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의 보수적 미덕
SF의 보수적 미덕
  • 미래한국
  • 승인 2012.04.30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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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든 영화든 SF는 나름의 독립 장르다. 그런데 그냥 판타지로 함께 묶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SF가 그런 측면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SF의 진면목은 환상에 있는 게 아니다. Science Fiction은 말 그대로 허구이되 과학적으로 그럴 듯한 이야기일 때 합당하다. SF의 첫 번째 미덕은 과학적 상상력이다.
 
동서고금 어느 문화권에나 판타지 성격의 이야기가 있다. 古來의 신화, 전설, 설화 등은 영화 소재의 보고다. 중국문화 영향권에선 그런 이야기들이 무협물 형식으로 영화화되는 경우가 많다. 서구의 경우도 그리스, 켈트, 게르만 신화 등이 끊임없이 영화화된다. 톨킨 원작 <반지의 제왕>도 이야기의 뿌리는 게르만 신화에 있다. 하지만 SF는 좀 다르다. 전적으로 서구의 근대 과학기술문명의 산물이다.
 
SF소설의 탄생은 유럽이다. 프랑스의 줄 베르너의 <달세계 여행>(1865년), <해저 2만 리>(1870년) 등을 효시로 여러 작품들이 나왔다. 그런데 SF가 가장 화려하게 꽃핀 곳은 미국이다. 유럽에선 고급 취향의 본격 문학이 늘 강했지만 미국에서는 일찌감치 대중적 이야기물이 크게 유행했다. SF물은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장르였다. 작품들이 쏟아지고 휴고 상, 네뷸러 상, 캠벨 상 등 대표적인 SF 문학상이 모두 미국에서 탄생했다. 세계 3대 SF 작가로 일컫는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C.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 모두 미국을 주 무대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래서 SF는 어떤 점에선 ‘맥도널드’만큼이나 미국적이다.
 
신화적 판타지든 SF든 모두 ‘낯선’ 체험을 호소력으로 한다. 하지만 제공하는 ‘낯섦’의 성격이 다르다. 신화적 판타지가 대개 ‘옛날’과 ‘신기함’을 앞세우는 반면 SF는 시공간적 확장성을 주로 앞세운다. 미래와 우주라는 모티브가 전형이다. 여기에 과학기술이 더해져 판타지의 마법을 대신한다.
 
이런 특성의 SF가 미국에서 크게 흥한 것은 과학기술문명이 미국에서 최대 융성을 맞은 게 한 원인이었다. 특별히 되돌아 볼 신화적 과거를 갖지 않은 미국적 특성도 배경이었다. 주요 무대로 우주라는 확장된 공간이 등장하는 것도 프런티어의 개척과 확장을 거듭해온 미국역사와 무관치 않다.
 
Star Trek 이야기
 
SF에도 물론 암울한 미래를 다룬 이른바 ‘문제작’들이 있다. <Blade Runner>(1982년) 등이 한 예다. 하지만 미국적 SF의 전형성은 역시 과학기술에 대한 신뢰와 미래에 대한 낙관적 태도다. 특히 대중적 성공을 거둔 작품일수록 그렇다. <Star Trek>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Star Trek>은 1966년 진 로덴베리가 TV드라마로 제작 방영한 이래 TV시리즈만 모두 5차례 제작됐는데 마지막 시리즈가 끝난 게 2005년이니 거의 40년 가까이 계속된 셈이다. 영화로도 계속 제작돼 1979년부터 2009년까지 모두 11차례 만들어졌다. 그 외에 소설, 게임으로도 만들어져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산업’이 돼 있다.
 
<Star Trek>과 비교할 만한 경우가 조지 루카스가 만든 <Star Wars>다. 하지만 <Star Trek>은 다른 차원의 대접을 받고 있다. 열혈 팬을 칭하는 트레키(Trekkie)라는 신조어가 辭典에 등재된 지 오랠 만큼 미국에선 일종의 현대적 문화유산과 같은 존재다. 이런 분위기는 미국뿐 아니라 다른 영어권 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호주에서는 <Star Trek>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나왔다. 2006년 조이미 베이커라는 정치학자가 TV시리즈 40년 치 전편을 분석해 호주 멜버른 대학에서 박사학위와 함께 최우수 학술상을 받은 바 있다.
 
<Star Trek> 탄생에는 케네디가 ‘뉴 프런티어’ 정신을 외쳤던 1960년대 미국의 분위기가 반영돼 있다. <Star Trek>에 나타난 시공간적 확장은 서부개척시대 이래 계속된 프런티어 정신의 SF판이었다. “Boldly Go Where No one has gone before!” <Star Trek> 오프닝 멘트의 마지막 대목인데 문학적 걸작이다. “전인미답의 길을 용감히 밟으라!”라는 이 진취적인 외침은 40년간 TV시리즈와 극장판 모두에서 변함없이 되풀이 되고 있다.
 
그런데 <Star Trek>이 그처럼 장구한 생명력을 유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건강한 이야기’이라는 게 가장 큰 미덕이었다. 40년간의 갖은 정치적 사회적 굴곡에도 불구하고 낙관주의가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자유의 정신과 우애, 헌신, 용기 등의 덕목이 전 시리즈에서 변함없는 가치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과학기술이 이야기의 주요 장치이지만 종교와 신앙의 문제가 결코 소홀히 취급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주인공들은 모두 군인이다! 당연히 규율은 핵심 덕목이다. 섣부른 선입견과 달리 <Star Trek>에는 보수적 가치관이 연면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SF는 인간과 세계의 변함없는 본질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와 함께 캐릭터와 갈등구조의 생동감도 <Star Trek>의 큰 장점이다. 역설적이게도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점에선 SF 자체의 특성과도 관계 있다. 시공간적으로 미래와 우주로 확장되고 첨단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세계지만, 거기서 갈등하고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오늘의 우리는 물론 옛 이야기의 인물들과도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어쩔 수 없이 현재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약점 때문이라 하겠지만, 어떻든 그 덕분에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삶의 본질적 양태는 바뀌지 않음이 더 선명히 드러난다.
 
특히 <Star Trek>은 그 점을 거의 고의적으로 강조한다. 심지어 수많은 외계 종족들조차 독특성과 문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행동 양태에선 인간과 대차 없는 것으로 그린다. 외계 종족이 셰익스피어를 인용하고 지구인 주인공들도 그 외계 종족의 문학작품을 들먹이거나 그리스 고전을 인용한다. 시공간은 물론 종족도 넘어 아예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보편적 공통점을 갖는 것으로 묘사해버리는 것이다.
 
SF는 낯선 시공간과 첨단의 과학기술에 인간상을 대비시킴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변함없는 본질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과학적 상상력 이상 가는 SF의 미덕이다.
 
- 이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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