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주치의 출신의 보수우익활동가
대통령 주치의 출신의 보수우익활동가
  • 이근미
  • 승인 2012.04.23 16: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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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태 여의도 예치과 원장

 
여의도 예치과 원장, 서울 글로리아합창단 단장 겸 상임지휘자, 인터넷 타임즈 발행인, 국민행동본부 이사, 시인, 정치평론가, 모두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직함이다. 양영태 원장은 치의학 박사면서 신문학 석사이자, 지휘전공 석사이다. 서로 연관이 없는 다양한 일을 하되, 학위과정을 밟아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뒤, 빈틈없이 철저하게 실행하고 있다. 매일 아침 9시 30분부터 저녁 6시까지 직접 환자진료를 하면서 이화여대와 한림대 외래교수직까지 맡고 있다.

거뜬한 하루 일과

올해 67세인 양영태 박사는 “힘들지 않느냐,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어렵지 않다. 힘들게 없다”고 답했다. 그의 하루 일과를 따라가 보자. 매일 아침 4시 45분 알람소리에 맞춰 일어나 바로 컴퓨터를 켠다. 1시간 동안 뉴스 검색을 하고, 그날 해야 할 일에 대한 구상을 한 뒤 헬스클럽에 가서 6시부터 1시간30분 동안 운동한다. 샤워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한 뒤 병원에 가서 칼럼을 쓰고 수업준비를 한다. 그날 내원할 환자들에 대한 점검을 마치면 30분 동안 쪽잠을 자고 9시30분부터 진료를 한다. 진료하는 틈틈이 인터넷 검색도 하고 글도 쓴다. 점심식사를 한 뒤 다시 30분 동안 쪽잠을 잔다. 오후 진료 때도 틈틈이 인터넷 검색과 글쓰기를 하고 저녁 6시에 퇴근을 한다. 이후에 사람들을 만나고 10시경에 집에 돌아가서 책을 읽고 12시쯤 취침한다.

“낮에 30분 자는 것은 오래된 습관인데, 그게 굉장히 건강에 좋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때문에 평소에 많이 걷지요. 아마 제가 의사 중에 유일하게 골프를 치지 않는 사람일 겁니다. 제초제가 잔뜩 뿌려진 잔디 위를 걷는 게 운동이 되나요? 헬스클럽에서 제대로 운동을 해야 합니다.”

양영태 박사는 철봉을 하느라 박힌 손바닥의 굳은살을 보여주었다. 직장생활 하나만 하기도 벅찬 게 대부분 사람들의 일상이다. 양영태 박사는 몇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도 힘이 남아도는 듯했다. 실제로 양 박사는 힘이 세다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나이 생각을 왜 해요. 인간 수명이 150세라고 하잖아요. 그때쯤 되면 가겠지, 생각하고 지금 열심히 뛰는 거지요.”

양영태 박사는 자신의 소질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살린 케이스이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노래를 잘해 음대에 가라는 권유를 들었던 그는 음대 대신 서울대 치의학과에 진학했다. 치대에 다니면서 대학신문에서 학생기자로 3년간 활동했다. 졸업 후 치과의사가 된 그는 레지던트로 일할 때인 1972년 서울대 신문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만 해도 신문대학원이 대한민국에 하나밖에 없었어요. 거기 졸업하면 교수가 될 수 있었죠. 평점 A로 졸업할 때 적성에 맞아 저널리스트로 나갈까 고민하다가 치과 공부한 게 아까워 의사를 계속했죠.”
한국언론학회 회원으로 고참 중의 고참이라는 그는 그때부터 정치 칼럼을 비롯한 다양한 글을 썼다.

“잡지 편집에 관여하는 등 ‘잔 짓’을 많이 했지요. 정치 현상에 관심이 많아 정치 칼럼을  쓰다가 2005년에 인터넷타임즈를 창간해서 운영하고 있지요. 인터넷 신문이니까 돈이 많이 들지는 않아요. 객원기자들 월급 주는 정도죠. 하루에 제가 두 세 꼭지씩 씁니다.”

10년간 주간 <치과 타임즈>를 2만부씩 발행해 10억여 원의 적자를 내고 폐간한 일도 있다.
테너로 여러 무대에 섰지만 지휘의 꿈을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공을 하지 않아 기회가 오지 않자 1995년에 직접 서울 글로리아합창단을 창단했다.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하고 싶어 여기저기 알아봤으나 전공자가 아니면 대학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모집 공고가 났을 때 그간 무대에 섰던 자료를 모두 스크랩해서 제출했다. 합격을 해 최고의 합창지휘자인 윤학원 교수의 제자가 됐다.

