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 역사프로젝트와 이승만
한국 근·현대 역사프로젝트와 이승만
  • 미래한국
  • 승인 2012.05.0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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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00년의 짧은 기간에 대한민국은 몇 가지 역사적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했다. 결과적 성공이 오늘의 대한민국이기도 하다. 첫째는 근대문명화였고, 둘째는 항일독립이었으며, 셋째는 반공민주적 건국이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조선왕조는 전 세계적 근대문명화가 진행되던 세계 변화의 시대에 문명 개화의 길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 조선에서 1875년에 태어난 이승만 대통령은 1890년대부터 비록 청년의 신분이었지만 봉건제 극복과 문명 개화를 향한 활동의 중심에 있었고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이상재, 서재필 선생과 독립협회 활동과 독립신문을 만들었고 만민공동회 활동 등을 통해 조선의 문명 개화에 나섰다. 누구도 당대에 조선의 운명에 맞서면서, 조선의 문명 개화와 절대군주제 및 반봉건의 투쟁에 이승만 대통령이 수행했던 치열함과 간절함을 넘어설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 가야 했던 또 다른 두 번째 운명이자 프로젝트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반제국주의 투쟁이자 항일독립 투쟁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36년간의 식민상태에 있던 한국에서 가장 열렬한 항일운동의 중심이었다. 그랬기에 1919년 3.1운동 직후 만들어진 한성 임시정부나 상해 임시정부에서 하나같이 모두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이승만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알렸고 대한민국은 독립국가로 가야 한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확인시켜왔다. 미국의 소리(VOA)를 통해 한국민에게 대한독립의 희망을 키우도록 했고 카이로(Cairo, 1943)선언을 통해 국제사회가 한국 독립의 방향을 찾고 지원하도록 했다.

이승만이 펼친 항일독립투쟁의 백미는 역시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 나서야 하며 미국의 대일본전쟁 승리만이 대한민국이 자주독립될 수 있다는 명확한 방향과 확신을 갖고 활동한 사실이다. 일본 군국주의의 지배와 확장은 결국 세계사적으로 전체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간의 대결로 전환된다는 사실을 이승만은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일본과 전쟁을 하지 않으려는 미국을 대상으로 일본이 얼마나 가혹한 전체주의이고 일본과의 대결 없이는 세계평화도,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도 없다는 것을 그의 대저작인 <Japan Inside Out>(1941)에 명확히 역설했고 결국 그런 탁월한 예견과 정책 방향이었기에 그 책은 미국의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독립은 물론 일본을 대상으로 한 전세계적 대응과 일본 패망을 이끌어낸 탁월한 항일독립운동가이자 세계적 지도자였다. 당대 미국은 물론 일본 점령 상태의 중국과 한국의 그 누구도 그 만한 탁월한 시각과 활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할 지도자는 없었다. 그랬기에 한국은 해방 독립될 수 있었고 우리 국민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모실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세 번째 프로젝트는 반공 건국과 자유민주적 건국이다. 건국은 당연히 저절로 될 수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다. 다른 대부분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나라들은 건국 과정에 돌입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한국은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그날부터 이번에는 한반도에 불어 닥치는 공산전체주의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소련 전체주의는 일제보다도 더 가혹하고 참혹한 소비에트체제였다. 일본과 계속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소련은 원자폭탄이 일본에 떨어진 후인 1945년 8월 9일부터 불과 6일간 대일본전에 참전한 것을 근거로 한반도 북부를 장악하고 탄압과 약탈 및 학살을 자행하며 한반도 전체를 소비에트체제이자 위성국가로 만들어 나가고자 했다.

