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보를 말하기 전에…
역사의 진보를 말하기 전에…
  • 이강호
  • 승인 2012.04.18 11: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곳의 장사꾼들은 육지와 바다를 통하여 이웃한 나라들과 광범위한 교역을 하기에 바빴다.” 수천km 떨어진 곳과도 무역을 하여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대도시를 자랑하는 많은 나라들이 성장했다. 정치적 집회의 권리를 인정하고 의회도 소집하는 세련된 정치체제를 구축한 나라도 등장했다. 
이렇게 번영을 구가하던 세계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웃한 어떤 두 나라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었다.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 그 중 한 나라의 통치자가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는 양원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로 의견이 갈렸다. 연로한 세대로 이뤄진 ‘상원’은 ‘무조건 평화’를 결의했다. 그러자 통치자는 그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문제를 ‘하원’으로 가져갔다.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젊은 남자 시민들로 구성돼 있던 하원은 전쟁을 결의했다. 통치자는 이에 의거해 전쟁을 선포했다.>
 
어느 나라 이야기일까?
 
위 서술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이야기일까? ‘교역으로 번영한 세계’에 ‘의회민주주의’도 등장하니 시대는 적어도 근현대는 되는 듯하고 지역적으로는 유럽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상하원에 주전파 주화파 의견 대립도 나오는 걸 보면 2차 대전 발발 직전 영국의 경우가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영국은 체임벌린 총리가 히틀러와 평화회담에 성공했다고 기뻐하다 뒤통수를 맞았으니 디테일에서 차이가 있다.
 
굳이 근현대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지 말고 의회민주주의와 전쟁이라는 키워드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경우를 부담 없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찾아보자. 얼핏 2200여 년 전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의 포에니 전쟁의 경우가 떠오른다. 로마는 원로원과 함께 민회도 있어 양원제였던 셈이니 그런 듯하다. 하지만 로마의 상원이었던 원로원이 포에니 전쟁 당시 ‘평화’를 결의한 적은 결코 없었으니 이건 로마와 카르타고 얘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200년 쯤 더 올라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경우는 아닌가? 아테네를 일컬어 흔히 최초의 민주주의 체제였다고 하니 그럴 법하다. 하지만 그 아테네도 양원제는 아니었으니 이건 그리스 얘기도 아니다.
 
서두의 이야기는 놀랍게도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다시 2500여 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 인류 최초의 문명 고대 수메르 세계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메르 문명은 후대의 그리스 세계처럼 많은 도시국가들로 이뤄져 있었고 마찬가지로 패권 다툼이 잦았다. 위는 그 중의 한 경우로 키시라는 패권국의 위협에 맞섰던 우르크의 이야기인데 수메르 문명 시대에서도 특히 초창기에 해당한다. 수메르 점토판 설형문자 기록 중에 노아의 홍수 설화의 원형이 기록돼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가 있다. 우르크의 전시의회를 소집한 통치자는 바로 그 주인공 길가메시 왕이다.
 
의회 그것도 양원제 의회가 민주주의의 최초 사례로 간주되는 아테네의 경우에 까마득히 앞서 최초 문명에서 이미 등장했다. 20세기 양차 대전의 원형을 보여주는 듯하다는 펠레폰네소스 전쟁과 포에니 전쟁, 그런데 그 아득한 이전에 마치 그 원형의 원형처럼 보이는 키시와 우르크의 다툼이 있었다.
 
고대 수메르라는 최초 문명에서 발견되는 경우임에도 그 면모는 지극히 현대적이기까지 해 보인다. 그런데 이후 중근동 일대의 역사는 그런 현대적 양상에서 점차 퇴보해 가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역사가 계속 진보해 간다는 생각은 과연 타당한가?
 
인류 역사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점차 단계적으로 진보해 왔다는 관념은 근대 이후 특히 두드러진다. 이것은 학파나 당파를 넘어 일종의 대중적 믿음이 돼왔다. 마르크스주의가 지금껏 그토록 강력히 세상을 현혹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유혹당하기에 충분할 만큼 역사주의적 환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의 명백한 파산 이후에도 좌익적 환영이 여전히 완강한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먼저 인간답게 행동하라
 
결국 문제는 역사주의다. 역사주의 특히 마르크스의 법칙적 역사주의는 칼 포퍼의 지적처럼 방법론적으로 빈곤하다. 하지만 그것의 진짜 문제점은 방법론상의 빈곤을 넘어 위험한 사유라는 데 있다. 역사주의는 현존하는 모든 것을 역사적 산물로 본다. 그래서 가치나 진리가 그 변치 않는 본질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잠정적인 것으로 상대화된다. 특히 유물사관에선 가치가 단지 사회의 역사적인 물질적 구조의 껍데기로 취급된다. 진보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가치의 상대화는 동일한 관념의 양면이며 상대화된 가치는 결국 해체로 귀결된다. 껍데기의 운명이다.
 
민족 고유의 역사적 특성을 강조하는 랑케 류의 역사주의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그것은 우선 그 자체가 상대주의이며 보편에 대한 외면이다. 이것도 겸손할 때는 다양성의 인정 요구 차원 정도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요구가 얌전하게 멈추는 법은 원래 없다. 강조는 자부심을 낳고 그 자부심은 상대적 존재에 불과한 자신을 절대적 자리에 올려놓으려 하게 된다. 보편에 대해서 외면을 넘어 대결을 시작하는 것이다. 나치즘은 그 극단의 한 사례다. 게르만적 고유성의 강조는 어느덧 절대적 이상화로 치달았다. 이 관념은 유태인에 대해선 대학살의 정당화로, 세계에 대해선 게르만의 세계지배의 정당화로 나아갔다. 자신만의 고유성에 대한 집착과 인간성 상실 그리고 세계를 향한 폭주의 뿌리는 모두 동일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히틀러와 스탈린이 결과적으로 닮은 게 우연이 아니다. 역사 발전 법칙의 강조와 민족적 특수성의 강조는 일견 매우 달라 보인다. 하지만 보편적 절대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양자는 동일하다. 결국 정신적으로 쌍생아다.
 
진보라는 관념은 달콤하다. 하지만 단 것을 너무 좋아하면 이가 썩고 당뇨가 생긴다. 과학기술은 몰라도 인간성과 인간 삶의 본질적 양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성이 진보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얼핏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성을 개조할 수 있다는 위험천만의 발상으로 치달을 수 있다. 킬링필드를 생각해 보라! 인간은 한계의 존재다. 그래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들뜬 환상이 아니라 변치 않는 가치에 대한 겸손한 믿음이다. 늘 그렇다.
 
탈북자 강제 송환을 저지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미약했지만 점차 동참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인간 본연의 양심의 울림이다. 그러나 이른바 진보를 외치는 자들은 그 절박한 외침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도롱뇽을 위해 단식을 하고 바위를 위해 기도를 하는 자들이 사람의 외침을 그것도 동족의 외침을 외면한다. 
 
“그때에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은…‘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대답할 것이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41~45절이다. 진보를 떠들기 전에 먼저 인간답게 행동하라! (미래한국)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