합창단장이자 지휘자

 
“대학원에 다니면서 윤학원 교수님이 운영하는 한국지휘자아카데미에도 들어가 3년간 공부했어요. 두 군데 다니느라 고생은 했지만 공부는 확실히 했죠.”

서울글로리아합창단의 단원은 모두 70명이다. 솔리스트 4명과 반주자에게 자신이 사례비를 지급한다. 공연할 때마다 대관료도 양 박사가 마련한다.

“매주 월요일 종교교회에서 2시간씩 연습합니다. 단원들은 대개 구립합창단 출신이어서 실력이 있어요. 전공하는 학생들도 참여하고 있죠. 1년에 정기공연을 한 번 하고 중간 중간 초청이 있을 때마다 공연합니다.”

정기공연은 주로 KBS홀에서 했는데 정연주 사장이 취임한 이후 대관을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정연주 씨가 대학신문 한 기수 아래여서 학교 때부터 친했어요. 한겨레 논설주간 할 때 같이 점심을 먹을 정도로 가까웠는데 대관을 안 해주는 겁니다. 당시 내가 대령연합회 사무총장을 할 때였죠. 안면 싹 바꾸는 걸 보고 좌파들은 이념이 다르면 부모형제도 안돌아본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할 수 없이 국민일보 영산아트홀에서 공연을 하다가 요즘 다시 KBS홀에서 공연하고 있습니다. 음악세계가 너무 좋아 지휘할 때 혼을 빼앗깁니다.”

서울글로리아합창단은 천안함 46용사 추모음악회, 박세직 전 향군회장 추모음악회 등을 공연한 바 있다.
양영태 박사가 보수우익 연사로 대중들 앞에 선 것은 2003년 대령연합회 사무총장을 맡으면서부터이다.
“김대중 대통령 때부터 좀 심각하게 생각했어요. 북한에 갔다 온 사람들이 김정일을 통큰 지도자라느니 하면서 북을 찬양하는 게 못마땅했어요. 참 불행한 시대다, 적성통일이니 낮은 단계 연방제니 하다가 북한에 흡수통일 되는 거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한미연합사를 없앤다 어쩐다 해서 큰일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 서정갑 본부장님이 찾아와 같이 일하자고 제안하셨어요.”

대령으로 예편한 양영태 박사는 대령연합회 사무총장과 국민행동본부 부본부장으로 서정갑 본부장과 함께 열심히 뛰었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 건물 관리소장님이 밴을 몰고 함께 나갔어요. 차 안에서 군복을 갈아입고 행사장에 갔어요. 애국가 지휘를 하고 시청 앞 강연을 마친 뒤 동화면세점, 서울역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강연을 했죠. 끝나면 차 안에서 다시 의사 가운을 입고 병원에 와서 진료를 했습니다.”

애국운동에 뛰어 들다

애국운동에 뛰어든 것에 대해 양영태 박사는 이런 소감을 피력했다.

“1984년 1월 사회에 나오니 민간인들의 국가관이 우려할 만한 수준이었어요. 이러다가 나라가 절단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대령연합회와 국민행동본부가 애국운동의 효시입니다. 요즘은 국민들이 좌파는 안 된다는 인식을 많이 하지만 처음에는 가슴을 칠 정도였어요. 서정갑 본부장은 훈장을 받아야 할 분인데 각종 집회에서 불법을 저질렀다며 지금까지 검찰과 법원에 불려 다니고 있습니다. 이건 한참 잘못된 일입니다.”

양영태 박사는 서정갑 본부장을 비롯해 김상철 미래한국 회장,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 전원책 자유기업원장 같은 사람들이 없었으면 전시작전권이 넘어가는 등 우리나라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거라고 말했다.

“조갑제 대표는 국민행동본부 활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고 현재도 인터넷을 통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전원책 원장은 방송을 통해 우파 이론을 확신시키고 있어요. 미래한국은 일관된 논지로 보수우파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내용이 지적이며 가치지향적입니다.”

애국집회에서 양영태 박사가 대중 강연을 하면서 여기 저기 얼굴이 알려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병원 운영에 큰 지장은 없었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었을 때 MBC에서 병원으로 찾아와 저를 인터뷰 했어요. 견해를 밝혀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일국의 대통령이 자살을 하다니 말이 되나, 기본적으로 자질이 없다. 국가적으로 창피한 일이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죠. 그게 그대로 방송에 나갔어요. 그때부터 공갈 협박전화가 오고 난리났었죠. 그래서 서정갑 본부장께 경호요원을 소개해달라고 해서 이틀간 경호도 받았습니다. 그 이전부터 가스총은 갖고 다녔어요. 한 번도 사용한 적은 없지만.”

