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난민캠프 건립을 추진하자
탈북난민캠프 건립을 추진하자
  • 이종윤
  • 승인 2012.04.13 09: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탈북난민보호 1180만495명 UN 청원 서명의 뜻 이어져야

이종윤 편집고문
한국기독교학술원 원장
세이브엔케이 이사장
서울교회 원로목사

탈북민 북송 저지 국제 여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이 2007년 1만명을 넘었고 2011년 말에는 2만3,000명을 돌파하며 급격히 늘고 있다. 북한의 김정은은 ‘배신자는 삼족(三族)을 멸하라’며 탈북민의 길을 적극 막고 있으나 그 땅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는 이들의 행렬이 계속 증가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북한에서 300만명 이상이 아사(餓死)를 당했을 무렵 1999년 3·1절 80주년 기념대회가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렸다. 우연인지 기연인지 한국에서 목사와 장로 33명이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시편 126편의 ‘눈물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는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관에 입각해 교역자와 평신도가 모여 시대의 의미를 깨닫고 나라와 민족의 문제를 안고 특히 동토의 땅에서 강도 만난 북한 동포들을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126기도’동지들이었다. 그 동지회의 창설자는 김상철 장로(미래한국 발행인 회장)로 바른 국가관과 역사를 통찰할 줄 아는 예지를 갖춘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이들이 수를 더해갔다.

탈북난민 보호운동의 출발

그때 강사로 참여했던 필자는 북한을 50번 이상 방문한 어느 교포의 보고를 듣다가 목사로서 듣고만 있을 수가 없어 긴급동의로 세 가지 제안을 했다. 그 첫째가 북한을 탈북해 제3국에서 헤매고 다니는 이들을 국제법상 난민으로 UN은 인정하라는 것과 둘째는 그들 난민을 위한 난민촌(refugee camp)을 인접국가에 UN은 설치하라, 그리고 셋째는 그 경비는 한국정부와 특히 한국교회가 함께 감당하라는 세 가지를 발의해 즉석에서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대표기구인 한기총에 이 사실을 알리고 탈북난민보호운동위원회(CNKR)를 한기총 산하에 두기로 했다. 그후 CNKR 발대식을 1999년 4월 16일 가진 지 한달반 만에 전국적으로 20만명의 서명자를 기록했고 6개월이 지난 1999년 12월에는 200만명을 달성했다.

국내에 90여개지부, 해외에 10개지부가 결성됐다. 주로 기독교 관련 단체와 기독교 학교 등을 중심으로 전개됐지만, 가두 서명 등을 통해 일반인의 호응도 높아졌다. 혼자서 각각 10만명 이상의 서명을 받은 분들이 한 교회에서만 세 분이 나오기도 했다. 눈물나는 얘기들이 많이 있다.

CNKR은 발대식을 가진 지 만 2년이 채 안 된 2001년 3월 28일에 1천만명의 서명을 달성했다. 한 달 뒤 2001년 4월 27일 서명 1천만명 돌파 감사예배 및 UN청원 대표단 파송식을 서울교회에서 가졌다. 박근 전 유엔대사를 단장으로 한 15명의 대표단이 2001년 5월 16일 922만2,857명의 서명과 전에 제출한 것을 포함해 총 1,180만495명의 서명 용지를 UN본부에 전달했다. 1천만명 이상의 서명을 받는 것은 어쩌면 기네스북의 기록에 오를 만한 거사였다.

CNKR은 국제 NGO간 협의체(ICNKR)를 결성해 UN난민고등판무관실과 인권고등판무관실 그리고 한국과 중국 정부에 탈북난민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 정책 건의, 여론 조성을 꾸준히 함으로 탈북민의 국제법상 난민지위 인정을 촉구했다.