우리 대한민국이 맞서 극복해야 했고 이승만이 풀어가야 할 또 다른 프로젝트는 공산전체주의의 확장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과 이승만 반공투쟁의 과정이란 엄청난 희생과 가혹한 폭력과 전면전쟁을 수반하는 것이기도 했다. 1948년 건국 전후에 펼쳐진 극심한 폭동과 좌우투쟁, 그리고 공산좌익세력의 건국저지 투쟁에 맞서 나라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항상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대한민국 전체를 공산화하고 소련 지배국가로 만드는 데 실패한 공산세력은 중국 공산화가 달성되자마자 한반도의 나머지 자유민주체제인 한국을 대상으로 6.25 전면 침략전쟁을 감행했다. 일제로부터의 독립에 이어 또 다른 전체주의 체제인 공산 전체주의세력이 주도하고 참여한 전쟁에서 대한민국은 나라를 지키고 살아남게 만드는 전쟁에 나서야 했다. 결국 대한민국은 유라시아대륙 전역의 공산화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 남았고 그 결과 대부분의 사회주의국가가 걸었던 참혹과 후퇴를 겪지 않고 오늘의 빛나는 대한민국을 구축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건국투쟁의 다른 측면은 민주주의 혁명이다. 단지 정부수립이 아닌 한반도 땅에 자유민주체제를 건설하는 것이 대한민국 건국의 본질이다. 오랜 기간 염원해오던 민주공화제가 드디어 세워졌고, 1950년 5.10선거에서부터 자유민주적 선거가 시작됐다. 그것은 여성과 문맹자를 포함한 모든 국민에게 참여권이 부여된 한국 정치사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국민대표자에 의해 주권대리기관인 국회가 구성되고 헌법이 만들어지면서 법치주의와 헌정질서가 시작됐고 독립된 사법부가 갖춰지는 등 삼권분립의 통치체제가 정착되는 것도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의 민주혁명으로 만든 것이다. 자유롭게 정치세력을 만들 수 있고 다수의 정치세력이 경쟁하고 정당간의 경쟁 속에 국민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건국시의 민주혁명의 결과이다.

이승만을 제외하고는 대한민국 건국과정의 거대한 민족사적 민주혁명을 결코 말할 수 없다. 문명 개화와 독립은 물론 반공과 민주혁명의 길에 이승만의 리더십이 있었다. 가장 빛날 뿐만 아니라 감히 남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승만의 민주혁명으로 한국은 1948년부터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도적 길을 만들고 남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으로 민주 발전의 역사를 만들 수 있었다. 특히 반공투쟁은 한국의 민주주의 투쟁의 본질이다. 공산주의 확산의 저지와 공산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는 것보다 더 숭고한 자유민주투쟁이 있을 수 없다. 민주주의 발전에서 오랜 역사를 갖는 선진국은 참정권 투쟁, 왕권제한 투쟁, 국민의회 구성이나 여성 투표권 허용투쟁 등이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투쟁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기본적 민주주의는 1948년에 다 도입되고 경험과 시행착오를 거친 정착 과정에 이미 들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투쟁이란 만들어 놓은 자유민주체제를 위협하고 공격하는 공산주의와 대결해 지켜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한국 민주투쟁의 본질이고 구체성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지난 100여 년간 한국 문명 근대화와 자주독립, 그리고 건국을 통한 반공산전체주의와의 투쟁 및 민주주의 혁명을 주도한 민족지도자였다. 대한민국이 완수해야 할 100년간의 핵심 프로젝트에 이승만은 항상 중심이었고 가장 커다란 업적을 남겼고 그 토대 위에 우리가 있고 대한민국이 있다고 생각한다. 업적이 너무도 훌륭했기에 우리 민족사가 겪은 몇 백 년간의 침체와 변방 시대를 끝내고 대한민국 시대부터 기적 같은 성공을 일구며 세계사의 중심무대로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도 1965년 이승만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이승만대통령의 국립묘지 안장식에서 “역사를 헤치고 나타나, 자기 몸소 역사를 짓고, 또 역사 위에 숱한 교훈을 남기고 가신 조국근대의 상징적 존재”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그 표현에서 한 글자도 뺄 필요도 없이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를 만들고, 지키고 건설하며 대한민국과 보편세계가 갈 길과 교훈을 만들었다.

김광동 편집위원. 나라정책연구원 원장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발간 이승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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