문명 전통에서 주권(Sovereignty)은 원래 신에게나 해당할 수 있는 있는 용어였다. 중세 가톨릭 단일세계 시대, 신의 지상 대리자로서의 교황권은 모든 세속 통치권의 우위에 있는 것으로 간주됐다. 이후의 절대왕권도 왕권신수설이라는 용어 자체가 설명하듯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지상에서의 대리권일 뿐이었다.

主權과 책임

한편 주권의 원천인 신의 본질은 전능함인데 이는 신성한 책임과 양면이다. 신학적 비유를 하자면 신은 율법을 부여하고 그를 지키지 않는 인간을 징벌하기도 하지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육화하여 십자가에 매달리는 고통을 감수하는 무한책임을 진다. 그래서 신적 주권의 지상대리권인 왕권도 지상에서 그처럼 책임을 진다. 즉 주권의 신성함은 무한책임을 그 자체로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근대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하는 과정에서 주권의 의미는 통속화됐다. 주권의 새로운 확립이 지상에서의 책임보다는 욕망의 관철을 위한 권리의 획득이라는 차원에서 진행된 결과였다. 왕을 추방하고 또 그에게 주권을 부여했던 신도 밀어낸 자리에 인민이 들어섰다. 하지만 인간도 그 집단인 인민도 전능자는 아니다. 당연히 무한책임을 질 능력은 없다. 결국 자신의 욕망 실현을 위한 권리와 그 실현의 場인 세상에 대한 책임 사이에 근원적 균열이 자리하게 된다. 이것은 신 혹은 가치를 떠나 통속에 머물기로 한 세속적 존재로서의 근대적 인간의 숙명이다.

민주주의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서 우상화돼야 할 어떤 것은 결코 아니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가치 있고 훌륭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지상에서의 정치적 삶과 관련한 것이며 그것도 근원적 한계를 가진 인간들의 제한된 지혜 이상이 아니다. 그런데 근대 이후 인간들은 우선 스스로를 절대가치로 우상화하고 나아가 지상에서의 정치적 삶의 역사적 방식도 너무 쉽게 우상화했다. 모든 것이 다 그렇듯 민주주의도 우상화되는 순간 그 바람직한 가치 자체를 집어삼키는 괴물로 바뀔 수 있다.

히틀러는 2차 대전의 참화를 불러 일으키고 6백만 유태인을 학살했다. 그러나 그는  쿠데타나 봉기가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민주적이었다는 바이마르 체제 하에서 합법적 과정을 통해 정권을 잡았다. 민주주의 안에서 ‘악의 탄생’이 이루어진 것이다.

괴물이 된 민주주의

칼 슈미트의 견해를 빌리자면 ‘자유를 주어선 안 되는 부류에게 정치적 자유를 준 대가’였다. 칼 슈미트는 나중에 나치에 협력한 탓에 언제나 어느 정도는 터부 대상이다. 하지만 그는 나치가 집권하기 전에는 공산당 뿐 아니라 나치에 대해서도 경계와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점이 문제가 돼 나중에 나치에서도 쫓겨났다.)

오늘 우리 한국의 정치 상황은 어떤가? 한국의 치열했던 민주화 과정은 산업화와 함께 우리 현대사의 위대한 양대 성취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주의는 서구사에 비춰보면 매우 어리다. 우리가 만약 민주주의를 진정 소중히 한다면 아직 여물지 못한 이 연약한 나무를 매우 섬세하고 소중히 다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이마르 체제의 실패가 한국에서 나타나지 말란 법이 없다.

다수결로 모두의 자살을 결의했다고 해서 그에 반대하는 소수가 그 집단자살 결의에 따라야 할 것인지 자문해 보자! 나꼼수는 그들이 자처하듯 저질이다. 그런데 이 쓰레기가 버젓이 주류 무대에서 행세를 한다. 이는 비유컨대 공중파에서 포르노를 트는 것과도 다르지 않은 사회 자체에 대한 문화적 윤리적 테러행위다.

종북들이 거리낌 없이 활개를 치더니 해군기지를 해적기지라고 하는 자까지 나왔다. 안보는 생존의 문제며 그것은 어떤 점에선 다수결 차원도 넘어선다. 그런데 종북 좌파와 그에 포섭된 민주당 등은 이미 그 원칙마저도 망치와 톱까지 동원해 일찌감치 유린했다. 이런 난행들도 정치적 자유를 누려야 하나? 어떤 자유국가도 그 자유를 지키는 국가 자체를 훼손할 자유를 줄 수는 없다. 지금 한국은 어떠한가?

민주주의에는 왕이 없다. 신을 탓할 수도 없다. 선택에 따른 책임은 국민 자신이 져야 한다. 하지만 대중은 권리 선동에는 곧잘 흥분하면서도 선택에 따른 책임은 그만큼 엄중하게 느끼지 않는다. 특히 중간층이 그러한데 이번에 불만을 한껏 표출하고 마음에 안 들면 다음에 또 다르게 찍으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냉엄한 역사적 과정은 다음번을 용납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새누리당은 동요하는 중간층 설득은 고사하고 전통적 지지세력마저 놓치고 있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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