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지금은 새로운 토론을 준비할 때
2030, 지금은 새로운 토론을 준비할 때
  • 미래한국
  • 승인 2012.05.11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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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우 칼럼니스트

올해 서른을 맞이한 나는 2030세대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다른 모든 세대들이 그러하듯이 2030에게는 우리만의 역사를 통과하면서 지니게 된 고유한 특징이 있다.

젊은 세대의 사회 진출이 점차 가시화되고 2030의 정치적 의견이 커다란 흐름을 만들고 있는 지금, 우리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건 작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2030세대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은 가난을 모른다는 점이다. 박정희 사후의 세계만이 우리가 경험한 것의 전부다. 대한민국이 한때 태국과 필리핀, 심지어 북한보다 못 살았다는 사실은 교과서 속의 활자로만 인지될 뿐 좀처럼 피부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적시에 공급하는 것만이 인생의 테마인 부모가 있었고, 그들은 우리의 왼손에 휴대폰을 오른손에 마우스를 쥐어 줬다. 한때는 한국인 모두가 경험했던 참혹한 갈증과 가난을 대다수의 2030들은 스무 살을 넘긴 뒤 군대에 가서야 처음으로 경험했다.

2030세대가 모르는 것은 또 있다. 독재다. 권력에 대항했다는 것만으로 무고한 사람이 희생되던 권위주의의 편린을 우리는 그저 교과서에서만 읽었을 뿐, 민주화 이후의 세계만이 우리가 경험한 것의 전부다.

권력의 횡포보다는 그것의 극복만을 접한 2030은 기득권 골리앗에 대항해 끝내 맞서 이기는 풋내기 다윗의 역전 활극에 태생적으로 관대하다. TV를 틀어 스포츠 중계를 중간부터 볼 때 특별히 좋아하는 팀이 없다면 당연히 지고 있는 팀을 응원한다. 이것이 바로 2030이 정의(正義)를 적용하는 방식인 것이다.

2030세대의 특징들, 약자 동정 논리에 좌우

가족이라는 온실 안에서 평온하게, 개인의 안위만을 생각해도 좋았던 2030의 자의식은 IMF를 지나면서 한 번 출렁였다.

나의 경우 그것은 중학교 3학년이었고 엄격한 도덕 선생님은 비통한 표정으로 중학생이 알아듣기엔 너무 높은 수준의 경제 현황을 스케치해 줬다. 내용보다는 뉘앙스로 지금이 위기라는 걸 알았다. ‘정리해고’라는 용어가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렸고, 금고에다 돈을 그렇게 많이 쌓아놓는 은행도 망할 수 있다는 참신한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 2030의 세계관은 돈을 가진 강자와 돈이 없는 약자로 다시 한번 재편됐다. 온 국민이 참여한 금 모으기 운동은 약자가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몸부림처럼 느껴졌고, 이 물결은 ‘축구 약자’ 대한민국이 4강까지 진출했던 2002년 월드컵으로 다시 한 번 응집됐다.

이후로도 군중의 집합은 미선이 효순이 사건과 광우병 등으로 자주 재현됐고, 정보화 선진국답게 요즘은 그 물결이 SNS로 옮겨간 형국이다. 매체가 변했을 뿐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의 쇠락을 바라보며 정의의 실현을 연상하는 사고 회로는 그대로다.

16대 대통령 노무현이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도 바로 이러한 부분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바보’라는 별명이 자랑스러울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권력의 정점에까지 올라섰음에도 약자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지켜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MB정부에 대한 2030의 적개심이 궁극에 달한 것도 노무현의 상실을 계기로 일군의 정치세력이 스스로를 약자로 포지셔닝하는 데 성공한 덕택이다. 정치라는 이름의 TV를 틀었을 때에도 당연히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지고 있는 팀을 응원하게 마련인 것이다.

알고 보면 그들 세력 역시 10년간의 권력 체험 속에서 훌륭하게 ‘기득권B’로 자리 잡았음을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제 와선 스스로에게 붙여진 보수의 이름표를 부끄러워하고 있는 새누리당은 다만 부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2030에게 억지로 어필하려는 구태의연한 전략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역사의 힘을 믿어야

그러나 대한민국 정치의 발전은 2030이 얼마나 빨리 ‘강자 vs 약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느냐에 달려 있다. 스스로를 약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진영논리 안에선 권력을 잡으려는 일부 정치인들의 거수기 역할 밖에 못한다는 사실을 하루 속히 각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강약의 논리 대신 우리가 새롭게 채택해야 할 논의의 구조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우리는 2007년 개정된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전 버전에 있었던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표현은 어차피 2030의 사고방식에는 존재조차 하지 않던 것이었다. 대신 그 공백을 메운 ‘자유’와 ‘정의’의 가치야말로 새 시대의 보수와 진보가 양분해야 할 가치에 다름 아니다.

내가 자유주의자라고 해서 70억 인구가 모두 자유주의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의를 우선시하는 진보 진영에 속한 2030도 인생이 오직 정의만으로는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선호하는 가치를 위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다. 여기에는 강자도 약자도 없고 다만 법 앞에 평등한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가난과 독재는 한 인간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떨어트리고 세상을 홉스 식의 투쟁 국면으로만 바라보게 만든다. 선배들의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노력 덕택에 2030은 그 과정을 생략한 채 살 수 있었고, 이 점에 대해서 자랑스럽고 고마워할 양심은 있다. 다만 이제 우리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야 할 2030은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토론을 준비해야 한다.

토론을 하는 상대방은 악마가 아니라 그저 나와 조금 다른 생각을 가졌을 뿐임을 이해하는 관용의 씨앗이 지금의 2030에게는 뿌려져 있다. 정치의 해를 맞아 입만 열면 새로운 대한민국의 청사진을 약속하는 정치인들의 거짓된 입술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역사의 힘을 믿고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펼쳐나가는 2030들로부터 이 나라는 새로운 역동을 시작할 것이다. 

이원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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