그 방송이 나간 뒤에 환자들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양 박사는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식인들은 추상적인 애국심은 있으나 구체적인 애국심이 없어요. 누리는 만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적화라는 불길한 예감 앞에서 더 이상 무슨 우선순위가 필요합니까.”

서정갑 본부장과 조갑제 대표 등을 극우라고 손가락질 하는 이들을 그는 이렇게 평가했다.

“나라를 위해 위대한 일을 한 그 분들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들을 극우라고 말하는 사람은 반 대한민국 인사라고 봅니다. 나라를 위해 고통과 멍에를 안고 피토하는 심정으로 뛴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국가관이 없는 반역자입니다. 진정한 우파라면 어려울 때 함께 나서야지요.”

8년간 대통령 주치의, 박근혜 대표도 치료

 
음악활동, 인터넷신문, 구국운동으로 바빠 본업인 병원 일은 뒷전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양영태 박사는 국가가 보증하는 실력 있는 의사이다. 1975년 치과 군의관이었던 그는 박정희 대통령 가족의 치과 주치의가 됐다. 그로부터 8년간 대통령 주치의로 일했다.

“그 전에 유신독재에 항거도 하고, 학생기자로 반정부적인 글을 쓰다가 요시찰 대상이 되기도 했어요. 막상 군에 들어가니 ‘국가’가 보이더군요.”

양 박사는 대통령 가족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이 직접 보낸 VIP들을 치료했다. 분노와 불안을 잘 참거나 단호한 성격인 사람은 무의식 중에 치아를 꽉 물게 돼 치아 마모도가 심하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치아가 건강했으나 치아 마모가 심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잇몸 치료도 삼갔을 정도로 간경화 증상이 심했다고 한다. 시해사건이 없었더라도 오래 살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안 좋은 상태였다. 박근혜 대표는 서강대 3학년 때부터 치료를 받았는데 무척 상냥했지만 그때부터 근엄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고 한다.

10·26 때 국가 원수가 시해를 당하는 모습을 본 양영태 박사는 한국 정치와 권력에 환멸을 느껴 외국 유학을 가려고 했다. 예편신청을 했으나 전두환 대통령이 만류했다.

“보안사령관 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였어요. 예편하겠다고 했다가 혼이 났어요. 국가를 위하는 의사도 있어야 하고 동네 개업의도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계속 대통령 주치의를 맡게 됐지요.”

전두환 대통령은 치아가 깨끗하고 치열이 매우 고른 편이었다고 한다. 치아 치료를 받을 때 코를 골며 잠을 잘 정도로 대범했다. 그에 비하면 노태우 대통령은 치료를 할 때 상당히 긴장하는 스타일이었다. 1983년 10월 아웅산 사태가 났을 때 내과 주치의였던 민병석 박사는 전 대통령을 수행했다가 순직했다. 양 박사는 치과 주치의여서 따라가지 않아 화를 면했다.

국군 서울지구병원의 부원장 겸 치과부장이자 대통령 경호실 요원이었던 그는 1984년 1월 병원장직과 준장 진급 제안을 받았지만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때 여의도에 치과병원을 열어 지금까지 한 자리에서 27년 넘게 환자를 받고 있다.

대통령 주치의를 지낸 그에게 특별한 환자들이 많이 찾아온다. 1987년에 KAL기 폭파범 김현희 씨도 방문했다. 충치를 금으로 봉하는 치료를 받았는데 피부가 백옥처럼 희고 건강미가 느껴졌다고 한다.

양영태 박사는 앞으로도 계속 진료를 하면서 합창단과 인터넷타임즈를 이끌어갈 예정이다. 가을쯤에 인터넷타임즈를 대대적으로 개편해 유명 인터넷신문으로 만들 복안을 갖고 있다고 했다. 얼마 전 브레이크뉴스 문예공모에 시가 당선돼 요즘 시도 쓰고 있다. 좌파정권이 종식되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그는 대령연합회 사무총장직과 국민행동본부 부본부장직을 내놓고 이사 직함만 갖고 있다. 합창단 운영과 인터넷신문사 운영에 사비가 많이 들어가지만 쓸 만큼 들어오니 걱정없다며 웃었다. 부인이 자신의 활동을 적극 지지하고 있어 운신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고 했다.

인터뷰를 끝낸 후 양 박사는 병원 로비에 놓인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다는 그는 코드법을 활용해 능숙하게 연주했다.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 다 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 실천하는 양영태 박사. “보수대연합과 공정한 경선을 통한 후보단일화만이 보수 우파의 승리를 가져온다”는 당부로 말을 맺었다. (미래한국)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이승재 기자  fotolsj@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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