유엔청원 서명운동과 국제사회의 노력

그 무렵 프랑스의 인권단체들이 파리에서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선언문을 몇 차례 발표해 우리에게 큰 힘이 됐다. 또한 기독교 국제단체 중 가장 거대한 복음주의기구인 세계복음화를위한로잔위원회(의장 Doug Birdsal)와 아시아로잔위원회(의장 이종윤)도 북한인권 문제를 제기하고 탈북민 난민 인정을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시라도 빨리 난민 인정을 받기 위해 1999년 12월 제네바에 있는 UNHCR(유엔난민고등판무관) 본부에 257만7,638만의 서명된 청원서를 제출했고, 남은 922만2,857의 서명된 청원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01년 5월 16일에 뉴욕의 유엔본부에 대표단을 파송 전달했던 것이다.

UNHCR은 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탈북민 2,193명을 현장 조사했고, 탈북난민에 대한 뉴스를 전세계 언론과 각종회의에 알리기를 시작했다. CNKR은 중국법과 국제법 테두리 내에서 탈북민을 난민으로 인정하라는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마침내 미국 상·하원은 2002년 6월 북한인권법을 극적으로 통과시켰다. UN인권위도 2004년 4월 북한인권 결의안을 채택하고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을 신설키로 하는 등 지난 1999년 하나님의 감동으로 시작된 CNKR의 서명운동은 세계기독교계와 교회의 전폭적인 기도와 참여 속에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수많은 기록과 족적을 남기게 됐다.

UN에서 북한인권법은 통과됐다. 그러나 당사국인 대한민국 국회는 북한의 내정을 간섭해 남북관계를 악화시킬 것을 염려(?)해 아직도 그 법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작은 기도운동이 독일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불씨가 됐듯이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몇 사람들이 UN과 미국을 움직이고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았다.

이 운동의 본부장을 맡아 자신의 모든 것을 전폐하고 전력투구하던 김상철 회장은 국내외를 오고가며 청원운동 확산을 위해 산파 역할을 해왔다. 그는 1999년 11월 미국을 방문해 현지 언론과 정치인 그리고 미국 장로교 총회 등을 상대로 탈북민 보호대책 마련을 촉구하였고, 12월엔 스위스 제네바를 방문해 오카타 사다코 UN난민고등판무관, 메리 로빈슨 UN인권고등판무관등을 만나 그들의 지지를 받아냈다.

그는 탈북난민보호운동을 방해한 종북좌파 정권과 목숨 걸고 투쟁해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전력을 기울려 마침내 우파정권을 수립한 후 기진해 쓰러진 후 한 알의 밀알이 돼 지금까지도 투병 중에 있다.

CNKR은 이밖에도 가두행진, 가두서명, 국토대장정, 시민걷기대회 등 각종 국제행사를 통한 홍보를 했고 음악회, 오페라, 미술전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서명운동을 확산해 나갔다.

난민 캠프 건립의 의의

최근 우리 국회의원들이 제네바의 UNHCR을 방문한 이후 탈북민들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 자유를 사랑하는 이들의 관심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막상 중국은 그들을 난민이 아닌 국경 불법 침범자로 보고 북송을 계속하고 있어 국내외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중국의 입장도 고려할 수 있으나 북송된 그들의 처참한 미래는 불 보듯 뻔한데 그대로 두고만 볼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처지(處地)이다.

하여, 중국의 국내외적 체면도 세워주고 우리의 상황도 헤아리기 위해 우리는 13년 전 처음 탈북난민보호운동(CNKR)을 시작할 때 제시한 세 가지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즉 난민촌을 UN이 합법적으로 압록강(또는 두만강)변에 건립해 월경자(越境者)들을 북송 조치하는 대신 UN이 보호해 그들이 소원하는 제3국으로 보낼 수 있는 난민촌을 건립할 것을 촉구한다.

파키스탄 국경지대에 아프칸 난민촌을 UN이 세우고 독일교회가 지원한 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태국 북쪽 메콩강 연안에 UN이 설치한 라오스 난민촌은 NGO들의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다.

두만강(또는 압록강)변에 세워질 난민촌의 경비는 UN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교회를 비롯한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함께 보태게 될 때 국제적 갈등을 해소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CNKR의 상위 기구인 세이브엔케이( Save North Korea, 북한구원운동)가 주도하고 한국교회가 협찬해 UN은 탈북민 난민촌 건립을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추진해야 할 것이다. (미래한국)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