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갈이 찢겨진 나의 삶… 나는 짐승처럼 살았다”
“갈갈이 찢겨진 나의 삶… 나는 짐승처럼 살았다”
  • 김주년
  • 승인 2012.04.13 09: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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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인신매매 탈북여성의 통곡

지난 4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세이브엔케이(Save North Korea) 주최 기자간담회에서 탈북여성 차혜원 씨(45)가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했던 자신의 경험과 기구했던 삶의 모습에 대해 생생히 증언했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나는 북한 온성에서 태어났다. 1999년 먹고 살기 어려워 중국으로 나왔다가 북한으로 잡혀간 적이 있다. 당시 온갖 고문을 받았고 정신이 나가 완전히 미치고서야 풀려났다. 아직 젊은 나이에 옷을 풀어헤치고 동네를 돌아다닐 정도였다. 이후 정신을 차리고 몸을 추스린 후에 2000년 6월 다시 탈북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정상적으로 먹고 살기도 불가능했다. 남편도 이미 사망했고 결국 거기서 굶어죽느니 다시 탈북을 하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나는 4살짜리 딸을 등에 업고 두만강을 건넜다. 뒷짐에는 또한 옥수수와 된장, 그리고 면도날이 있었다. 유사시에 아이와 함께 자살을 하는 게 다시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도망가다가 성공을 못하면 아이의 목 동맥을 먼저 긋고 나의 동맥을 끊으려고 했다.

낮 12시쯤 두만강 앞에 도착했다. 대낮에 이 넓은 강을 설마 누가 건널까 생각해서 그런지 인민군의 감시가 소홀했다. 강에 들어가자 허벅지까지 물이 차올랐다. 무서워서 다시 돌아섰지만 그대로 나가면 젖은 모습까지 발각돼 나와 아이 모두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강으로 들어갔지만 결국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정신을 잃었는데 잠시 후에 보니까 나는 강 인근 느티나무에 걸려 있었고 아이도 무사했다.

옆을 보니 강을 건너다 죽은 듯한 여자 시신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작정 아이를 업고 기어나왔다. 결국 중국에 미리 탈북해 있던 아버지를 만났고 일단 안도하며 한 달간 몸져누워 있었다. 한 달쯤 후에 아버지는 “중국인 인신매매범들이 공안으로 위장해서 잡으러 올 수 있으니 피해야겠다”고 했다.

어느 날 탈북 남성이 일자리를 제안했다. 남자들 밥을 아침저녁으로 두 끼만 가서 해주면 1주일에 300위안씩 준다는 것이었다. 귀가 솔깃해져서 하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둔한 일이었다. 그 사람은 탈북민 출신 인신매매범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나를 노래방에 팔아넘기려고 했다.

그런데 딸이 그날따라 무조건 따라가겠다고 해서 데리고 나갔다. 그 당시엔 내가 중국어를 전혀 못해서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남자는 만난 사람들과 “저 여자를 노래방에 팔면 많이 받겠는데 아이와 함께 팔 수는 없다. 일단 애는 떼어놓자”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다행히도 딸이 나와 절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한족에게 팔려갔다. 그 당시에는 팔려가는 줄도 모르고 일을 하러 가는 줄 알았다. 아이와 함께 끌려간 곳은 흑룡강성의 어느 마을이었다. 다 쓰러져가는 집이 땅에 파묻혀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집에 형제가 세 명이나 있었다. 네 형제가 사는 집이었는데 나는 셋째 동생에게 시집을 온 셈이 된 것이다. 몸이 멀쩡한 넷째도 일을 전혀 하려고 하지 않아서 집안 꼴이 엉망이었다.

그곳에서 내 의지와 무관하게 매일 겁탈을 당하고 두들겨 맞는 날들이 계속됐다. 그래도 그것이 북한으로 다시 잡혀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욱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나를 사온 남자가 가끔 오래 집을 오래 비우면 그 틈을 타서 다른 형제들이 나를 밤마다 돌아가면서 겁탈하려는 것이었다.

밤 11시반에 두 명이 번갈아가면서 비닐문을 손으로 긁으면서 내방으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정말 무섭고 소름이 끼쳤다. 어느 날은 밤중에 큰 낫을 들고 와서 내 방을 두들기면서 나를 협박했다.

나는 그 집에 온 이후 아들도 낳았다. 팔려갔을 때가 임신 초기였는데 그 4형제는 자신들의 아들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 젖먹이 아이를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인질로 잡으려고 아이를 낳도록 내버려두었다.

한번은 나를 사온 셋째 형제가 자신의 형들이 나를 겁탈하러 오고 며칠 전에는 낫을 들고 와서 행패를 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랬더니 그는 극도로 화가 나서 자신의 형들을 죽이러 가겠다고 했다. 나는 극구 말렸다. 그 짐승만도 못한 두 명을 죽이는 건 찬성하지만 살인사건이 일어날 경우 분명히 중국 공안이 올 테고, 그렇게 되면 탈북민이라는 내 신분이 들통 나서 아이와 함께 강제북송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탈북민이 한 명 머물렀다. 지나가다 중국말로 물을 좀 달라고 하는데 들어보니 발음이 이상해서 혹시 북한사람 아니냐고 물어보니 맞았다. 다행히도 나와 생긴 게 비슷해서 내 사촌동생이라 속이고 집에 같이 머물기로 했다. 그러나 그 집 형제들은 의심을 하고 질투를 했다.

하루는 술을 먹고 남편이 나를 때리는데 그 탈북 남성이 막아줘 그나마 덜 맞았다. 어느 날은 남편이 술을 잔뜩 먹고 칼로 나를 찌르려고 했는데 그 남자가 남편을 때려 실신시켰다.

나는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그 남자에게 “일단 여기서 피하고 나중에 다시 만나서 함께 남조선으로 도망가자”고 했다. 마침 내 아버지는 남조선에 성공적으로 도착했다는 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남편이 깨어나더니 다시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밀고 밀치는 과정에서 그의 왼쪽 팔 동맥에 상처가 났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병원에 가야 했다. 치료를 받기는 했는데 상처가 곪아서 파상풍에 걸렸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일어나지 않기에 보니 죽어 있었다. 경찰이 와서 혹시 내가 죽인 게 아닌지 조사를 했는데 다행히도 마을 주민들이 ‘절대 그럴 여자가 아니다’고 증언을 잘 해줘서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이후 그 집 친척들이 모여서 가족회의가 시작됐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나를 그 집 넷째에게 다시 시집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짐승만도 못한 짓이며 절대 그럴 수 없다. 차라리 나를 중국 공안에게 신고해서 아이들과 함께 북한으로 보내라. 나는 반드시 다시 나와서 복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신고를 못했다. 난 일단 아들을 남겨두고 딸과 함께 떠나기로 결심했다.

모두가 가기에는 브로커에게 줄 돈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남자아이이기 때문에 성폭력이나 인신매매의 위험은 상대적으로 적고 나중에 다시 데리러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조선족 집에 아이를 맡겨두고 길을 떠났다. 결국 태국을 통해 아버지가 미리 가 계신 한국 땅을 무사히 밟을 수 있었다.

6개월 후에 아이를 데리러 다시 중국 현지에 갔는데 그 조선족 집은 그 자리에 없었다. 나중에 수소문해 보니 내 아들을 한족의 집에 돈을 받고 팔았다는 것이었다. 아들이 보름 동안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지금 살아 있으면 10살일 텐데, 꼭 만나고 싶다.  (미래한국)

사진/세이브엔케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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