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다 만 개인들
되다 만 개인들
  • 이강호
  • 승인 2012.04.23 17: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강호의 역사이야기]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사학자 부르크하르트에 따르면 중세의 해체와 함께 ‘개인’이라는 새로운 성격의 인간이 등장했다. 중세적 공동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율적이고 도덕적인 인간형이었다. 이러한 개인성의 확산은 그에 어울리는 제도들을 낳았는데 18세기 말~19세기 초 영국에서 등장한 의회제 정부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그러나 전통적 공동체의 해체가 바람직한 결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자율적이고 도덕적인 ‘개인’과 정반대의 부정적 성향을 가진 ‘다중’ 또한 통제 밖으로 풀려  나온 것이다.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오크숏(Michael Oakeshott)은 이들을 일컬어 “되다 만 개인들”(individuals manques)이라고 불렀다. 인격적 독립이라는 책임을 받아들일 의지가 없어 새로운 상황에 뒤처졌으면서도 ‘시기, 질투, 적의’로 가득 차 있는 도덕적 사회적으로 실패한 무리! 오크숏이 본 이들의 특성이었다.

오크숏은 19세기 말 보통선거권이 확립되면서 이 ‘열등한 대중’의 압력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대중의 권력이란 결국 숫자의 힘인데, 이 힘이 보통선거를 통해 본격 발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성인이면 남녀노소, 재산의 다과, 신분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한 표씩 행사하는 것이 보통선거의 원칙이다. 이 원칙은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당연한 상식으로 돼 있다. 하지만 그 상식에 과연 맹점은 없는가?
오크숏은 보통선거와 함께 대중이 정치에 전면적으로 힘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정부는 “그저 수의 권위”에 기초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쪽수’에 의존한 정치가 과연 도덕적인 것인지 묻고 있다.

결국 국민 대중의 수준이 문제다

개인도 그렇지만 정부도 당연히, 아니 더욱 더, 옳고 그름과 현명함이 중요하다. 하지만 옳고 그름과 현명함은 ‘쪽수’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통찰력과 판단의 적실성에 달려 있다. 그래서 정치 지도자는 때때로 여론과도 맞설 수 있어야 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20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작가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저서 <영웅전>에서 “민중을 거스르면 민중의 손에 망하고, 민중을 따르면 민중과 함께 망한다”고 갈파했다. 플루타르코스 시대는 보통선거의 시대도 아니었다. 그런데 보통선거 원칙이 상식으로 확립돼 있는 오늘날 같은 시대에 그의 언명을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정치인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정치지도자의 덕목은 중요하다. 하지만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결국에는 국민의 수준에 달려 있다. 우리의 경우 민주화가 이뤄지기 이전에는 만사를 독재정권 탓으로 돌린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민주화가 이뤄지고 난 이상 만사 정권 탓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그런 정치인 그런 정부를 뽑는 게 대중 자신이기 때문이다.

유권자의 수준이 정치인의 수준이고 정부의 수준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민주화 이후 지금까지 귀로 듣고 눈으로 확인하고 몸으로도 겪어왔다.그런데 우리는 이번 4·11 총선 국면에서 그런 일반론적 교훈을 넘어서는 또 다른 체험을 한 가지 더 하게 됐다. ‘쪽수’만이 아니라 ‘목청의 크기’에도 시달린 게 어제 오늘이 아닌데 급기야 ‘욕설과 막말’이 날뛰는 꼴까지 감당하게 된 것이다.

입은 배설구가 아니다. 음식을 섭취하고 말을 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오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을 더 이상 입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코밑에 배설구를 단 이런 자들이 총선 전부터 세상을 휘저어댔다. 나꼼수 무리들이다.

사회적 책임 없는 분노의 배설

이들 나꼼수 패거리들은 오크숏이 말한 바가 너무 잘 들어맞는 “되다 만 개인들”의 전형이다. 사회적 책임은 커녕 스스로의 부족함을 눈곱 만큼도 돌아보지 않으면서 ‘시기, 질투, 적의’로 가득 차 있는 무리들이다.

이번 총선 결과는 분명히 이 무뢰배 패거리와 그에 편승한 정치집단에 대한 경고다. 우리 유권자가 그래도 웬만큼은 정신적 건강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과연 안심할 수 있을까?

그 욕설 망나니 후보가 낙선했다고는 하지만 무려 44.2%의 득표율을 올렸다. 이 표들은 도대체 무엇이라 해야 하나? SNS에서는 턱없는 궤변이 여전하고 날뛰던 무리들도 반성이 없다. 분노의 배설은 있지만 칼 슈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적 책임은 부족한 인민주권”이다.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칼 슈미트는 이러한 무책임한 인민주권은 결국 공산주의로의 길을 연다고 했다. 물론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나치즘을 향해 갔다. 하지만 사실 두 전체주의는 본질적 동색이니 결국 같은 얘기다.

총선이 끝난 며칠 뒤 난데없이 멧돼지 출현 뉴스가 나왔다. “수도권 도심 한복판에 멧돼지 2마리가 잇따라 나타났습니다 … 경찰은 ‘멧돼지가 먹을 것을 찾아 주거지역까지 내려온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나꼼수 출신 후보의 별명이 ‘돼지’라고 해 묘한 오버랩이 느껴지지만 물론 그를 지칭한 건 아니다. 진짜 멧돼지 얘기다. 그런데 먹이를 찾아 인간의 주거지역으로 온 것 같다는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그 멧돼지는 경찰에 의해 사살됐다. 하지만 배고파하며 먹이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놈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꼼수 류 돼지 무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미 1차 표로 응징이 됐고 대중이 식상해 하는 조짐이 있어 더 이상 걱정할 게 아니라는 평도 있다. 더러는 계속 설치도록 내버려두는 게 대선에 오히려 유리할 수 있다는 말도 한다. 하지만 방치하면 알게 모르게 익숙해져 대중의 수준을 계속 떨어뜨리게 되고 그 수준 저하는 대중이 결국 자멸적 선택에 더 쉽게 다가서게 만든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 말해주듯이 난장판의 범죄를 막으려면 작은 쓰레기도 치울 때 깨끗이 치워야 한다. 그래야 편승하려는 자들도 엄중히 심판할 수 있다.

“그 무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작용으로, 그는 온갖 힘을 가지고 거짓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며, 멸망할 자들을 상대로 온갖 불의한 속임수를 쓸 것입니다 …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한 자들이 모두 심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後 2장 9~12절이다. 나꼼수라는 무법자들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자들의 관계에 매우 잘 어울리는 구절이다. (미래한국)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